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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5. 2017

애틋한 두 여성의 탈주

핑거 스미스, Fingersmith, 세라 워터스 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 방대한 양, 그에 못지않은 폭넓은 전개에 압도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라는 경구로 첫 소절을 시작하는 <안나 카레니나>의 위압감은 어떠한가. 수평의 대지를 달리는 기차와 객실 안 안나 머릿속을 채우는 수직적인 격정이 서사의 야심을 보여준다. 이건 일종의 보호막처럼 뜨내기 독자들을 걸러내기도 한다. 읽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이 작품을 읽더라도 네 삶은 변하지 않을 텐데 이 두꺼운 책을 통과할 생각이야? 그걸 감수한 자만이 문학 안에 착상할 수 있다.

작가  세라 워터스

'세라 워터스'는 양과 폭으로 독자들을 위협하는 작가다. 그녀의 소설을 처음 접하시는 분은 책방에서 그녀의 책을 짚었다고 다시 놓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우선 두꺼운 데다 판형이 딱딱한 하드커버다. 거기에 줄 간격과 여백은 또 왜 이리 빽빽한지 톨스토이 소설을 펼쳤을 때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우선 박찬욱 감독님께 감사 인사를 해야지. 사실 난 이 영화가 <아가씨>로 영화화되기 전에 읽었다. 박찬욱 감독님이 명사의 추천이라는 한 코너에서 소설책을 추천해주시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세심한 남자가 선택한 소설은 어떤 작품일까 문고를 바로 찾아가 구입했다. 다시금 영화로 제작된 <핑거 스미스>를 통해 세라 워터스가 한국에서 주목받고, 그의 작품 4편이 출간되는 경사가 생겼기에 이렇게 펜을 들었다. 역시 세라 워터스 하면 <핑거 스미스>를 비롯한 빅토리아 동성애 소설 3부작으로 <벨벳 애무하기>, <끌림>이 유명하다. 빅토리아 시대라는 엄숙한 검열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 66년생의 다소 젊은 여성 소설가가 동성애라는 시대적 금기를 매끄럽게 녹여냈으니 화제가 된 것은 어쩐지 당연하다. 그녀가 레즈비언과 게이 소설로 학위를 받고, 그에 대한 서적과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라 워터스는 영국 출신으로 1966년 영국 웨일스의 펨브로크셔 출생이다. 저작들이 대부분 레즈비언을 다루고 있는데, 열린 책들의 훌륭한 번역과 네이밍으로 원작의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들은 거의 추리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약간의 호러까지 섞여 있다. 비슷한 예로는 <다섯째 아이>, <황금 노트북>의 도리스 레싱이 있는데, 세라 워터스가 그녀보다는 다소 밝고 톡톡 튀는 이야기풍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면 감이 오실라나?

소설 <핑거 스미스>, 세라 워터스 저

<핑거 스미스>는 그녀가 1998년 집필한 작품으로 책을 처음 펴는 순간 아득하게 만들어버리는 역사소설 특유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난 목을 한번 움츠리고는 이 세계 안에 발을 딛는다. 그리고 2주 동안 <핑거 스미스>와 살았다. 빠른 전개와 각가지 에피소드가 숨 쉴 틈도 없이 날 압박하고, 위기와 반전이 빼곡하게 출몰하여 날 궁지로 몬다. 지루함을 느낄만하면 등장하는 정사신은 아찔하다. 내 예상보다 더 야했고, 걱정보다 더 젊은 소설이었다. 이야기에 헉헉대다 보면 주인공 두 소녀 역시 심신이 지쳐있어 어깨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 난 이 책이 문학사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라 감히 예견해본다.

<핑거 스미스>는 영어로 소매치기라는 뜻으로,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어 소매치기들 사이에서 살아온 '수'와 상류층 숙녀이지만 어딘가 어두운 구석이 있는 '모드'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인 소녀 '모드'는 어린 시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엄마에게 버려지고, 폭력적인 삼촌의 손에 키워진다. 강요와 학대, 지조와 순결을 강조하는 엄숙한 삼촌의 집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19세기 음란소설을 지속적으로 낭독하는 것이다. 이 곳에 젠틀맨과 '수'라는 하녀가 찾아오면서 사건은 속고 속이는 배신의 장이 된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반전과 섹스, 처형, 탈주 등 다채로운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삼촌이란 작자가 결혼도 안 하고 오로지 음란소설만 모아대는 미치광이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모드는 코르셋, 벨벳, 장갑 등 온몸을 감싸고 의식을 치르듯 음란소설을 읽고 또 읽는다. 맞고 때리는 것만이 학대가 아니듯 음란 소설을 늙은 남자들 앞에서 읽게 함으로써, 그들의 시선에 의한 폭력 앞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게 하는 정신적 학대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모드라는 소녀가 유독 애틋하게 그려진 데는 세라 워터스의 역할과 일치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모드는 자신 운명을 알게 된 이후(스포일러다), 음란 소설을 전문으로 집필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고, 세상을 알면 알수록 그 속된 세상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이 장면은 기습적이다. 마치 죽은(죽여버린) 삼촌의 계승자가 되어 저택을 지키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보이니까. 이것은 영화와 가장 배치되는 장면으로 평생 동성애 소설 전문가라는 꼬리표를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세라 워터스의 결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퀴어 소설의 계승자이자 소수의 사랑을 보편적으로 풀어내려는 그녀의 의지가 엉뚱한 지점에서 감동으로 다가온달까. 모드와 수는 자신에게 지워진 시선의 무게를 기꺼이 받아 들고 세상을 향해 걸어간다.

영화 아가씨

빅토리아 시대의 풍경, 영국식 대저택과 가장 화려한 정원, 분수대, 호수에서 그린 풍경화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려지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에 기시감을 느꼈다. 세라 워터스의 문장이 주는 최대 장점은 길이는 개의치 않고 소녀들이 걷는 주위의 공기와 냄새, 제스처까지 묘사하는 디테일의 힘이다. '대단하다'라고 말해버리면 될 것을 풀고 풀어서 완전히 독자에게 안긴다. 혼돈의 시대의 런던 뒷골목과 자중지란의 내홍이 인물의 행동과 감정보다 더 중요해 보이기도 한다. 특히 대저택 내 벌어지는 음란한 짓거리들과 소녀들의 사랑, 하인들의 권력관계들이 수직과 수평을 모두 아우르는 공간력을 자랑한다. 가장 영국적인 세상을 그려놓고 철저히 모독하는 방식은 노골적인 성애 묘사를 통해 종지부를 찍는다. 모든 구조물을 세우고 나서야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다고 믿는 세라 워터스의 기반 작업이 끝나고 나면, 그제야 서로를 바라보는 수와 모드의 애처로운 표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영화 아가씨

원색적이며 통속적이다. 이 양립하기 힘든 두 단어가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수와 모드의 만남이기도 하다. 동성애 소설이라며 거부감만 앞섰던 두 소녀의 사랑은 보편적이라는 둘레 속으로 들어오며 불편함 없이 애틋하게만 다가온다. 그것이 세라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복잡한 운명을 지닌 두 소녀는 배경부터 다르다. 수가 도둑의 소굴에서 자란 영국 뒷골목의 천박한 아이라면, 모드는 부유한 집에서 고이 자랐지만 정신적으로 깊게 파인 상처에 고통받는 소녀다. 그리고 둘 사이를 잇는 사기꾼 젠틀맨 리버스가 등장하고, 삼각관계를 예측하던 독자들을 선과 악이 뒤집히는 구렁텅이로 이끄는 복잡한 가족사가 끼어들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사실 이야기는 그렇게 튀지 않는 소설이다. 보편적이고 장르적 컨벤션을 충실하게 지켜나가는 힘이 있다. 모든 걸출한 병법은 시대가 변해도 늘 효율적이다. 세라 워터스는 고전의 균질감을 믿는 작가이고, 독자는 그녀가 만든 인물을 신뢰하며 끝까지 믿을 수 있다. 나 같은 경우엔 최근에 읽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 도리스 레싱의 <황금 노트북>을 연상케 했다. 아마도 지독한 운명 앞에 선 미숙한 사람들이 결국엔 문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스스로 구원하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가 모드를 떠올리며 중얼대는 말들 속에 내가 이 소설을 접하며 느낀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기에 적어본다.

“나는 모드가 몸을 떨던 이제까지의 기억을 모두 되살려보면서 무슨 영문으로 내가 그동안 그런 떨림을 사랑으로 착각해왔는지 의아해했다.”


표지사진 : 영화 <아가씨> 스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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