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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ug 18. 2023

운동할 때 꺼내먹어요

 난 헬스는 고독한 운동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게 얘기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나이키 운동복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고독하게 운동하는 이미지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난 헬스장에 들어서자마자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차가운 도시 남자와 같은 모습에 심취한다. “너희들은 결코 넘볼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 있어.” 이렇다 보니 난 어딜 가든 ‘취미는 혼자 하는 헬스요, 특기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며 떠벌리고 다녔다.


나는 헬스장에서 나만의 고독을 방해하는 수다쟁이들이 늘 못마땅했다. 특히 헬스장을 데이트 장소로 여기는 커플이 가장 성가시다. ‘잠시간의 고독도 견디지 못하는 저 아둔한 치들을 봤나.’ 난 알콩달콩한 커플을 호크아이로 노려보며 이 신성한 공간에서 어서 나가주기를 바랐다. ‘여긴 너희들과 어울리지 않아.’ 난 보란 듯이 20킬로짜리 바벨을 하나 더 끼우곤 거친 기합 소리를 내며 그들의 기를 죽였다. 


 그랬던 내가 몇 달 전부터 여자친구 보림이와 헬스장에 다니고 있다. 다이어트한답시고 무작정 굶기만 하는 식습관을 가진 보림이는 언제나 잔병치레가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타고난 몸치라 운동만 하면 다쳐대는 통에 헬스에는 통 재미를 붙이질 못했다. 난 누누이 얘기했다.

“그렇게 배를 곯으면서 살 빼면 그나마 있던 근육도 다 빠진다, 너.”

그런 내 말을 보림이는 건성으로 “엉, 엉.”하며 귓등으로 들었다.

난 한숨을 쉬며 재차 잔소리하곤 했다.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허기지면 몸이 전투태세로 들어가. 신경이 바짝 곤두서면 스트레스로 폭식하게 되고, 그럼 다시 요요가 오지. 악순환이야, 악순환. 운동을 해서 몸이 근육을 붙이고 식단으로 불필요한 지방을 걷어내야 건강하게 살을 빼지.”

“자꾸 뭐라는 거야. 굶는데 왜 살이 쪄.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운동까지 하래.”


 내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보림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난 보림이가 망가지는 꼴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난 운동 경력 15년 차 최초로 여자친구를 헬스장에 데리고 갔다. 나는 내가 몸소 운동하는 루틴을 보여주면 분명히 그녀의 굶기와 폭식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운동 첫날, 난 심호흡하고 보림이에게 헬스의 3대 운동 중 하나인 벤치프레스부터 가르치기로 했다. “헬스는 수직 저항 운동이야. 이렇게 팔도 몸도 지면과 수직이 된 상태로 저항력을 키우는 거지.” 난 내가 좌충우돌하며 배웠던 모든 노하우를 보림이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수할 작정이었다. 서서히 1단계부터 시작해서 10단계까지 하나씩 해가면 조금씩 헬스의 진가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놈의 1단계가 힘들었다.

보림이는 생전 운동이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지 몸 쓰는 방법 자체를 아예 몰랐다. 덤벨을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두르는 보림이의 모습은 마치 머리와 팔이 따로 노는 괴생물체처럼 보였다.

“나 좀 봐봐. 보림아, 내가 방금 얘기한 거잖아. 수직 저항이라고. 바닥을 중심으로 천천히 들어 올려. 아니, 아니, 천천히 하라고. 누가 휘두르래!” 결국 나도 모르게 험악한 표정으로 고질라처럼 괴성을 질러버렸다.


'아뿔싸.'
 언성이 올라가면서 고독한 헬스장은 바로 살벌한 쌈판이 됐다. 신경이 곤두선 보림이는 붉어진 얼굴로 5킬로짜리 덤벨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아니,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몸이 안 따라주는데 어떡해.”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넋을 놓아버렸다. 아니,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러는 건데.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쏘아붙이는 녀석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헬스장에서도 남자친구 노릇 하라는 거야?” “그럼 내가 남친이랑 헬스장에 왔지. 네가 무슨 트레이너야? 이럴 거면 내가 그냥 돈 내고 피티를 끊지.” 나도 더는 참지 못하고 항변했다. "그러면 여기가 데이트 장소냐? 피티 받으려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게 고마운 줄도 모르고." 여기서까지 그렇게 징징댈 거면 차라리 그냥 나가자는 말이 식도 근처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무리 봐도 보림이는 이 고독한 이들의 안식처가 데이트 장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우린 첫날부터 서로 등을 돌린 채 남처럼 헬스장을 나왔다. 이렇게 싸우고 나니 보림이를 다시 헬스장에 데려가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다시 보림이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가 이틀도 못 참고 폭식으로 망가지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난 전략을 바꿔서 다정한 남자친구를 연기하기로 했다. “그래, 쉽지 않지. 종일 일하고 피곤한데 또 쇠까지 드는 노동을 하라니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근데 날 봐봐. 내가 얼마나 즐겁게 헬스하는지. 헬스로 얼마나 위로받고 사는지. 헬스장에 하루만 더 가보자. 분명히 어제보다 더 나아질 거야.” 난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희망찬 말을 줄줄 읊으며 보림이를 다시 헬스장에 데려가기 위해 어르고 달랬다.


지난날을 교훈 삼아, 나는 헬스장에서 다시는 잔소리하지 않았다. 자세를 조금 잡아주고는 아무런 바람도 없고 그저 흐뭇한 아빠 미소를 연신 지어 보였다. “이제 쉬고 싶지. 조금만 참자. 운동 끝나면 초밥 먹으러 갈 수 있어. 딱 한 시간뿐이야.” 보림이가 지칠 대로 지쳤을 때는 더 독려하기보다는 우선 당근부터 먹였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집에 갈 수 있어. 샤워하고 쉬면 딱 좋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해보자.” 초밥을 미끼로 던지자, 1킬로그램짜리 핑크 덤벨도 못 들던 보림이가 갑자기 5킬로그램 덤벨을 번쩍 들었다. “역시 참 단순해.”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는 보림이를 헬스의 제1 단계로 진입시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헬스장에 온 보림이를 지구에 처음 발을 디딘 이티 다루듯 했다. 아무리 말을 못 알아들어도 손짓, 발짓까지 하며 이해시켰다. “많이 힘들지? 지금 너무 잘하고 있어.” 가끔가다 이런 자기 암시가 흐트러져서 본심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거 하고 웃음이 나와? 마음만큼은 ‘내가 선수다’ 하면서 해야지.” 난 내 입을 틀어막고 내 뺨을 손바닥으로 스스로 갈기며 뱉은 말을 주워 담았다. “아니야! 이 정도 하는 것도 대단한 거야. 지금 헬스장 몇 번이나 왔다고 벌써 등 운동을 다 익혔네.” 이렇게 위기 대처 능력이 발달하면서 난 나름대로 헬스장에서 여자친구와 공존하는 법을 익혀갔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운동이 끝나도 긴장을 놓을 순 없었다. 나는 보림이의 형편없는 식사도 챙겨야 했다. 명을 재촉하는 밀가루 위주의 음식을 다 버리고 우선 냉동 닭가슴살부터 주문했다. 평소 닭가슴살은 입에도 대지 않던 그녀에게 내 화려한 닭가슴살 요리 컬렉션을 선보였다. 보림이는 눈을 반짝이며 닭가슴살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냐며 감탄을 연발했다. 샐러드, 닭가슴살 카레, 닭가슴살 파스타, 닭가슴살 닭곰탕까지 척척 만들었다. 생일날에는 질세라 닭가슴살 미역국으로 나의 프로틴한 진심을 전했다. 나 혼자였으면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3분이면 먹어 치울 닭가슴살을, 30분이나 들여서 정성스럽게 요리해서 먹였다.


 헬스인이라면 꼭 챙겨야 하는 필수 영양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불규칙한 생활방식 탓에 끼니를 거르기 쉬운 보림이를 위해 크레아틴, 간 보호제, 오메가3, 종합비타민, 단백질 가루, 프로바이오틱스까지 잔뜩 사서 넣어뒀다. 그렇게 난 헬스란 먹는 것까지 포함된 종목이라는 걸 이해시켰다. “냉장고에 단백질 음료랑 제로 사이다 사뒀어. 단 거 당기면 이거 꺼내 먹어.”


 운동부터 식사까지 제대로 해낸 날은 하루의 끝에 칭찬을 퍼부어 댔다. “장하다. 우리 보림이 이 정도 하는 게 쉬운 게 아닌데. 이제 점점 더 쉬워질 일만 남았다. 잘하고 있어. 내일도 잘해보자.” 오버해서 칭찬할수록 보림이는 내 이야길 잘 들어줬고 점점 더 함께 운동하기가 수월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헬스는 우리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일이 되었다. 보림이는 점점 나를 자신의 전담 트레이너로 보려고 노력했다. 헬스장에 들어갈 때마다 ‘레드선’하고 주문이라도 거는지 말투가 제법 진지해졌다. 난 점점 더 강도를 높여가는 보림이의 헬스에 동기를 부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자, 한 번만 더 해보자. 지금 너무 좋아. 마지막까지 자세 흐트러지지 말고.” 헬스라는 건 주말의 행복을 위한 저축과 같은 일이라는 걸 보림이에게 이해시켰다. “우리 주말에 파스타 먹고 행복했지. 오늘은 하체 운동으로 크림파스타 한 그릇 몸에서 다 빼고 나가자.” 그러다가 너무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으면 나도 내가 트레이너일 뿐 아니라 남친이라는 점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게 욕심을 부리지 마. 그냥 맨손으로 동작만 따라 하는 걸로도 충분해.”


 헬스에 길들면서 점점 변해가는 보림이를 지켜보는 건 내게 큰 즐거움이다. 이제 보림이는 헬스장을 들어설 때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몸이 날씬해지면서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고, 건강이 좋아지면서 얼굴색도 더 밝아졌다. 이제 보림이는 완벽한 스쿼트 자세를 취하기 위해 잠들기 전에 헬스 유튜브를 시청한다. 나 역시 보림이와 헬스의 또 다른 매력을 알아버렸다. 헬스는 고독한 매력도 있지만, 헬스를 통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헬스는 둘이 하면 다정해질 수도 있다는 것. 난 든든한 헬스장 짝꿍이 된 보림이에게서 낯선 운동의 맛을 음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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