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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01. 2023

테니스의 기쁨과 슬픔

입사 첫 해, 내 사수는 회사 생활에 빨리 적응하려면 골프를 치든 그게 아니면 적어도 테니스 정도는 칠 줄 알아야 한다고 일렀다. “회의 때는 나오지도 않던 얘기가 공치다가 다 나온다니까. 친목으로 업무 할 거면 회의는 따로 해서 뭐 하나 몰라.” 그는 업무 성과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며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얘기했다. 내가 흘려듣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재차 일갈했다. “일솜씨는 개차반인데 테니스 하나 잘 쳐서 진급한 정 차장 봤지? 늦게 시작하면 내 꼴 나. 죽어라 고생하면 뭐 해. 할 줄 아는 운동도 없다고 이젠 회식 때 부르지도 않는데. 운동은 한 살이라도 일찍 시작하는 게 좋아.” 선배의 조언을 암묵적인 지시로 받아들인 난 “그럼 골프가 나아요. 테니스가 나아요”라고 물었다. 그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말투로 대답했다. “골프는 비싸고 배우기도 어려워. 테니스가 요즘 핫하지.” 난 그날 바로 선배가 다닌다는 테니스 레슨에 등록했다.


처음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간 날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처럼 무뚝뚝한 말투를 지닌 코치는 운동 신경을 좀 보겠다면서 다짜고짜 자기 라켓을 나에게 쥐여줬다. 그러고는 무심하게 연두색 공을 내 몸 쪽으로 던졌다. 난 전날 윔블던 호주 오픈 개막전에서 본 로저 페더러의 우아한 포핸드 자세를 떠올리며 라켓으로 공을 때렸다. 공은 나로호처럼 저 우주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자세는 괜찮은데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갔네요. 라켓은 새를 잡듯 살짝 쥐고 허공으로 날려 보내듯이 놓아줍시다.” 난 코치의 말에 따라 몸에 힘을 빼고 라켓을 공에 놓아줬다. 그러자 공은 허공에 높이 솟아올랐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코치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나이스샷” 나는 처음 두 발자전거 페달을 밟고 나아갈 때처럼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물론 배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헬스장에서 몸에 힘을 잔뜩 주다가 레슨을 받으러 가면 무식하게 힘으로 하려 든다고 혼이 났다. 어떤 날은 신들린 것처럼 공일 잘 맞다가, 어떤 날은 얼간이처럼 그간의 배움이 무색해졌다. 내가 엉뚱한 곳으로 쳐낸 공들은 다 내가 주워 담아야 하는 노동으로 되돌아왔다. 밀레의 이삭줍기를 연상케 하는 자세로 이리저리 흩어진 공을 바구니에 담고 있으면 내가 돈 내고 왜 이런 고생을 하나 싶기도 했다. 헬스장에서도 바닥에 널브러진 원판을 정리하는 게 가장 귀찮은데, 테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밤늦기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두색 공과 씨름하면서 차차 실력이 늘어갔다. 포핸드에서 백핸드 그리고 서브(포핸드 : 팔을 뻗어 공을 치는 타구법, 백핸드 : 손등을 공 쪽으로 향한 채 치는 타구법, 서브 : 공격 때 상대편 코트에 공을 쳐서 넣는 일)까지 터득하자 드디어 테린이들과 연습 시합도 뛸 수 있었다.


시합을 뛰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이제 어느 코트를 가든 사람들과 시합할 수 있고, 경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맥주 한잔할 친구가 생긴다. 땀에 젖은 친구들과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켜면 생의 기쁨이 밀려온다. 그러니 난 이삭줍기하다가 테니스를 포기하는 테니스 초보자에게 타이른다. 힘들더라도 딱 3개월만 버티라고. 눈 딱 감고 이삭을 줍다 보면 언젠가 추수철이 오기 마련이라고. 그때가 되면 우리 같이 시원한 생맥주 한잔하자고.


테니스는 쉴 새 없이 격렬한 동작을 취하는 운동이라서 살도 잘 빠진다. 너무 힘들어서 밥맛이 뚝 떨어지는 건 덤이다. 밥만 먹고 헬스만 해서 근육 돼지에 가까웠던 내 몸매도 몰라보게 날렵해졌다. 게다가 테니스 경기장은 아파트 단지마다 있어서 어디서든 즐기기에 좋았다. 무엇보다 테니스복을 입은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당시 내게 테니스 하면 젊은 스타트업 CEO가 즐겨할 법한 이미지였기에 난 어딜 가든 테니스 채를 들고 다녔다. 스타벅스에서 윌슨 라켓에 나이키 밴드를 하고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오면 타임지에 실릴만한 영앤리치라도 된 기분이었다.


테니스의 최대 매력은 소리다. 공이 내 앞에 떨어지면 강력한 타격과 함께 라켓에서 ‘피용’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와인병 코르크 마개가 떨어져 나갈 때처럼 경쾌한 소리였다. 그렇게 타격을 주고받으면 땀이 뻘뻘 나고, 공이 피용 소리와 함께 코트에 내리꽂힐 때마다 스트레스가 풀렸다. 하지만 이런 테니스의 즐거움도 오래 가질 않았다. 지난한 6개월의 레슨으로 모든 기술을 연마하여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회사에 내가 테니스 고수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것도 로저 페더러처럼 한 손 백핸드를 기가 막히게 구사하는 ‘박 페더러’라는 별명과 함께.


 그때부터 퇴근 시간만 되면 사내 메신저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박 페더러, 퇴근하고 뭐해. 본관 앞 테니스장에서 시합 한판만 하고 가지.’ 회사에서 상사와 테니스를 치면서 타격의 즐거움은 잊혔다. 테니스의 최대 매력인 강력한 타격은 엄두도 못 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수비만 해대니 피용은커녕 맥없이 피슉하는 한숨만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난 누구의 공이든 잘 받아내는 접대 테니스 선수로 전락했다. 난 페더러처럼 온화한 미소와 매너로 상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페더러처럼 우아하게 승리할 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접대 테니스에도 관록이 생기니 난 능숙한 배우가 다 됐다. 아슬아슬한 랠리 끝에 안타깝게 패배하는 시나리오를 썼고, 마음에도 없는 너스레와 추임새로 호아킨 피닉스 뺨치는 메소드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었다. 봐주지 말라는 상사의 말에도 흔들림 없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나 빼고 모든 사람이 즐거운 해피엔딩을 맞았다.

어제도 옆 사무실 김 부장과 그의 수족 박 과장을 모시고 퇴근 후에 테니스를 쳤다. 경기는 라켓 줄이 뜨거워질 정도로 쉽지 않은 랠리였지만, 난 기어이 자연스럽게 졌다. 네트 위로 넘어오는 연두색 테니스공에 힘은 덜고 예우와 존경을 담아 사뿐히 받아넘겼다. 그들이 아무리 풀 스윙으로 라켓을 휘갈겨도 난 공을 샌드백처럼 맞아줬다. '오늘 컨디션 너무 좋으신데요? 따라갈 수가 없네요.' 직장생활 10년 차쯤 되니 어설픈 척, 못 치는 척, 안 배운 척도 수준급이다. 신이 났는지 두꺼운 헤드밴드를 맨 김 부장은 마치 자기가 로저 페더러의 영원한 숙적 라페엘 나달이라도 된 듯 강력한 서브를 날렸다. 성질 같아선 그의 미간에 내 강력한 백핸드를 먹이고 싶었지만 내 근육은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앞에선 파우더일 뿐이었다.


고단하고 지루한 경기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끝이 그들에게는 본격적인 시작이었는지 김 부장은 약속이나 한 듯 '메기매운탕에 소주 한잔'이라는 구호를 덧붙였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지금 어머니가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하나뿐인 막내아들이 오길 코가 빠지라 기다리고 계신다는 어림도 없는 핑계를 댔다. 난 율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양한 제스처로 공세적인 참석 제의를 애써 뿌리쳤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인사하고 코트를 빠져나가는데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야, 쟨 술 안 마셔. 우리 같은 노땅이랑 금요일 밤에 놀겠냐.' ‘그렇게 잘 알면 금요일 밤에 테니스 코트로 부르는 짓도 하지 말았어야지. 다 놀아줬더니 뭐라고? 당신들 때문에 오늘 어깨랑 복근하는 날인데 헬스장도 못 갔잖아!' 나는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차에 올라탔다. 


테니스 때문에 귀중한 저녁 시간에 꼰대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지만, 테니스 덕에 회사에서 입지를 굳힌 것도 사실이다. 접대 테니스를 치고 나면 깐깐하기로 소문난 김 부장의 결재도 프리패스였고, 얄미울 정도로 자기 몫을 챙겨가기로 악명이 자자한 박 과장이 내게 성과를 밀어주기도 했다. 덕분에 내 이른 승진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 테니스를 배우기 전까지는 헬스밖에 모르는 바보였지만, 요즘에는 동료들과 시내에 있는 스크린 테니스장에도 가고, 주말에는 직장인 테니스동호회에 가입해서 시합을 즐기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멋들어진 테니스복을 사서 인스타그램과 카톡 프로필 사진을 교체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가의 테니스 장비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나처럼 용기 내 테니스장을 찾아보는게 어떨까. 어디선가 경쾌한 피용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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