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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20. 2016

서간문학書簡文學의 존재감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 그리고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서간문학(epistolary literature , 書簡文學)의 매력
내게 서간문학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베르테르의 심경을 담은 편지만이 기억될 정도로 비중이 없던 장르였다하지만 최근 연달아 서간체 소설을 읽게 되면서 이 장르만이 가진 매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요즘에야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실시간 SNS 소통이 가능한 시대지만내가 초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남녀 간 애정문제에서만큼은 그 특유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아날로그와 일상적 디지털 시대의 중간에 끼인 나로선 아직 편지의 그 물성을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내가 중학교 시절엔 일종의 유사 편지인 교환일기가 유행했다.(여고괴담2를 본 사람이라면 그 당시 학생들이 교환일기를 대하는 자세를 이해할 것이다.) 오늘 하루 쓰고특정 시간의 장소에 가져다 놓으면 상대가 가져가서 답을 쓰는 시시해 빠진 놀이다옆자리에서 옆 반 여자애와 교환일기를 쓰던 녀석을 흘겨보며 난 그들의 유치함을 성토하곤 했다그리고 아마도 중여름쯤이었던가 생에 처음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교환일기를 강요해 와 몰래 구석진 자리에서 빠르게 일기를 완성하던 기억이 있다일사 후퇴 시절 얘기를 하잔 건 아니고 그런 적도 있었다는 말이다그것이 내게 편지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된다이후 편지는 관공서에서 보내오는 교통위반 딱지, 입영통지서 정도일 뿐이다느리고 답답한 것을 점점 더 혐오하는 이 도시에서 서간 소설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하지만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와 메리 앤 셰퍼의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은 현재 스테디셀러에 올라와 있다. 그 매력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책 표지가 인상적인 '금수'

금수(錦繡), 미야모토 테루 저
미야모토 테루의 전작 <환상의 빛>을 읽은 후 그의 작품을 몇 개 더 읽어봤지만 <금수>만 한 작품을 읽진 못 했다. 책 제목 금수는 단풍이나 꽃을 나타내는 말이다단풍과 꽃이 휘날리는 가을 가쓰누마 아키는 아들과 여행을 갔다가 낯선 고장의 케이블카 안에서 전 남편 아리마와 재회한다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두 사람바닥을 치지 못했기 때문일까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응어리진 마음을 품은 아키는 아리마에게 긴 편지를 보낸다두 사람의 관계는 의도치 않은 이별이었기에 할 말이 남았으며변할 것이 없음을 알기에 담담하게 기술된다.

환상의 빛, 금수의 미야모토 테루

과거의 사연들을 나열한 오래된 편지 형식의 이 소설은 서간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내밀한 개인의 사연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맛이 있다. 남의 속내를 몰래 훔쳐본 것처럼 짜릿하며, 십수 년의 미스터리 한 사건들이 개개인의 머릿속에 저장된 데이터들로 그 형상을 다시 축조해가는 것이 눈에 그려진다. 거대한 서사라는 것이 전통적인 3인칭 화자의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힘 있는 문체가 강점이다. 일반 소설이라면 구차해지는 구구절절한 일본인 특유의 예의 역시 편지이기에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도 단점을 형식으로 극복한 예라 하겠다. 그들의 곡진한 마음씨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질 때, 오래된 고문서를 다시금 복원해 기록하는 것과 같은 소명의식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남녀의 치정에 이혼에 불륜, 자살 사건은 진부한 것이 된지 오래다. 평온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사람들이 어째 편지 따위를 쓸 생각을 하겠는가. 아키는 남편의 불륜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아키는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부터 꺼내놓으며 변명한다. 안개로 싸인 사건을 걷어내듯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현재에 다다라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할 때에야 미련을 버린다. 이제는 추억으로 뭍어두는 것이 자연스럽고 이제는 아무것도 변할 것이 없음을 자각할 때 체념은 말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유쾌한 분위기로 날 웃겨주었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메리 앤 셰퍼, 애니 배로스 공저)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편지가 주 통신수단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한 섬마을 다룬 이 소설에서 편지는 그들의 일상 그 자체다. 소수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건지 섬에는 전쟁 중 독일군의 의심을 피해 만든 북클럽이 있었고, 소설 속 줄리엣은 그들의 사연을 알기 위해 건지 섬으로 들어가며 책이 시작된다. 이야기가 싹을 피우기 힘든 공간에서 더욱 간절하게 이야기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그 시절의 참상과 애틋한 사연들을 동시에 늘어놓으며 어둠과 밝음을 쉴 세 없이 오간다. 말 그대로 어둠과 사랑의 이야기이다.

어느 서간소설이든 왜 이 작품이 서간체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그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형식적 낭비가 이루어지는 셈이니까그럼 점에서 건지 섬은 편지밖에 통신수단이 없다는 설정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편지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금수>처럼 편지라는 선택을 통해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두 사람의 사연을 쫓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소설인 셈이다그래서인지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목적의 편지들이 수시로 출몰하게 되는데 그 사이사이 이어진 시간의 공란들을 편지의 기술들로 이어붙이는 재미가 쏠쏠하다다양한 형식과 캐릭터에 따른 다채로운 문체가 등장한다작가는 한 사람이지만,소설 속 심상들은 여럿이어서 마치 인터뷰 연작을 읽는 재미를 준다.
서간문학은 낭독의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쓰인 글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절절하게 풋낸 말을 건다. 응답이 없을까봐 조바심 내기도 하며, 마음을 숨김 체 펜에 힘을 주기도 한다. 어느 순간 침묵이 찾아오다라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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