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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12. 2023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몇 달 전에 바디프로필을 찍은 후배에게 왜 그토록 운동을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다. 녀석은 지체 없이 예쁜 여자친구를 만나려고 헬스를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실로 솔직하고 현실적인 목표였다. 예쁜 몸매가 예쁜 애인을 사귀는 무기로 쓰일 거라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사회에서 말하는 이른바 결혼 적령기를 통과하는 청년다운 포부였다.


 어제 후배와 오랜만에 통화를 하는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형 저 여자친구 생겼어요.' '바디프로필 찍은 보람이 있네. 안 하던 운동 하느라 고생했다.' 내 생각과 달리 후배는 헬스를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몸만들기에 푹 빠져있었다. '아니 그토록 예쁜 애인을 만나고도 왜 운동을 계속하는 거야?' 후배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얘기해다. '그러다가 다시 살찌면 어떡해요. 예쁜 애인 지키려면 관리해야죠.' 후배가 헬스를 그만두고 알콩달콩 연애에 몰두했다면, 그래서 만들었던 근육이 다 쪼그라들었다면 후배의 애인은 이제 후배가 매력적이지 않다며 떠났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후배가 영원히 운동할 팔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을 하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고, 사랑에 실패하면 다시 사랑하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후배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내가 헬스장을 빼놓지 않고 다니는 게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자문한다. 강박에는 뭔가 들러붙은 게 있기 마련이라 하루라도 헬스장을 못 가면 초조하고 옷에 김칫국물이라도 튄 것처럼 찝찝하다. 나도 후배처럼 성적 매력을 바탕으로 하는 연애의 장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는 걸까. 뭘 하든 늘씬한 몸매를 선호하는 우리 사회에서 운동은 자기 계발의 방편이다. 요즘에는 어딜 가든 외모를 본다. 어디 가서 얼평, 외모평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지만, 그만큼 사회가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고 있다는 신호다. 말 그대로 보기 좋은 몸은 어디서든 호감을 사니까. 누가 왜 운동하냐고 물어보면,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 어쩌고 하면서 허영에 뜬 말을 했지만, 어딜 가든 유리한 위치에 서고 싶어서 헬스장을 다닌다는 걸 말하진 못했다.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면서 헬스는 더 나은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취지로 떠벌였지만, 그 말을 하는 나도 내 말을 믿지 못했다. 내가 추구하는 더 나은 상태가 순수한 운동의 희열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해서 일해왔다. 직장을 구하자마자 집을 나왔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잘리기 싫어서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다행히 정규직이 되면서 이렇게 살고 있다. 처음 정규직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뻤다. 내 앞에 로열로드가 깔린 기분이었다. 나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다 이뤘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독립한 사회인'이었다. 좋은 회사에 다니면서 성격 좋고 바르게 사는 삶. 별 탈 없이 살다가 가끔 일이 힘들 때면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걸치며 신세 한탄하고, 그러다가 주말이 오면 가까운 교외로 나가서 김밥을 씹는 삶. 신작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고 알라딘중고서점 VIP로 사는 삶. 너무 잘 살려고 버둥거리지 않아도 적당히 만족하면서 사는 삶. 비록 월세라도 내 집을 마련하고 아쉽더라도 내가 번 돈으로 나 하나쯤 부양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은 삶. 한 사람의 로망이라기엔 소박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요즘 방세와 물가를 보면 내가 1인분을 해냈다는 게 새삼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꿈에 다가서자, 덜컥 겁이 났다. 겨우 이건가?


 영화 <보이후드>를 보면 혼자 산전수전 다 겪어가면서 억척스럽게 아들을 키워 대학까지 보낸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좋은 날에 어머니는 짐을 싸서 독립하려는 아들을 앞에 두고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라고 되뇐다.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하다 보면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꿈을 이룬 다음 날 아침에도 눈을 뜨면 일상은 미동도 없이 엄연했다. 나는 늘 하던 것처럼 커피를 들고 노트북 앞에 앉아야 했다. 꿈을 다 이뤘는데, 이제 뭘 할 것인가. 꿈을 이루며 상상만 하던 삶을 성취하자 또 다른 꿈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적금 만기가 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만기 날이 오자마자 더 큰 금액으로 만기를 연기하는 꼴이었다.


 윤고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누나 선이는 매일 맞고 귀가하는 동생 윤을 보고 속이 상해서 타이른다. 같이 놀지 말고, 너도 맞서서 때려야지. 그러자 동생 윤이 이렇게 말한다. 계속 때리기만 해? 그럼, 언제 놀아? 친구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친구가 또 때리고…. 난 그냥 놀고 싶은데…. 본질을 지적하는 동생의 무구한 질문에 선이는 생각에 잠긴다. 흔히 헬스할 때 후배처럼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운동을 시작한다. 바디프로필, 체중감량, 거대한 등판, 건강 회복, 애인 만들기, 열등감 극복 등등. 하지만 목표는 힘을 나게 하다가도, 목표를 이루고 나면 힘이 빠지게 마련이다. 목표에 붙들려서 운동하면 상태만 있고 과정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급하게 먹으며 허기를 지우면 맛을 음미할 수 없다.


 후배는 여자친구를 사랑하기 위해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난 아무런 목적 없이 운동한다. 별생각 없이 쇳덩이를 든다. 목표지향적인 삶은 쉽게 지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헬스만큼은 목적 없는 행위로 남겨두고 싶다. 운동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 체력을 키워서 성공적으로 투잡을 뛰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앞에 뭔가 더 있을까 하는 기대도 없다. 오직 눈앞의 한 번의 동작이 있다. 내 몸무게를 훌쩍 넘는 쇳덩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는 게 하나다. 숨을 돌리며 다음 세트를 준비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 둘이다. 나는 이런 허망한 움직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무용한 되풀이에 완전히 매료됐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은 문학의 쓸모는 그 쓸모를 거부할 때 얻어지는 자유와 해방감에 있다고 얘기했다. 운동도 마찬가지로 그 쓸모없음이 목적의 세계에서 날 해방했다. 쓸모없는 것을 하며 비로소 품위 있는 삶을 상상할 수 있었다. 헬스는 쓸모가 없어서 아름답다. 이른바 쓸모없음의 쓸모다. 쓸모없는 헬스 앞에 '왜'라는 물음표는 어울리지 않는다. 정갈한 쉼표를 찍고 한숨 돌리다가 여지없이 마침표를 찍고 다시 준비 자세를 취해 보인다.


 헬스에는 지나가 버린 내 청춘이 담겨 있다. 이별의 아픔과 만남의 환희가 곳곳에 아로새겨진 연애소설이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힙합이면서 회한에 젖어 한숨이 절로 나오는 발라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성장드라마이고, 동시에 온몸이 끓어오르는 관능의 순간이다. 그렇게 헬스의 진리는 그 쏘는 듯한 광휘와 그 찌는 듯한 작열에 있었다. 다시 말해 내가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 그 자체였다. 앞으로도 속절없이 지나가 버린 과거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1분 1초의 싸움을 지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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