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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1. 2017

밀란 쿤데라의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저

밀란 쿤데라의 인터뷰를 읽어 내려가던 중 뜬금없이 찔리던 그의 말.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최소한 시작 부분을 기억할 수는 있어야지요. 안 그러면 소설이 그 형태를 잃게 되고 ‘구조적 명료성’이 흐려지지요. 

그렇다 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시작을 떠올리지 못했다.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느리게 천천히 읽었지만, 어려웠고 무엇보다 난해했다. 이야기 전개에 무관심한 아포리즘의 무더기에 당황했다. 다시 책장을 펴보니 운명의 존재를 믿는 '테레자'의 무차별적인 기대감은 여전히 생생하다. 아직 삶의 괴물을 맞닥뜨리지 않은 순수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모두들 알다시피 가벼운 삶을 즐겼다.

클로저 Closer, 200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은 뭘까. 마치 한편의 철학 에세이를 읽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쿤데라의 생각들이 주는 문장의 맛이다. 길을 걸어가다 느닷없이 주저앉아 우는 '테레자'를 떠올리고, 운전하다 말고는 씩 웃어 보이며 자신의 퇴락을 감내하는 '토마시'의 무덤덤함이 만져졌다. 아닌 것 같아도 잘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 수많은 테레자와 토마시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체코의 역사적 사건인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침공'에 대해 알았다. 관심도 없었던 유럽의 소국가의 한 사건이 네 남녀의 생각에 미친 영향을 들어보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스탈린의 아들, 아시아의 정치적으로 박해받는 사람들, 쇼를 위해 모인 군중과 그 속에 죽어간 프란츠. 보헤미아에서 열린 토마시의 장례식. 그리고 영원으로 귀결되는 키치적인 질문이 정리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이다. 말을 보태는 것이 무용한 이 걸작을 난 그냥 통과해버렸다. 비록 머릿속에 뭔가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겼는지 알 순 없다. 그저 잘 놀았다며 스스로 단언하고, 종종 주변에 두고 살펴본다.

쿤데라가 이 작품 속에서 가장 천착한 곳은 바로 ‘키치’다. 그리고 그 키치가 전적으로 의지하는 곳은 꿈이라는 영역일 것이다. 테레자는 꿈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그리고 결국엔 그것이 아름다웠다며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낸다. 그 저속한 키치의 영역에 잠시 마주쳤던 토마시의 얼굴에 만족했다. 자신이 본 것은 사랑이 아닌 삶의 상상력이었다. 현실의 구린내를 잊게 함에 만족스러웠다. 쿤데라는 꿈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체를 통과하는 것,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세계를 이해하기보다는 같이 걷는 행위를 통해 키치를 부정했다. 굳이 이야기의 맥락을 찾겠다고, 메시지를 건져 내겠다고 나선 이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 당당한 키치를 향한 냉소가 재밌다.

쿤데라의 유작일 것 같으나 유작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무의미의 축제>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을 모두 아우르는 특유의 가벼움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머리 위에서 공기놀이라도 하듯 무용하고 지나치게 쓸데없는 인생을 가벼운 필치로 그려나간다. 우리는 얼마나 쓸데없는 공상에 얽혀 살고 있는가. 그저 농담이나 하며 시간이나 축내면 될 것을. 난 이 작품에서 밀란 쿤데라의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 아등바등을 멀리하고, 가벼움을 찬양하는 그의 작품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 <클로저>와 비등하게 보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사비나에게서 '나탈리 포트만'을 본다. 주드 로, 클라이브 오웬, 줄리아 로버츠도 마찬가지다. 인간 남녀의 모든 유형을 포괄하고 있다는 네 명의 캐릭터가 한 할리우드 영화의 주연배우들과 겹쳐진다니. 쿤데라가 껄껄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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