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몇 년 대구에 살며 바쁘다는 핑계로 일 년에 한두 번 서울을 찾았다. 서울의 밀도를 좋아하기에 나는 너무 늙어버렸다. 대구가 가진 헐렁한 골목들이 좋다. 그건 그렇고 서울에서 내가 쌓았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간 거지? 거 누가 내 서울 시절 기억하오? 잠시 떠올려보니 문학 모임, 글쓰기 모임, 러닝 모임 죄다 모임 기억뿐이다. 난 도시만 옮겼지 결국 대부분의 추억이 모임으로 이뤄져 있었다. 징그러운 기분도 든다. 결국 서울과 사이가 서먹해진 여파는 다 모임과의 이별 후유증이었다. 난 서울을 떠올릴 때마다 안국동의 트레바리 아지트, 모임 끝나고 걷던 통의동 골목, 모임 사람들과 찾던 용산의 박찬욱관, 내가 거주하던 대방동 골목의 작은 커피숍들을 떠올린다. 그 커피집에서 난 얼마나 많은 모임 관련 책을 읽고 글을 썼던가.
올해는 서초구청에서 커뮤니티 전담 강사(또 모임!)로 일을 시작하면서 왕왕 서울을 찾을 수 있었다. 첫날 강의를 끝내고는 수서역을 가기 전에 고향 마을인 개포동을 둘러봤다. 두 번째 강의 때는 대방동과 용산 일대에서 커피를 마셨다. 세 번째로는 안국동과 통의동을 들렀다. 생각해 보니 이 세 동네에서 난 꿈을 꾸며 살았던 것 같다. 난 아직 건재하고 더 나은 미래가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그땐 진짜 그렇게 삶을 긍정했다. 강의실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거리가 먼 낯섦이 있었다. 지방에서 사업을 하는 촌놈이랄까. 그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나에게 서울은 별천지가 아니라 살과 뼈가 현현한 나의 고장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첫날 강의가 끝나고 개포동을 찾았다. 강남 개발 광풍이라지만 내가 찾은 고향 개포동은 아늑하고도 구태의연했다. 주공아파트의 모습이나 동네 공원과 아파트 단지는 내 기억 속 그대로였다. 버스에서 그 모습을 스쳐 지나가는데 어딘지 무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살던 고향에 이름난 부자들이 비집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연탄보일러를 쓰던 그런 동네가 아니었다. 마침 하교 시간이라 초등학생들이 삼삼오오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 나의 동네는 아니었다. 태어나기만 했지 이곳은 나를 반기지 않았다. 돈에 초연해지자고 그렇게 글을 썼는데, 빌딩만 보면 기가 죽는 시골 마인드는 어디에서 왔을까.
두 번째 강의를 마치고 간 대방역에는 나의 전성기가 있었다. 장교 신세에 서울 근무지 배치는 출세길과는 멀어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만큼 놀기 좋은 곳이 국방부다. 난 이 시기 퇴근하고 정말 잘 놀았다. 주말에는 집에 있질 못했다. 매주 홍대, 신촌, 연희동, 북촌, 서촌, 안국동을 다녔다. 난 강남 출신이었지만 강북 정서를 가진 인간이었다. 강북이야말로 서울이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이 나를 붙잡은 데가 있다면 극 중 강북 남자가 강남 사람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내가 살던 우주마루 아파트를 보면서 난 되뇌었다. "저긴 숙소지 집이 아니야." 그때 난 집이 필요 없는 인간이었다. 서울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였으니까.
대방역 부근을 산책하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독서모임에 다니면서 아침에 얼마나 설레었나. 주말 아침 5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이 얼마나 찬란했나. 지금도 변하지 않은 카페와 골목의 모습은 문득 내게 시간관념의 혼란을 가져왔다. 나는 갱년기도 아닌데 조용히 흐느끼며 동네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나는 결국 울 수 없었다. 주변에 창피하기도 하지만 이제 마흔 넘은 빡빡이가 이깟 추억으로 울기까지 하랴. 그러나 나는 내가 아직 센티해질 줄 안다는 것에 흡족했다. 나는 여전히 뭔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만큼 삶을 희망하고 있구나.
내게 서울대입구도 추억의 공간이다. 그때 자주 가던 여자친구의 자취방 근처에서 난 많은 국밥을 먹었다. 여자친구 퇴근할 때까지 국밥을 먹고 스타벅스에서 여러 가지 글을 썼다. 당시 내 헬스 고질병이었던 어깨 통증을 고쳐준 연서담 한의원은 아직도 문자메시지가 온다. 문자 올 때마다 생각한다. 이분 정말 명의인데. 그때 난 울면서 한의원을 찾았다가 어깨가 아픈데 발가락에 침을 놓아주시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매번 뉴질랜드산 영양제만 먹던 내게 동양의학의 위대함을 안겨준 곳이었다. 유난히 글이 잘 써졌던 서울대입구역 스타벅스에는 정말 서울대생이 있었을까. 그때 내가 설대 기운을 받아 썼던 글은 얼마나 학구적이었던가.
서울대 입구를 거쳐 근무지였던 삼각지역 근처로 가니 기분이 또 달랐다. 개발이 한창 더 진행이 된 용산 일대는 내가 놀던 허름한 동네가 아니었다. 그래도 한밤에 찾아왔던 친구의 모습이 근처 감자탕집에 스며들어 있었고, 밤에 갈 데가 없어서 찾았던 숨겨진 원불교 뒤 공원이 여전했다. 천 원짜리 테이크 아웃 커피집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당시 얼마나 사람이 보내는 신호에 무감했나. 어째 그토록 무심했나. 거절을 몰라 계속 매달리고, 신호를 몰라 계속 어리둥절했다. 감 떨어지는 내가 어떻게 좋은 글을 썼겠나. 난 발로 땅을 차면서 뭔가 억울해졌다. 서러움이 온몸에 차올랐다. 다 어디로 갔는지. 그때 만났던 사랑했던 친구들, 내가 대화에 몰두했던 카페와 식당은 왜 다 망했는지.
최근 나는 나의 글쓰기의 정관수술상태, 스스로 글을 멀리하고 다른 일을 택하면서 묶어버린 나의 꿈에 관해 자주 글로 쓴 바 있다. 나의 옛 동네를 돌다 보니 내가 꿨던 숱한 계획은 다난한 일들 속에 다 흩어져, 지금은 이렇게 순회를 해야만 간신히 조각모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얼마나 내 희망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루하루를 사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어설프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어졌다. 낯선 동네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데 그건 내가 바랐던 뭔가가 아니었다. 나는 참 나의 동네에서 많은 꿈을 꾸었는데. 내가 지금 놓친 건 뭐지? 삼각지에서 핫하다는 카페에 잠시 들어가서 나는 청승맞은 글을 한참 써댔다.
나는 매일 아침 그날그날의 계획을 세운다. 업무차 미팅과 공간 준비, 홈페이지 관리와 직원에게 시킬 일도 빼곡하게 정리한다. 글 하나도 올려야 하고, 독서와 발제문 작성도 필요하다. 수북한 문의가 들어와서 일일이 답변도 해내야 한다. 이런 일에 차질이 생길라치면 전전긍긍한다. 빠듯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만족해서 침대에 눕는데도 난 왜 꿈을 잃고 사는 기분일까. 허둥대며 종종걸음 치는 기분 때문일까. 다시 글을 써보며 느낀 것은 내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좋은 사람이지 못했다는 자각이다. 외로운 것이 삶이라며 소중한 관계를 너무 급히 떠나보냈다. 쿨한 척하며 다른 인연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조급하게 살다 보니 우연한 만남과 시간을 내어 대화를 해보려는 시도가 드물어졌다. 누군가와 우연히 만나면 시간을 뺏기는 기분이 들어 겁이 났다. 이게 맞는 걸까?
내년에는 조금 덜 바빠져야겠다 다짐한다. 한가하게 산책을 하며 공상을 하고, 너무 한가해서 어쩌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그렇게 살 수 있는데 내 선택으로 바삐 일과 속에 몰리고 있다. 빳빳한 노트에 나의 올해를 정리했다. "내 삶이 지닌 우연의 기쁨을 빼앗기다 보니 사람에게 인색해졌다." 내가 서울에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매번 새로운 만남을 하러 나가는 기분에 삶의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은 사람들과 함께할 자리를 기다리는 외출 준비, 어색함을 무릅쓴 대화에서 나오는 기쁨이었다. 착착 예상대로 진행되는 스포일러에 가까운 루틴은 금방 질리는 맛 아닌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해본다.
새해에는 다시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 사냥개처럼 허둥대는 일과에서 놓여나 한가한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지인에게 다정해지고 싶다. 조금 더 느슨하게 일과를 짠다면 가능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시간을 내어 다정한 메시지를 보내거나 사람 사이에 놓친 감정을 돌보는 시간은 산책할 때다. 헬스장에 주저앉아서 난 얼마나 많은 전화를 걸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백이 내게 온기를 돌게 했다. 아직 이런 희망을 품지 못할 만큼 굳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 번째 강의를 끝내고 안국역과 통의동 골목을 거닐었을 때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희망을 품고 삶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시 삶을 돌려낼 수 있다는 희망. 콧물이 흐르기 전에 다시 서울역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