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위함 사업자등록증을 보니 벌써 3년 가까이 혼자 뭔가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난 시기 나름대로 애를 썼습니다. 여기에 고생담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지만, 요컨대 퇴직 후 3년의 시간은 제 생을 통틀어 상당히 힘겨운 생활이었습니다. 물론 저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을 겪으신 분들이 많다는 걸 압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고생이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유는 그 신음을 카페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퇴직 후에 카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제가 다니는 사운즈커피에는 직장인들이 많이들 찾는데, 그들은 타는 목에 카페인을 수혈하고 수많은 고충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대부분이 고충덩어리는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놈들(엄마 미안해), 남편 웬수들, 골치 아픈 마누라, 속 썩이는 어머니(엄마 행복해야 해), 말이 없는 아버지. 직장 상사는 보이는 적이라서 늘 경계 태세를 갖추지만, 같은 입을 쓴다는 식구들의 배신에 망연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 거죠.
이런 분들 입장에서 보자면 책상에 앉아서 한갓지게 책 얘기하고 새벽 카페에서 글을 쓰는 제 모습이 고생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에이, 그런 건 고생 축에도 끼지 못해"라고 할지도 모르고, 분명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저로서도 나름대로 충분히 힘들었다,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글쓰기 주제는 #가족인데 혼자인 얘기만 하고 있으니 뭔가 잘못된 것 같긴 합니다. 저는 1인 가구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네요.
가끔 새벽에 저처럼 '혼'인 40대 연수와 얘기를 나눌 때가 있어요. '영포티를 조롱하는 시대라는데?' 그러라고 해. 누굴 만나고 다녀야 조롱을 당하지. 그것도 다 섞이려는 애들 얘기 아냐. 연수는 다이어트한다고 황태를 씹으면서도 영포티 발음을 원어민처럼 하려고 애썼습니다. 다 씹고 좀 얘기해. 내일 주말인데 넌 그럼 집에서 뭐 해? 누구 안 만나? 나 지금 청소하는데. 새벽 2시에? 그거 하고 뭐 하는데? 다시 어질러. 그래 됐다. 자라. 다들 이렇다 보니 고생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합니다. 뭔가가 없으면 결핍도 없는 법이죠.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철학자 서동욱 씨는 한 책에서 그런 자유라는 건 무인도에서 나는 속 편하다고 외치는 꼴이라더군요. 역시 하늘의 날씨까지 바꿀 수 있다는 철학자의 펜은 매서워요.
하지만 소속 없어도 혼자 꾸리는 삶은 분명 즐거웠습니다. 그것 또한 틀림없는 말입니다. 새로운 분야의 개척에 아직 내가 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오랜 세월 갈고닦은 체력과 헬스인의 자질이 제가 새삼 건강하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온종일 좋아하는 책 얘기를 할 수 있었고, 제 공간에서 파트너라는 호칭을 들으며 독립된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2호선을 타고 끼여서 출퇴근할 필요도 없었고 따분한 아침 회의에서 믿지도 않는 말에 진심을 섞지 않을 수 있었죠. 특히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마주할 필요가 없었고, 하기 싫은 일을 굳이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다양한 재미있는 사람, 흥미로운 사람 무엇보다 배우신 분들과 선한 동료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주기적으로 보는 사람이 가족이라면, 제게 가족은 혈연이 아닌 커뮤니티 멤버가 가족일 것입니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한 씀 에세이, 고전살롱, 인문학클럽 멤버들이 가족입니다. 지금은 보지 못하는 분들도 많지만(무슨 가족이 그래?) 가끔 연락이 와서 안부를 묻곤 합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톡을 하고 서로의 앞날을 비춰줍니다. 카카오톡 프사를 보고 이틀 전 문자가 온 선주 님이 대표적이죠.
선주 님 톡, 민진 님 정말 잘 지내시는 것 거 같아요. 제가요? 그래 보여요? 네 정말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아 맞아요 잘 지내죠. 근데 왜 그렇게 보였어요? 엥? 사진에서 웃고 있잖아요. 아 그렇구나. 보통 사진은 다 웃지 않나요? 그 웃음에 진심이 보여요. 수정님이 찍어주셨나 봐요. 그건 제 전전 여자친구예요. 아 그래요? 잘 몰랐어요. 우리가 연락을 안 하긴 했나 봐요. 호호호. 선주 님은 정말 호호호 소리가 나는 웃음으로 눙쳤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서로를 몰랐지만 가족이었던 시절의 아름다움을 상기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새벽 감성에 찡해져서 장문의 카톡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 모여서 진솔한 얘기를 나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잘 보존이 되어 있어요. 늘 같은 주제로 글을 써주고 대화를 나눴던 선주 님을 내일 글로 적어볼게요. 선주 님의 카톡을 보니 어느새 걸어 다니는 아기 사진이 보였습니다. 저를 대신하는 새로운 가족이 환히 웃고 있어서 행복해 보였습니다. 선주 님이 행복하니 내 사진도 행복하게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말을 할 때마다 떨리니 되려 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게 낫다고 중얼거리던 선주 님의 첫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혼자인 3년, 저는 그사이에 사회를 배웠습니다. 스무 살 넘어서서 15년간 군생활을 했지만 사회는 멀리하고 살았습니다. 그냥 부대 안에서 편히 안착했죠. 군부대는 그 폐쇄성만큼 단단하게 안온했던 것 같습니다. 지루했지만 전적으로 저를 홀로 책과 영화나 보면서 살게 도와줬고, 작가로 살고 싶은 꿈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서야 사회를 좀 알 것 같은 기분입니다. 항상 사회를 무서운 곳이라고 오해했어요. 어째 바보 같지만, 요컨대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입니다. 나름 살만한 곳이라고 마음의 빗장을 풀 수 있었거든요.
밤새서 홈페이지를 꾸미고, 글 얘기를 한답시고 많은 분들과 속절없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은 헤어진 연인과 추적한 비 오는 날 중고 가구를 옮기고, 하나하나 매출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포효하던 새벽도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나를위함 커뮤니티를 유지하고 기반을 키우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독서와 글을 다루는 커뮤니티라서 유독 점잖고 품위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난 것 같습니다. 물론 지속되는 빌런 짓에 흔들려서 헤매기도 하고, 애정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때문에 두 시간 내내 우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사람 사는 곳이라서 그런지 다 대화로 풀리더군요.
그런 힘든 3년을 버티다 보니 그럭저럭 살아남아 조금쯤 툭 트인 평탄한 장소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딴 대구에서 가족과 같은 멤버들을 만나 주기적으로 대화를 하며 외롭지 않은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숨 돌리며 주위를 빙 둘러보니 그곳에는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그 풍경 속에 새로운 나 자신이 서 있었습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저는 전보다 얼마간 여유가 생겼고 전보다는 낙관적으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영업 따위는 전혀 즐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는 사업자라는 건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물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만일 다시 뭔가 곤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걸로 상당히 힘겨운 마음이 든다 할지라도 저로서는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버티면 꽤 괜찮은 시간이 온다"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에 기대는 법 없이 온전히 저를 꾸미는데 1인 가구와 1인 사업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공군 소령으로 전역하기까지 작가로 책을 몇 권 내기는 했지만 나를위함을 꾸리기 전까지 저는 그냥 현실 도피자였습니다.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일을 했지만, 퇴근 후에는 늘 외톨이였기 때문에 딱히 뭔가 문제를 떠안은 것도 없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없이, 별로 노력도 하지 않은 편치고는 그냥저냥 웬만큼 먹고사는 정도였습니다. 사무실에는 가족을 자처하는 제 동료들이 있었죠. 그 가족들은 제게 얘기했습니다. 너 나가봐라. 밖은 전쟁이야. 전쟁을 안 하는 군인들이라서 그런지 부대 밖을 전쟁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저도 열심히 음폐했습니다.
책과 글쓰기로 모임을 열고 살면서 저는 제가 뭔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다행히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고, 여기까지 잘 찾아온 기분이 듭니다. 물론 내년에는 사업이라는 것이 고꾸라지고 폐업이나 매출 하락으로 다시 도피자가 될지 모릅니다.(정말 그럴지도 모르네요) 그래도 그건 그런대로 다음 챕터로 가는 길목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변모하고 이 생활이 언제 끝날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꽤 잘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어떤 가족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