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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5. 2017

영화의 근사치를 찾는 경험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저

영화에 관한 평론과 칼럼을 오랫동안 읽어왔다. 수년간 영화주간지를 읽으며 지하철에서 보낸 시간은 영화에 대한 내 사랑을 측정 가능한 근사치로 올려놨다. 난 비좁은 지하철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화에 접신하며 이 세계를 잊고 지낸다. 오랜 시간 동안 영화에 관한 글들을 읽어오며 느낀 사실은 난 영화에 대한 글은 좋아하지만, 영화 평론가들의 비평문엔 아직도 정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통 비평의 영역에는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개념들이 가득하다. 비평가들의 글엔 마치 시신을 해부하는 의사처럼 칼과 매스를 쓰며 내가 보지 못했던 내장을 하나하나 도려내는 솜씨가 있다. 그래서 비평문을 읽는 것은 거의 해석하는 행위에 가깝다. 난 그들의 문장을 무심하게 읽는다. 겉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글쓰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뭐가 이렇게 어려워 젠장'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내 영화에 대한 애정이 무지한 군중 속의 외침처럼 들릴까 봐 두려움을 감추기 힘들다. 전문 영화 영역에 대한 간극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지하철과 궁합이 좋은 잡지 '씨네21'

그저 사랑하는 것 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을 텐데. 인식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겨워 끝내 눈을 덮고는 1호선 지하철이 한강철교를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몇몇 좋아하는 평론가들의 글들이 있다. 자존심 상하게도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쓴 글들을 쓴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런 평론가들의 글만 골라 읽게 되더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영화주간지 <씨네 21>에서 내가 좋아하는 꼭지들도 역시 그렇다. 우선 난 평론의 영역에서 벗어난 글들이 좋다. 그리고 대부분의 글쓴이는 소설가, 문학평론가, 가수 등 영화 밖 직업군이 들려주는 글에 더 끌린다.(김중혁, 김영하, 신형철, 이적, 김금희, 이송희일 등이 그렇다) 영화평론가의 글들도 마치 에세이처럼 일상과 접합해 영화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는 김혜리, 김영진, 듀나의 글을 유독 더 좋아한다. 영화라는 공통 주제를 앞에 두고 저마다의 전문성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영화보기가 있음에 난 안도한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 있는 것이다.


문학비평가 신형철 작가

최근 나온 두 권의 영화 책 <가장 정확한 사랑의 실험>, <보다>는 씨네 21에서 칼럼으로 연재됐던 두 개의 꼭지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스토리텔링>, <김영하 작가의 영하의 일기>를 엮은 것이다. 그중 내가 소개할 책이 바로 신형철의 글들을 모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다>이다.

신형철은 확실히 영화를 ‘잘’ 보는 사람이다. ‘잘’의 의미는 더 재밌게 더 의미에 충실하게 더 몰입해서 등 다양한 접근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난 여기에 더해 영화라는 같은 목적지를 독자적인 노선으로 통과한 사람을 '잘'본다고 칭하고 싶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같은 서사를 다루는 소설과 다르게 영상매체라는 점에서 접근이 용이하다. 커피 한잔 뽑아 들고 영화관에 들어가면 두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영화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식하고, 그것은 풀어놓는 행위는 점점 더 희박해졌다. 누군가가 평론 영역에 달아 놓은 한 가지 방식의 길이 모든 이에게 통용되는 보편타당한 해석이 된다. 영화를 과정 자체가 아닌 덩그러니 남은 메시지로 정리해버리는 목적 위주의 관람은 김이 빠진 라면처럼 맥이 빠진다. 신형철의 글이 위력적인 이유는 정확한(근사한)이라는 용어에 기초한 글이라는 표현처럼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의 귀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

이런 태도가 내게 신선했던 건 단언이 없는 헤아림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닦은 유일한 길 이상의 최적 경로가 있음을 감사하는 과정의 행로이기도 하다. 그 가능성에 나 같은 미숙한 글쓴이도 힘을 낸다. 나도 나의 영화적 길이 있음에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다.

그래서 난 신형철의 글에 줄을 치며 읽었다. 이 동네 저 동네 영화를 자기만의 방식대로 보고 해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지만, 신형철은 수 번 영화를 보고 사려하고 다다른 끝에 나온 문장들이라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신형철은 정확하게 적었다.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영화평론을 쓸 수는 없다. 영화를 일종의 활동 서사로 간주하고, 문학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물어보려 한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고.”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비평적 접근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 과거 MBC 100분 토론에서 한 평론가가 한 영화를 비평할 가치조차 없다고 단언했을 때, 그 조목조목 옳은 소리에 난 왜 거부감을 가졌을까. 그가 휘두른 쌍지팡이엔 주저함이 없었다. 휘둘러서 정확하게 베어 냈지만, 그 행위엔 다른 이의 주춤거림을 고려치 않았다. 자신의 해석이 유일함을 주장하는 건 일종의 폭력이다. 하지만 유일무이하게 나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재미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힘을 준다. 내게 특정 비평가의 단언은 폭력적으로 대중을 몰아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형철의 글을 읽는다는 건 한 사람이 해석한 글이 정확함으로 수렴하는 걸 보는 즐거움이다. 그의 글에는 단언함이 없다. 오롯이 같은 영화(길)를 걸어간 자들 간의 대화가 있다.


어쩌면 영화가 진정 내게 말을 걸어 주는 기적은 다른 이의 글을 읽음으로써 그 가능성을 넓혀가는 순간이 아닐까. 혼자 보고 느끼고 써내려 간 글은 그저 내가 찾아간 하나의 골목길에 불과하다. 다른 경로로 영화에 도착한 수많은 생각들을 읽지 않는다는 건 좋은 영화를 한 번 보고 마는 것만큼이나 무력하다. 신형철의 글은 십 년 넘게 영화 비평을 읽어오던 내게 새롭게 발견한 고즈넉한 카페와 같았다. 그가 씨네 21의 연재를 마쳤을 때 내가 탄 지하철의 공기는 7% 정도 소멸됐다. 화려함이 없지만, 오랫동안 곱씹게 하는 정확한 그의 글을 읽지 못함에 난 더 근사한 영화적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그가 쓴 몇몇 문장을 노트에 기록해 두고 읽는다. 난 그보다 더 근사해질 수 있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다. 나와 다른 길로 영화를 본 사람들을 느껴보고 싶다.

신형철의 다른 저서, 몰락의 에티카 /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의 글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팁은 영화든 소설이든 대상에 관한 글을 써본 후 접하는 것이다. 신형철은 서사를 앞에 두고 그 의미를 뜯어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해석과 비교해서 읽을 때 그 가치를 더 느끼게 한다. 서사는 스스로 캐릭터를 부여하고, 그 선택을 자연적으로 이르게 한다. 누구나 캐릭터와 동행하며 얻는 생각은 간접 체험의 부정확한 이물감을 해석하는 해소하는 행위이다. 신형철의 글은 캐릭터의 선택을 지극히 학문적인 분석으로 풀어 넣기에, 같이 길을 걸어가는 길잡이로서 훌륭한 기능을 한다. 같은 장면을 보고 그것을 유려한 문장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영화를 다시 걷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순간 영화는 확장된다.

신형철은 자신의 글에 정확한, 유일한, 온전한 이라는 개념을 모토로 삼는 사람이다. 그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가 가진 선의,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파급력 모두 여기 이 글 안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2000쪽이 책을 썼다. 그리고 그것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한다. 이것이 (영화 아무르 중) 한 노인이 자신의 평생의 부인을 목 졸라 죽인 것에 이해라는 척도를 내놓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며, 그것이 걸작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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