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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5. 2023

일단 눕고 본다

Ver. 2.0

 월요일엔 가슴을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주변 헬스인은 죄다 월요일은 가슴이라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 내로라하는 보디빌더들도 월요일에는 대표적인 흉부 운동인 벤치프레스를 가르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궁금해져서 주위에 물어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마치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처럼 너무 익숙해져서 누구도 더는 이유를 묻지 않는 일반 상식으로 굳어졌다. 내 추측건대 누워서 시작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벤치프레스는 등 상부와 엉덩이를 벤치에 누인 채 바벨이 달린 무거운 봉을 가슴 위로 있는 힘껏 밀어내는 동작이다. 퇴근 후에 누울 수 있다는 건 큰 위로다. 다들 분주한 주말을 보내고 잔뜩 위축해서 출근한 월요일 아닌가. 보나 마나 죽상을 하고 천근만근 몸을 일으켜서 아침 회의에 참석했을 것이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오후를 보내고 주간에 해치워야 할 과제를 줄줄이 받아 든 채 퇴근했을 게 뻔하다. 이런 혹독한 월요일에 피로를 무릅쓰고 헬스장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뭐, 할 때 하더라도 잠시 멍 때리는 거 정도는 괜찮잖아?’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인지 월요일만 되면 헬스장에는 대표적인 가슴 운동 기구인 벤치프레스 머신을 차지하기 위한 하이에나들이 눈치 싸움에 한창이다.


 오늘 나도 가슴을 하려고 헬스장을 찾았다. 다행히 일찍 도착해서 벤치는 한가했다. 운동 전 몸을 푼다는 구실로 벤치에 누워서 여러 생각을 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잠시 눈을 감고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했다. 이어서 밥 먹고 들를 커피집을 정하고, 내일 출근하고 나서 상사에게 보고할 내용도 생각해 뒀다. 눕고 보니 골치 아프게 여겨졌던 일도 다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데카르트도 누워서 수학 문제를 풀었다더니 몸을 수직에서 수평 자세로 놓으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미켈란젤로도 시스티나 성당에 눕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천장화를 그릴 순 없었을 것이다. 내 방보다 편안한 벤치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다리를 달달 떨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멜론으로 아드레날린을 폭발시켜 줄 노래를 골랐다. 기분 좋은 음악은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주니까. '재달'과 '소마'가 부른 [HOME]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바벨봉을 강하게 움켜쥐고 배에 힘을 준 채 벤치프레스를 시작했다.


 첫 세트를 잘 해내니 그다음 세트부터는 어렵지 않았다. 오늘은 선곡 덕택에 확실한 운동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운동할 땐 꼭 신나거나 쿵쾅거리는 비트가 아니어도 괜찮다. 서정적인 멜로디도 심신을 이완시킨다. [HOME] 가사엔 이런 구절이 있다. "넌 높은 담을 넘어 벽을 부수고 날 들어 올려 한 손에 쥐어 들어. 난 숨을 참고 바닥을 향해 허우적대. 너는 나를 뒤집어 돌려, 내게 입을 맞춰주네. 내 사랑아, 내 목을 조르고 터질 듯한 숨을 불어넣어 줘. 내 사랑아, 내 온몸을 찌르고 세게 껴안아 피를 멎게 해 줘." 난 달곰한 목소리에 취해 가사처럼 벽을 부술 기세로 바벨 봉을 들어 올렸다. 있는 힘껏 숨을 참고 가슴팍에 힘을 준 채 온 힘을 다했다. 종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서 축 늘어진 몸에 피가 돌면서 관능적인 기분을 느꼈다.


 한 세트가 끝날 때마다 삼 분 휴식을 갖는다. 쉴 땐 몸을 푸는 게 좋지만, 보통은 스마트폰을 붙들고 인스타그램을 한다. 막간을 이용해서 해시태그로 #benchpress를 검색했더니 전 세계 헬스장에서 벤치프레스로 한 주를 시작하는 무수한 헬스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나보다 더 큰 무게를 들며 더 큰 근육을 뽐냈다. 승부욕이 발동한 나는 강한 동기부여를 받으며 다음 세트로 접어들었다. 인스타그램을 할 때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건 비싸고 늠름한 운동 기구가 잔뜩 깔린 최첨단 헬스장이다. 긴 세월 낡고 허름하고 무엇보다 저렴한 헬스장만 찾아다닌 나로서는 휘황찬란한 기구에 넋이 나갔다.  나도 최신 시설이 갖춰진 헬스장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좋은 헬스장은 시내 중심가에 몰려 있어서 집에서 너무 멀었다. 개인적으로 헬스장을 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위치다. 헬스장은 동네마다 다 있지만 고작 길 하나만 건너도 직장인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광활한 거리감을 느낀다. 사실 몸을 키우는 데는 바벨과 덤벨, 스미스머신, 파워랙과 같은 기초적인 기구만 있으면 충분하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헬스장에서 비싼 돈 주고 회원권을 끊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용하던 기구에만 손이 가기 마련이다. 한시가 바쁜 직장인이라면 역시 회사나 집 앞이 최고다.


 인스타그램 헬스장을 보면서 가장 시샘하는 건 남녀비율이다. 내 주변에는 온통 골격근 냄새가 진동하는 수컷들과 족히 삼십 년은 쇠와 씨름해 온 어르신들뿐인데 인스타그램에는 웬일인지 여성이 더 많아 보였다. 아무래도 남자든 여자든 매력적인 이성이 많으면 자주 가게 마련이고, 그만큼 자극을 받아 운동을 더 열심히 한다. 난 태평양 건너에 있는 헬스인에게 질투와 시샘을 느끼면서 바벨을 더 끼우고 다음 세트를 이어갔다. 조금 무리했나 싶더니 허리가 뻐근해졌다. 욕심을 부리다가 하마터면 바벨 봉에 깔릴 뻔했다. 난 이런 상황을 위해 유튜브에서 '봉에 깔렸을 때 빠져나오는 법'을 봐뒀지만, 막상 깔리고 나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유튜브 트레이너는 능숙한 조교처럼 날렵하게 주요 부분을 피해 빠져나왔지만, 난 딱 봐도 죽을 고비를 넘기는 사람처럼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렇게 민망할 땐 남탕이 도움이 된다.


 내가 벤치프레스를 좋아하는 다른 이유는 눈에 잘 보인다는데 있다. 운동을 오래 해도 몸을 변화시키기란 참 어렵다고 느끼는데 가슴 근육만큼 변화가 잘 보이는 근육도 없다. 닭을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가슴에 힘을 주고 바벨봉을 들어 올리면 방금 전과는 달리 빵빵해진 가슴이 바로 눈에 띈다. 그래서 다른 부위에 비해 가슴은 거울을 볼 때 폼이 나는 운동이다. 평소 입던 티셔츠가 타이트해지면서 자신감도 커진다. 거울 속 내가 멋져 보이면 내가 비로소 근육을 얻었다는 실감에 신이 난다.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아메리칸 뷰티>를 보면 매사 무기력하고 직장에서 무시당하는 집안의 가장 레스터가 벤치프레스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그는 어느 날 직장을 때려치우고 딸 친구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아내는 바람났고 앞으로 뭘 할지 가늠도 할 수 없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웃통을 벗고 벤치프레스를 하며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레스터는 한 가족의 가장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고지식한 세상을 비웃는 악당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 중산층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지만, 내겐 넓은 가슴이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레스터가 대마 대신 단백질 보충제 두 스푼을 저지방 우유에 넣고 흔들었다면 보디빌딩 권장 영화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어느새 5세트, 몸일 달달 떨릴 정도로 부담스러운 중량을 매달고 밀어 올리자 전신에 부하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띵해지면서 얼굴이 벌게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어.' 내가 일어나자 곧바로 머리가 짧은 청년이 벤치프레스 기구에 발라당 누웠다. 그 역시 오르락내리락 끝없이 반복하는 시시포스처럼 끊이지 않고 가슴을 자극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벤치프레스 기구 옆으로 사람들이 어슬렁거렸다. 보통 헬스장에는 벤치프레스 기구가 많아야 두세 개뿐인데, 월요일에는 무조건 가슴이라는 룰을 어길 수 없어 빚어지는 촌극이다. '이렇게 밀릴 땐 '케이블 크로스오버'나 '덤벨 프레스'같은 다른 가슴 운동을 하면 될 텐데.' 거울로 늠름해진 가슴을 바라보며 역시 가슴 운동은 벤치프레스라고 생각했다. 다른 가슴 운동을 좀 더 하려다가 피곤해서 샤워장으로 향했다. 내일은 화요일이니 데드리프트를 하는 날이다. 가슴보다는 확실히 더 힘들고 고된 운동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어찌 됐든 월요일에는 세상 모든 무게를 짊어진 듯 심각한 얼굴로 벤치에 누워보자. 당신의 가슴은 여전히 월요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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