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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는 나의 경제관념

by 박민진

스무 살의 나는 돈 없고 시간만 많았다. 나는 돈이 떨어질 때마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했다. 규칙적으로 출퇴근해야 돈을 받을 수 있는 맥도날드보다는 그날그날 일당을 받을 수 있는 현장을 선호했다. 뉴타운 개발이 일던 서울 관악구는 일거리가 참 많았다. 부모님께 간혹 용돈을 받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좋아하는 그녀에게 맛있는 스파게티를 사줘야 했다. 파스터 정도만 양반이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난 연애만 하면 선물이다 뭐다 하면서 이것저것 사서 갖다 바쳤다. 힘들게 벌어서 니콘 F 시리즈를 턱 하니 안겼다.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화장기 없는 담백한 모습이 예뻤던 친구였다. 민트색 나이키 운동화에 헐렁한 501 바지를 입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신촌역 서브웨이에 앉아서 날 기다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나는 하루 뼈 빠지게 일하더라도 목돈을 벌고 싶었다. 여자친구를 생각하면 공사장 일이 힘들기보다는 더 단단한 몸을 만들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더 컸다. 무거운 걸 들고, 계단을 오르고, 삽질하는 게 결국은 다 몸 만드는 운동의 일종이 아닌가 싶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철딱서니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정말로 막노동을 돈 버는 헬스장 정도로 생각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 그 시절. 그래서 그 무렵 나는 돈이 궁할 때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인덕원역 앞 오래된 상가에 자리한 인력사무소를 찾아갔다. 이왕 고생할 거라면, 철거 현장보다는 아파트 신축이나 주택 재건축 공사장을 더 선호했다. 어느 정도 준공에 다다른 덕분에 그늘에서 일할 수 있었고, 운 좋게 대형 건설사 현장으로 가면 밥도 제때 잘 나왔다. 내 인생 첫 돈과 첫 일이었다.


그럼 요즘 내 삶은 어떤가. 나의 일상은 이런저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일,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다. 요즘 정신이 없다.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라도 되는 것처럼 분주히 뭔가를 한다. 내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위한 것일 뿐 뭔가를 응시할 자리가 없다. 사실 하나씩 돌이키면 사이사이 난 잘 빈둥대고 있다. 가까스로 일어나서 출근하고도 커피는 손수 내리고, 일로 만난 사람들과도 짬을 내서 근황 토크를 한다. 수입과 지출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목표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영화와 소설, 글쓰기, 운동이 제 지분을 차지한다. 손아귀에서 자꾸만 빠져나가는 삶의 의미를 놓칠세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밸런스 게임을 하는 셈이다.


종이 냅킨, 포스트잇, 또는 읽던 책 귀퉁이처럼 집 안 여기저기에서 바쁘다는 티를 메모로 남겨뒀다. 가끔 그것들을 어디 뒀는지 찾느라 허둥대며 거실과 방을 오락가락한다. 메모들을 잃어버리면 자칫 해야 할 일을 놓칠까 봐 초조해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써놓은 메모들을 아이클라우드와 몰스킨에 보관해 뒀는데, 때론 내용이 모호하고 무슨 일과 관련된 것인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읽기도 한다. 새로 읽은 책에 관한 끄적임, 식당 예약, 그에게 전화하기, 원고 정리하기, 신간 책 사기, 훈제 연어 등 장 보기, 운동 루틴 등등 구분 없이 파편으로 떨궈져 있다. 삶은 미처 돌아볼 새가 없는데 새로 읽고 배워야 할 것들은 쌓여만 간다. 잠시 멈추고 정제해야 할 시간인데 투두 리스트는 줄지 않고 늘어만 가니까 별 수 없다. 마치 이 리스트를 다 채우는 게 삶의 목적이라도 된 것처럼 현란하게 키보드질을 한다. 늘 우선순위가 헷갈려서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에 힘을 꽉 준다. '정신 차리고 틀림없이 살아야 해.‘


그렇게 아침부터 일을 하다가 목이 뻐근해지면 낮잠에 든 고양이 율이를 깨울까 조심스레 밖을 나선다. 사운즈커피 미니. 커피집엔 나 말고도 뭔가에 치중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우리 모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아이폰을 외면한 채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뭔가에 몰두했다. 난 옷차림과 탁자에 올려진 책 그리고 표정만으로 그들의 삶을 추측할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오해와 억측을 반쯤 섞은 그들의 사정을 상상했다. 곳곳에서 들리는 화기애애한 소리를 피해 귀를 틀어막은 저들을 보라. 뭣들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만 다들 힘내시길. 난 그들과 연대 의식 비슷한 걸 느끼면서 다시 내 일에 몰두했다. 드립 커피 하나, 샌드위치 하나. 헬스장 갔다가 공간 치우러 가고, 집에서 컴퓨터 붙들고 새로운 클럽 오픈 하나.


난 월급을 모아 적령기에 식을 올리고 직장생활에 전념하며 적금을 붓고 아이를 둘쯤 낳는 삶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친지들의 결혼 타령도 이제 멎었고, 세간의 말에도 콧방귀를 뀔 만큼 삐뚤어진 지 오래다. 살짝 비껴간 느낌으로 아메리카노에 샷이나 추가해 마시면서 자족한다. 난 미끄러진 게 아니라 살짝 티가 안 날 정도로 보폭을 달리하며 걷고 있다고 강변하는 글을 쓴다. 그걸 아무도 몰라주니 문제긴 한데, 현재로선 아무리 주판을 튕기며 값을 구해봤자 엉뚱한 값이 나올 뿐이다. 값이 딱 떨어지지는 않아도 근사치라고 믿고 산다. 누군가 앞으로 계획이 뭐냐고 물으면 곤란한 듯 입술을 씰룩대며 눙친다. 나 하나쯤 궤도를 이탈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처자식이 없고 혼자 살면 돈 얘기에는 꽤 자유로워진다. 미래도 별로 불안하지 않다. 나 하나 정도는 뭐라도 먹고 살 테니까. 언젠가 내 처와 자식이 생긴다면 지금처럼 헤픈 씀씀이는 죄악이 될 것이다. 니콘 카메라를 척척 사서 안기던 박민진으로 변신해야 할 테니까.


며칠 전 늦은 밤 모임에 뒤풀이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신호 대기 중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버거킹 옆에 한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멀쩡하던 건물 하나를 깨부수고 빌딩을 짓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건물 한쪽에는 일을 마친 인부들이 쉬고 있었다. 커피 잔에 담배 하나씩을 물고 서 있었다. 난 불현듯 빈 종이컵을 구기며 현장으로 돌아갈 때 느꼈던 아스라한 피로감을 떠올렸다. 김ᅠ씨ᅠ아저씨가 먼지 묻은 손으로 타 주시던 카페오레 입가에 맴돌았다. 두툼한 일당을 받고 고개를 젖히고 웃던 내가 떠올랐다. 돈이 우습던, 돈 정도는 꽤 벌고 살 거라고 믿던. 내 나이 정도면 경제적 자유를 이뤘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여자 친구와 함께 살 날을 그리던. 그런 시간이 바뀐 신호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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