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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2. 2017

자유로운 지성의 구속

울분, indignation 2008 필립 로스 저

요즘 ‘약 빨고’ 뭐 한이라는 말이 자주 인터넷 댓글에 등장한다. 의미인즉슨 마치 스테로이드를 한 배리 본즈(MLB SF의 전설적 타자)처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실력을 발휘할 때를 지칭한다. 배리 본즈 야 진짜 약을 빨아서 비상식적인 성적을 남겼지만, 인터넷에선 다소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어떤 이를 조롱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필립 로스의 짧은 소설 <울분>은 정확히 약 빤 기분을 안겨주는 소설이다. 이 책의 첫 챕터 제목은 ‘모르핀을 맞고’다. 소설가가 약을 먹고 썼다는 건 아니고, 극 중 주인공인 20살 청년 마커스가 한국전쟁에 징집됐다가, 적 포탄에 맞아 죽기 전 위생병이 놔준 모르핀에 의지해 20년을 회상하는 게 이 소설의 액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설이라는 허구 안에 약을 빨고 썼다는 혐의까지 씌워졌으니 이야기가 다소 괴상하게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이 진지한 작가 양반이 약을 빨고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지켜보자

소설 필립 로스

내가 봤을 때 두 권짜리 장대한 <휴먼 스테인>이나, 짧지만 지나치게 무거운 <에브리맨>보다 필립 로스에 입문하기 수월한 작품이 <울분>이다. 기존 필립 로스의 습한 어두움은 유지하되, 소재의 무거움은 한층 덜어낸 모양새다. 문장이 단문 구조로 단순하고, 슥슥 내지르듯 작성한 것처럼 복잡한 구조가 없다.

마커스는 코셔 정육점집 아들이다. 코셔란 유대계를 위해 정결하게(?) 도살한 고기만 파는 정육점을 뜻한다. 유대계라는 콤플렉스와 정육점 집 아들이라는 가난은 마커스에게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을 주었다. 아버지 역시 그에게 세상의 차별을 벗어나 더 큰 사람이 되길 원했으며, 마커스는 그 기대에 부응해 공부도 잘하고 집안일도 성실한 청년으로 자랐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모르핀을 맞아서인지 마커스의 기억 속 일들은 거대한 문제와 이해 불능의 상황들의 연속이다. 우선 성실한 기질의 아버지가 달라진다. 늘 집에서 생활하던 아들이 대학으로 진학했을 때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정도가 심해지니 마커스는 미칠 노릇이다. 고작 몇 시간 늦게 들어왔다고 다 큰 아들이 허튼짓이나 하고 돌아다닌다며 분노를 토해내고, 하지도 않는 행위들을 열거하며 이러다간 한국전쟁에 징집될지 모른다며 아들을 집에 처박아 두려 한다. 성실한 마커스도 이쯤 되면 없던 반항기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홧김에 멀리 떨어진 대학으로 편입해버린다. 기숙사가 딸린 기독교 계통 학교 와인스버그 대학이 그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와인스버그의 대학생활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세상에 반항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내가 해보지 못했던 본연의 대학생활이 마치 내 것인 양 즐겼다. 이제 막 지성인 흉내를 내는 풋내기지만, 그 믿음만큼은 강인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는 마커스는 높은 수준의 수업과 두꺼운 이론서를 섭렵하며 강해진다. 사회 저명한 석학들의 책엔 세상은 온통 불협화음 천지고, 대학의 학장이란 자식은 꼰대와 다름없으니 마커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지식과 젊음이란 정치적, 경제적 신념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학생들이 군사쿠데타에 항거하고, 유럽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반전을 외쳤던 건 그 나이 때가 주는 선물이다. 이제 세상을 좀 알 것 같고, 잡힐 듯한 지적 체계가 문장 안에 그대로 녹아있다.


작품 속 마커스가 믿는 이론의 중심에 등장하는 학자가 ‘버트런드 러셀’이다. 20세기 대표적인 석학이자,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무신론자인 버트런드 러셀이 집필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소설에서 길게 인용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전통의 개신교 신앙을 가진 학교에 다니는 유대인에게 이 책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자동소총쯤이 될 것이다. 마커스는 채플(기독교계 학교 따위에서의 예배)에 40회 이상 참석해야 졸업을 할 수 있다는 학교 내 교칙에 대한 반박으로 러셀의 긴 주장을 성경처럼 읊조린다. 버트런드 러셀의 독설과 비판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기에 이는 실현 가능한 반항으로 보이지만, 정작 학생과장은 마커스에게 인간의 이해로는 다다를 수 없는 그분에 대한 비난은 그저 콧방귀로 흘려 넘길 수 있는 내공이 있는 사람이다. 마커스의 열띤 주장에도 불구하고 ‘채플에 참석하지 않을 거면 나가게’ 한 마디로 간단하게 상황 종료.

작가 필립 로스

이렇듯 이 책 제목이 말하는 울분이란, 이제 막 발현하는 젊은이의 사상을 무시해버리는 보수적인 세상에 대한 괴로움을 뜻한다. 이 책의 화자이자, 배경이 되는 1950년대가 필립 로스의 20살 젊음과 시대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이 책에 범람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작가 자신의 심정과 같은 것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1951년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해 수많은 젊음들이 끌려가 죽는데, 단지 대학에 다닌다는 이유로 고작 기독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 정도로 불만을 품는 그런 젊음은 얼마나 시시한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시시한 투정조차 모두 무시해버리는 기성이라는 틀은 어찌나 단단한지. 그 울분을 받아줄 자는 아무도 없다.


"생각건대,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종교는 부분적으로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곤경과 분쟁에 있어 내 편을 들어줄 든든한 형의 존재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좋은 세계는 지식, 온정, 용기가 필요하지, 과거에 대한 애석한 동경이나 아주 오래전 무지한 사람들에 의한 자유로운 지성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 문장은 버트런트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작가는 단지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지만, 더 궁극적인 목적은 지성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바람이 짙게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마커스가 비겁하게 러셀의 뒤에 숨어 부당한 학교의 교칙에 반항하긴 했지만, 실제 본래의 목적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갈망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용기는 아니었을까. 모르핀의 환각작용 때문인지 책의 내용은 파괴적인 전개에 다다르지만, 결국 마커스 도 세상이 바뀌는 전장의 한 형태로 투신했기에 본래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 위로해본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저

필립 로스의 작품세계에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개인적 구속 이상의 절대적 지상명제임이 틀림없다. 그가 벗어나려는 아버지의 전통적 가치관은 비상식의 영역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직접적인 속박이다. 와인스 버그의 숱한 중생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한 유대인이 신으로 탄생한 거라며 징징거리고 있지만, 세상은 그와 반대로 유대인을 박해하기 위해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마커스가 지속적으로 부딪치는 가족, 학교, 이성과의 고민에는 내가 택하지 않은 인종의 아이러니가 깊숙이 박혀있다.

1950년을 지나 폭풍 같은 1960년대, 공산당이라는 이름이 발현됐다 사그라진 1990년을 지나 이제 오로지 성과만이 인생을 증명하는 2017년이 왔다. 1950년의 와인스버그의 젊음들이 여학생 기숙사를 점거해 여자를 달라고 외치던 폭동은 지워지고, 전쟁은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진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 젊음들은 비로써 합당한 젊음을 토해내고 있을까. 그저 개인적으로 조용히 자체적 해소 방법에만 골몰하고 있지는 않을까. 버트런드 러셀 같은 선동자가 없이, 스스로를 옥죄며 열등의 찌꺼기를 마저 치우지 못한 체 순응하고 애써 수긍한다.


<울분>이라는 소설이 놀라운 점은 1950년대를 보낸 젊음들이 가진 고민들이, 현재 이 시각에서 세븐일레븐에서 삼각김밥이나 씹으며 최저시급도 보장받지 못하는 20살 젊음들이 가진 고민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커스의 아버지가 왜 미쳐갔는지, 왜 아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우려를 표출하여 도망치게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늙은 아비는 우려와 걱정이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반항, 돌출은 진압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몰라도 세상에 먼저 나설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려대로 마커스는 아비보다 먼저 죽음에 다다랐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이혼을 포기한 어머니, 세상의 외면에도 매일 동물의 피와 살을 도려내는 아버지. 울분이라는 단어처럼 어울리는 텍스트가 어디 있을까.


표시사진 : 밥 딜런의 젊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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