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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1. 2016

우주, 인생의 삼라만상

영화 미스터 노바디(Mr. Nobody, 2009)

예방 차원으로 하는 것을 우리는 보험을 든다고 한다. 특히 금전적 손실에 관한 보험을 들어놔야 불의의 사고에 대처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매달 몇 만 원씩 뜯어가는 통장에서만 그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이 금융 보험이라는 녀석은 늘 손해 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 마치 보험을 든다는 것은 내게 불행이 닥쳐오길 기대하는 저주의 주문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찜찜한 녀석이다. 그래도 우리 어머님이 가끔 병원을 찾을 때마다 치과보험이니 실손 보험이니 하며 꼬박꼬박 돈을 타내시는 것을 보며 보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릴 적 기억에 어머니는 무슨 보험을 그리 많이 가입하느냐며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못 들은 척 꿋꿋하게 바닥을 훔치셨다. 눈에는 두고 보라는 오기가 서렸고, 아버지의 작은 월급봉투의 상당 부분을 보험에 투자하셨다. 그 보험들이 지금에야 빛을 보고 있으니 아버지는 말이 없으시다. 몸이 많이 아프신 어머니는 그때부터 자신의 고단한 노후를 예견하고 계셨을까. 대비와 예방으로 점철된 삶에 지루함을 느끼던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만 현재로선 어머니의 혜안에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주 병원에서 본 환자복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은 분명 내가 그리던 건강한 어머니의 활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래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불안한 것이고, 현재의 아늑함은 금세 깨질 것만 같아서 보험에 손을 뻗는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신하는 사람들에겐 무효한 얘기지만 그런 삶도 있다. 나 역시 비슷해서 오로지 현재를 위해 지출한다. 가령, 나는 보험이라는 차원으로 매일 아침 오메가3를 먹는다. 가끔 그 알약을 먹고 트림을 할 때마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바다표범이 내 입속에 혀를 쑥 밀어 넣고 프렌치 키스를 하는 것처럼 불쾌하다. 내 건강이라는 밑천을 지키기 위해 하루 세알 아침저녁으로 바다표범이 몸에 지닌 동물성 기름을 빼앗아오고 있다.

별다른 주목 없이 스쳐 지나간 영화 <미스터 노바디>

모든 결과가 내 선택에서 빚어진다는 점에서 보험은 결과를 일정 부분 감쇠하겠다는 지출이다. 일종의 책임회피행위다. 개인의 선택이 온전히 자신에게 보복되는 냉정한 사회에서 마음 기댈 곳은 사실 보험뿐인 것이다. TV에서 줄곧 방영하는 고금리 캐피털 광고는 서늘한 위협이다. 친구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손수 고기를 구우며 대접해봤자 돈 빌릴 구멍은 없다. 이런 혼자라는 무게감만큼 인생에서 선택이란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보험은 선택의 부담감을 같이 하는 선불형 어깨인 것만 같다. 어제 결제한 자동차보험도 마찬가지다. 새 노트북 하나 뽑으려고 쥐꼬리 월급에서 돈을 좀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수금해가는 자동차보험 덕분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아 이놈의 의무적 보험은 결제하고 나면 배가 아프다. 막상 거금을 들여 일백만 원을 일시불로 결제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보험사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이 마음에 쓰인다. 내 성격상 차를 빠르게도 멀리도 복잡하게도 몰지 않는데, 굳이 이 자동차보험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사고가 나지 않은 1년을 축복하며 기꺼이 천지신명께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

영화 미스터 노바디(2009, Mr. Nobody)를 극장에서 보며 인상적인 발상에 몸이 나른해졌다. 영화관을 나서면서부터 오히려 더 많은 상념들로 머릿속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은 니모라는 9살 꼬마다. 니모는 영화의 시작부터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어느 시골의 기차역, 니모의 부모는 이제 막 이혼을 한 상태다. 두 사람은 니모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어머니와 살겠느냐, 아버지와 살겠느냐. 니모는 고심한다. 이 선택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극명하게 갈릴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미래를 상상해보는 니모. 니모가 상상한 미래들이 영화 속에서 펼쳐진다. 9살 꼬마답게 어느 미래는 SF 공상과학 영화처럼 보이고, 어떤 미래는 홍상수의 영화처럼 지리멸렬한 인생의 한 귀퉁이를 그리기도 한다. 사랑을 마주치는 특별한 순간과 어그러지는 얼굴을 마다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도 뇌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니모의 선택에 따른 3가지의 갈림길이 3명의 여자를 만났을 때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우리 부모님의 말처럼 남자는 여자 잘 만나야 인생이 핀다는 것을 증명하듯, 니모는 어떤 여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점철되는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다. 찰나의 순간 그리고 결정의 직전 그 순간에 말이다. 영화는 어떤 선택이 옳았고, 어떤 선택이 그릇된 것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9살 꼬마의 상 상답게 이런저런 인생이 다채롭게 우주의 원리대로 동작할 뿐이다. 니모는 중얼거린다. “모든 삶이 진짜요, 모든 길이 올바르다.” 이 말은 곧 어린아이의 상상 속으로 존재하던 서사를 현실의 길거리로 불러내 온다. 내가 택한 인생의 선택지 외 다른 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본 영화로는 기네스 팰트로의 <슬라이딩 도어즈>나 매즈 미켈슨의 열연이 돋보인 <더 도어>와 같은 영화도 있다. <미스터 노바디>가 좀 더 특별한 이유는 모든 선택지의 가능성이 주는 다중 우주의 세계들이 결국 정답이 없는 그 가능성 자체만으로 인생은 풍족해질 수 있다며 긍정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만든 <토토의 천국>, <제8요일>의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이라면 보험을 드는 삶을 경멸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닥쳐질 모든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낄 시간에 모든 가능성의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으니까. 결국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존재할 뿐이지만 말이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낙엽에 물든 광화문을 떠올렸다.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서촌 앞의 한 커피가게에 앉아있다. 근처 사라진 시네코드 선재를 추억하며 그곳에서 보냈던 영화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20세기 초 소련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흰 캔버스에 네모 하나를 그려 미술 전시에 출품했다. 그는 이 도발적인 작품을 통해 초현실주의, 추상미술 그리고 현시대의 모든 예술가들에게 다른 차원을 선물했다. 과거 관람자가 구상했던 시점은 사라지고, 비구상의 영역에서 무의식이 마법을 부릴 수 있도록 그는 색감과 질감, 의미부여 및 내면의 독백으로 관람객을 인도했다. 어쩌면 영화 미스터 노바디의 키는 바로 이 무의식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생의 길 삼라만상 속 우주엔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 모두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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