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좋으시네요.” 거래처 직원은 한창 회의를 하다 말고 격앙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내게 불쑥 칭찬을 건넸다. 난 당황스러워서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왜 그런지 머리 좋다는 말도, 인상이 좋다는 말에도 시큰둥한데 몸 좋다는 말에는 약해지는 사람이다. 단순한 칭찬 정도가 아니라 들을 때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녹는점이다. 난 몸 칭찬에 약한 게 아니라 몸 칭찬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솔직히 말하면 글이 좋다는 말이 더 좋긴 한데, 그건 잘 들어본 적이 없어서다.
거래처 직원의 기습으로 회의 분위기는 한껏 누그러졌다. 내가 하도 꽉 끼는 셔츠를 입고 다니는 통에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영락없이 기뻤다. 난 옷 입을 때마다 도드라지는 내 대흉근이 맘에 든다.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너무 고맙다. 난 슬며시 가슴에 힘을 주며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나는 태생부터 도시인이라 칭찬은 칭찬으로 되받아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좋긴요. 아직 한참 멀었어요. 그건 그렇고 김 대리님 팔뚝 봐. 저보다 더 좋으신 것 같은데요. 평소 운동 좀 하시죠?"
꽤 첨예했던 회의는 오고 가는 칭찬으로 한 발자국씩 양보하는 평화협정 자리로 변했다.
내가 몸 좋다는 말에 흥분해서 호들갑을 떠니 날 흐뭇하게 지켜보던 거래처 직원은 되물었다.
“근데 대체 왜 그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세요? 어디 대회라도 나가시게요?”
또 한 방 더 먹었다. 건강, 미용, 안티에이징, 자기계발까지 운동하는 이유가 얼마나 다양한데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모르나. 그러니까 내가 운동을 지나치게 한다 이거지. 내 툭 튀어나온 대흉근이 보기 흉하다 이거지. 난 심기가 불편해져서 한껏 앞으로 기울어졌던 몸을 다시 의자 뒤로 당겼다. 난 어떻게 대답해야 그럴법한지 잠시 고민하다가 김연아 선수를 떠올렸다. 김연아 선수는 세계선수권 시합 전에 몸을 풀다가 무슨 생각을 하냐는 기자의 하나마나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더랬지.
“그냥 하는 거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좋았어. 꽤 있어 보이는 대답이야. 나이키도 ‘저스트 두 잇’ 이니까. 근데 정말 난 운동을 그냥 하고 있는 걸까?
사실 나도 헷갈릴 때가 많다. 내가 대흉근을 돋보이게 하려고 운동을 하는 건지, 안티에이징이라는 시대의 화두에 발맞춰 나가는 건지. 도대체 왜 난 귀찮음과 통증을 무릅쓰고 헬스장에 가는 걸까. 대체 무슨 이유로 헬스의 3대 운동에 집착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 올리려고 애쓰는 걸까. 김연아 선수야 그게 일이니까 그냥 하겠다는 거지만, 나는 일도 아닌데. 내게 운동은 취미일 뿐인데. 취미라는 건 즐기는 일일 텐데. 그렇다고 내가 운동을 즐기고는 있나. 운동이 즐겁다면 왜 헬스장 가기 전에 오늘은 운동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 가지 이유를 떠올리는 걸까. 그렇게 운동을 좋아한다면 왜 헬스장 휴관일에 그토록 신이 나는 걸까. "아싸 술 먹어야지." 아마도 운동이 직업이었다면 이 정도로 하진 못했을 거다. 난 22살의 나이에 올림픽 메달을 두 개나 따고, 은퇴 후 다시는 빙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던 피겨의 전설이 아니니까. 난 고작 퇴근하고 취미로 몸을 만드는 생활체육인에 불과하니 말이 길어지는 거다. 이러니 16년간 운동을 하고도 내 안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해 운동에세이 책을 두 권이나 쓰고 있는 거겠지.
운동은 단순히 취미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즐겁지 않다. 헬스는 반복과 통증의 싸움이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매일 헬스장에 가야 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어떻게든 근육에 상처를 내야만 한다. 하지만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정해진 운동을 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계속하는 맛을 알았다. 난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패턴 속에 은거하면서 고통을 이겨내는 법을 익혔다. 입과 꼬리가 물고 물리는 우로보로스 형상처럼 원형의 세계에 틈입해서 삶이 혼돈으로만 가득 찬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게 헬스는 무한한 순환, 원초적 통일성과 원형의 '완전함'이다. 난 헬스장에 들어설 때마다 안식한다. 늘 만지던 기구는 사시사철 그대로이고, 매일 비슷한 동작을 하다가 샤워를 하면 내가 아주 잘 아는 쾌감에 도취한다. 그래서인지 난 삶이 날 속일 때마다 퀴퀴한 고무 냄새가 나는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 나는 가장 섹시해'라는 걸개를 보며 히죽거린다. 아마도 거래처 직원의 몸 좋다는 칭찬은 내가 만든 완전한 세계를 알아봐 준 데 대한 반가움이었을 것이다.
난 작년에 직장 상사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회사 중역과 사이가 멀어지자, 그간 내가 회사에서 이뤄낸 성취가 파도에 쓸린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갈등이 지속되면서 출근이 지옥 같아졌고, 퇴근할 때까지 누구와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회사에서 눈엣가시가 되어 퇴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 그때 날 구해준 게 패턴이 새겨진 동아줄이었다. 난 철봉과 바벨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겨우 나를 구해냈다. 운동은 내게 질서와 조화를 지닌 코스모스의 세계와 같았다. 헬스장이라는 우주, 근력이라는 은하계였다. 그래서 헬스장은 내게 언제 어디서든 변치 않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공간이다. 세상이 날 모멸할 때도 바벨의 두툼하고 단단한 표면을 어루만지면서 안심할 수 있었다. 원형의 바벨은 일직선의 성취에 지친 나를 모나지 않게 구부렸다.
하루에 한 번 옷을 갈아입고, 단백질 음료 통을 챙기고, 오늘 할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운동할 때 들을 플레이리스트를 선곡한다. 닭가슴살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샤워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생각한다. '아, 내일도 이렇게 살겠구나.' 삶은 그렇게 속절없이 되풀이된다. 흔히 행복을 연상할 때 시끌벅적한 파티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나는 내가 돌아갈 비스름한 세계에 감탄하는 쪽이다. 극적인 사건 하나 없는 하루는 당연하게도 쾌락과 거리가 멀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서 미세한 차이를 감지해 낼 수 있을 때 삶은 잠시나마 미소를 허락한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이야말로 번민하고 회의할 수밖에 없는 삶을 내가 어렵사리 버텨나가는 비결이다. 배에 힘을 주고 무릎을 굽히며 팔을 뻗어 올릴 때 무의미한 일상은 다시 기지개를 켠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A Small, Good Thing'에서 갑작스럽게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부모에게 제빵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운동은 사실 별거 아니다. 운동한다고 무병장수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한다고 꼭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운동은 제빵사가 쥐여 준 롤빵처럼 잠시나마 기운을 낼 수 있게 도와준다. 모든 게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내 손으로 만든 단단한 가슴과 잔뜩 화난 팔뚝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른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헬스는 중력에 저항하는 일이다. 나를 끌어당기는 중력에 저항해서 몸을 일으키고 쇳덩이를 들어내면서 살아가는 일이다.
운동을 계속하다 보니 반복이 가져다주는 평화는 오직 헬스장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일상 곳곳에는 알게 모르게 의지할 수 있는 패턴이 새겨져 있었다. 늘 가던 카페, 바뀌지 않는 커피 맛, 사무실 책상에서 나는 냄새, 늘 한쪽만 긴 운동화 끈. 전부 고요한 일상을 정돈해 주는 익숙한 패턴이다. <운동, 스트로베리 그 맛>은 운동이라는 듬직한 친구를 당신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썼다. 운동이라는 패턴의 세계를 상세하게 그려내면서 내가 사는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 결코 시시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내 요령부득한 필력을 통해 운동이 가진 질서와 조화를 조금이나마 끄집어낼 수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누가 보면 마치 운동을 향해 바치는 경탄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문장을 '찰스 다윈'의 혁명적 저서 <종의 기원>의 마지막 문장을 옮기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 혹성(惑星)이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하는 동안에 그토록 단순한 발단에서 극히 아름답고 이와 같이 가장 경탄할 만한 무한의 형태가 생겨나고 또한 진화되고 있다는 이 견해 속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