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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9. 2017

삼풍백화점이 잊은 것들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소설집

강남의 탄생, 한종수 강희용 공저

<강남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었다. 모두 강남스타일과 교보문고 사거리를 알지만, 돈으로 상징되는 이 거대한 도시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시종일관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들이 가득한 이 책을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주요 내용은 도시 개발자로 유명한 한종수와 참여정부와 서울시에서 도시 개발자로 일했던 강희용 박사가 쓴 강남의 탄생 역사다. 그들이 말하는 강남 탄생은 곧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저개발의 기억이다. 잘 살고 싶었고, 돈 많고 싶었던 한국의 열망은 천박하고 경악할만한 사건들을 만들었다. 배밭으로 가득한 평당 오백원짜리 시골마을에 타워패리스가 들어서기까지, 허화벌판에 소달구지가 종종 눈에 띄던 이 곳이 어떻게 교통지옥이 되었을까. 지속되는 홍수로 사람들이 정착할 수 없었던 한 도시가 권력자에 의해 바벨탑을 쌓게된 맥락이 보고싶었다. 86년 강남구 일원동 낡은 공무원아파트에서 태어난 내겐 그 맥락이 중요했다.



강남이라는 공간이 태초에 어떤 정치적 풍량에 의해 탄생되었는지가 흥미롭다. 군사정권의 막후 아래 신흥 졸부들이 탄생한다. 강남엔 지하철이 깔리면서 이주는 본격화된다. 엉망으로 설계된 도시계획으로 삭막한 빌딩숲이 그득하고, 오리지 차들을 위해 설치한 도로 때문에 한강 진입로는 차단된다.  이처럼 한국의 현대사와 맥을 같이하는 사건들을 공부를 하듯이 읽을 수 있다.

내가 TV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유년시절, 그중에서도 94년과 95년 연이어 일어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감정적으로 날 괴롭혔다. 천박한 자본주의 속 강남의 집약적 개발이 남긴 상처로 기억되는 이 두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 잊어서는 안 되는 사고다. 부동산 광풍과 투기, 정권의 탄생 공신들이 차지한 부실기업들은 부실 건축물을 양산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죽어버린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다. 지금 이 시간, 말끔하게 복구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을 밀어내고 들어앉은 세련된 고층 아파트엔 그들이 없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짐작도 하기 어려워졌다.

소설집 오늘의 탄생, 정이현 저

삼풍백화점과 함께 무너진 사람들


정이현 작가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다. 그녀의 단편 소설은 문장은 쉽고 간결한 데다 주저함이 없는 리듬이 좋다. 인물들의 말 자체가 문학적이지 않고(좋은 의미의) 실생활처럼 이물감이 없다. 무엇보다도 내가 생활에서 만지고 지냈던 도시 근처의 공기를 훑어내는 솜씨에 감탄한다. 72년생 정이현 작가는 2000년대 초에 데뷔해 단편 소설로 연이어 문단에서 수상을 하며 주목받았다. 이후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달콤한 나의 도시>는 근처 도서관에 가면 여대생들의 책상 구석에 꽂아두고 틈틈이 읽는 소설이었다. 그녀가 다루는 인물들은 20~30대의 전문직에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는 지하철 2호선의 그네들이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나 이상적 세계관은 안중에 없다. 그녀의 선배 여성작가들이 늘 천착해 마지않았던 다른 세상에 대한 열망, 그로 말미암아 느껴지는 죄의식의 테두리는 그들에겐 사치일 뿐이다. 그녀의 인물들은 젠체하는 부유층을 냉소하면서도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 제도권 안으로 침투하겠다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먹고살기즘의 시대, 속물근성을 숨기지 않는 출근길 짙은 눈썹에서 정이현의 아우라는 표출된다. 난 정이현이 그리는 사람들에게서 나와 내 주변의 그를 본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정이현의 첫 번째 소설집을 펴고 몇 문장 읽었다. 당시엔 너무 쉬운 세계라고 생각을 했다. 세계의 고난을 향한 비판적 사고 없이 신변잡기로 풀어내는 방식에 불편했다. 적당히 안온한 세계 안에 머물기 위해 쉽게 타협하는 캐릭터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태도는 내 카톡 리스트에 많으니까. 아직 그리스의 조르바와 카프카의 K씨도 만나지 못한 내가 그 안에서 같이 수다나 떨고 있을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문학적 허영은 수많은 졸음 외에 한국 소설을 읽고 싶은 욕구를 만들었다. 이제 몇 년이 지나고 직장생활 7년 차 모든 주말 약속들에 심드렁해질 무렵 종로 중고서점에서 정이현의 소설 <오늘의 거짓말>을 무려 1500원에 들고 나왔다. 값어치 이상이길 기대하며 근처 카페에서 반나절 만에 다 읽었다. 그리고 거기에 삼풍백화점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사건으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1천여 명 이상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다치거나 사망했다. 사망자는 501명, 부상자는 937명, 실종 6명, 피해액은 약 2700여 억 원으로 집계됐다. 오후 5시 57분, 옥상이 무너져 그곳에 있던 에어컨 실외기가 5층으로 떨어졌으며, 이 충격으로 건물의 중심 기둥이 무너졌고, 곧바로 건물 남쪽 부분이 단 20초 만에 무너졌다. 물론 백화점 안에 있던 고객 1500여 명은 모두 매몰되었다.
작가 정이현

이 소설에서 주인공 화자는 막 대학을 졸업한 구직자로 강남에서 별 걱정 없이 자라온 아가씨다. 그녀는 친구와 같이 동네 백화점을 갔다가 거기에서 고등학교 동창생 친구를 만난다. 별로 친하진 않았지만 반가운 척, 궁금한 척 같이 식사를 한다. 우연찮게 그녀의 집에 놀러 갔다 온다. 그녀의 부탁으로 백화점에서 하루 알바를 한 정도다. 그리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화자인 그녀는 취업을 했고, 친구는 그 나름대로 바빴다. 그리고 백화점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듯이 무너졌다. 삼풍백화점 안에 어떤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난 책을 읽을 때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선천적으로 이야기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 정이현의 세계는 속되지만 결코 스스로를 부정하는 기운이 없다. 그저 그런 세계를 사는 자의 시들한 기운이다. 맑게 빛나는 눈을 가진 그녀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염세적인 말들로 나를 붙들어 맨다. <삼풍백화점>의 평범한 두 아가씨는 사소한 인연과 별다른 것 없는 일상 속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뒤틀렸고, 지금은 누구도 그녀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면 됐을, 그런 사람들을 정이현은 붙들어 맨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비극이어서 일까. 그것이 너무나 전형적인 중산층의 삶이기 때문일까. 소설의 마지막 친구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한 신문에서 삼풍백화점 사건을 "한국 현대사의 개발주의가 만든 병폐"라고 요약한 문장을 보게 된다. 그녀는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신문사 직원에게 항의한다. 그것은 울분과 억울함이 담긴 호소였다. 그녀는 그 백화점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며, 한 번 보기는 했냐며 따진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서 소설을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들을 완전히 잊었기 때문이다.

영화 멋진 하루

정이현의 작품들이 수월하게 읽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내 주변부에 있을만한 것들을 소재로 가져다 쓰기 때문이다.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해서 재혼 상대를 물색하는 남자, 대학 졸업 후 취업준비를 핑계로 허송세월이나 보내는 중산층 집안의 20대 여성, 마은 아홉 살의 전업주부, 인터넷 쇼핑몰에 상품 사용 후기를 올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백수 여성, 아내 덕에 초고층 아파트에 사는 남자, 비밀과외를 받는 80년대 여고생, 전문직의 독신녀, 섹스리스 부부, 성 도착증 의사와 결혼이 하고 싶은 간호사. 이렇게 쭉 늘어놓는 것만으로 단막극이라 표현이 얼마나 적확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녀의 작품은 그렇게 주변부 인생을 다룬다. 마치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를 한층씩 돌아다니며 무작위로 이야기를 뽑은 것 같다. 그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에는 현재 인물에 닥친 비극의 징후를 덮어버리는 게으름에 있다. 또 다른 이야기인 <어금니>라는 소설을 읽어보자. 아들의 음주운전으로 15세 소녀를 죽음에 몰아넣은 사건을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 모른 척하는 40대 후반의 엄마의 이야기다.

“1990년생. 만 열여섯. 죽은 소녀의 이름은 남보라라고 했다. 참 예쁜 이름이네.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나는 가느다랗게 진저리 쳤다. 남편이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 멈추었다. 눅눅한 침묵 속에 흔들리며 우리는 때늦은 밥을 먹었다. 마흔아홉 번째 생일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소설 속 그녀의 정체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이 말한 대로 배울 만큼 배운 지성을 가진 중산층의 여성이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 상징적 행위도 없이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식사를 마친다. 그리고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내일을 유유히 버텨낼 것이다. 그저 썩어가는 어금니만이 이 이상 징후에 무미건조한 제동을 건다. 명징하게 그녀에게 지금 뭔가가 뒤틀리고 있다며 통증을 보내는데, 그녀는 30평 후반대 강남에 자리한 이 아파트 안 일상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주변의 눈을 의식해야 하고, 고상한 문화센터 활동도 빠질 수 없다. 마치 쇼윈도에 진열된 드라마적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체성의 포기와 같다. 정이현의 다른 소설들 속 주인공처럼 이 안온한 삶을 위해 얼마나 많은 속물적 선택들을 묵인해왔는가. 그 피로감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아픈 자각이지만, 현실의 피뢰침처럼 무언가를 가리키는 걸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작가 그 자신도 어떤 위로를 주지 못하고 어물쩍 이야기를 종결시킨다.

영화 가족시네마(2012)

그렇다 내가 바란 위로는 낭만적 사랑이다. 이 세계에 대한 자그마한 집착이 주는 끈기를 눈으로 나마 지켜보고 싶었다. 정이현의 인물들이 겪는 사건은 위악 그 자체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은 적정한 악을 체화하고 있다. 그것은 서울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선 공장에서 나오는 기성품처럼 정형화된 결론이다. 이것은 자본의 자연주의 소설과 같다. 하지만 짐짓 악한 체하는 태도들의 기원을 시스템에 맡겨버린 게으름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이런 사회 구조에서는 인물들이 흔해 빠졌다는 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인간이 어떤 계기로 지금의 위악을 털어놓게 되었는지 간단한 암시로 토해내지 못한다면 난 이 피로감을 굳이 견딜 자신이 없다. 다시 들춰볼 힘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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