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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2. 2016

예술과 거짓말의 간극

영화 <양치기들> 그리고 <애니멀 타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배우 이준혁, 영화 <애니멀 타운>


얼마 전 <라디오스타>의 재방송을 보는데, 배우 이준혁이 과거 무명시절의 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공중파에서 가장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에 나와 우스꽝스런 개인기를 선보이는 저 배우. 어디서 봤더라? 아 그 이준혁이 맞는가야? 이런저런 말들을 하는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다 보니 이준혁을 처음 본 기억이 떠오른다. 기괴하고 어두운 영화를 만드는 '전규환' 감독이 만든 작품 <애니멀 타운>. 성적 장애와 강박증을 가진 택시운전사(이준혁 분)가 주인공이었는데, 늘 자제하려고 자신을 옥죄지만 나사는 풀리고 통제되지 않는 짐승이 되어 도시를 폭주한다. 전규환 감독의 타운 3부작(댄스 타운, 모차르트 타운)이 다 엇비슷하지만, 그중에서도 <애니멀 타운>이 가진 서울 주변부의 썩은 병폐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날 사로잡았다. 아스팔트에 죽은 멧돼지의 이질적인 이미지처럼, 도시 안의 기괴한 사건들이 품은 맥락을 짚어내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이 작품 이후 이준혁은 충무로에서 꽤 알려진 조연으로 활동한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작은 역할로 참여해 얼굴을 알렸지만, 난 이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애니멀 타운>의 눈 풀린 성범죄자와 명품 조연으로 불리는 코믹한 이미지의 이준혁은 전혀 매칭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애니멀 타운, Animal Town, 2009

이준혁은 무명의 연극배우 시절, 돈이 궁할 때 게임 속 모션 캐릭터 연기를 통해 생계를 이어나갔다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배우로서는 살아야겠고, 그 유사범위 안에서 뭔가를 찾다가 택한 직업이었다. 생계와 예술은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한쪽 편에서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고색창연한 의미가 부여되고, 한쪽에서는 돈벌이도 안되며 생계라 불리는 어둠이 있다. 그 얇은 막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는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영화 양치기들, The Boys Who Cried Wolf, 2015


독립영화인 <양치기들>에도 이준혁과 비슷한 선택을 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완주(박종환 분)라는 남자는 한때 주목받았던 배우였지만 지지부진한 작품 활동에 밥 먹고 살기도 쉽지가 않다. 그러던 중 선배 연출자와 마찰을 일으켜 한순간에 백수가 된다. 빈둥대며 이곳 저곳을 들쑤시던 중 친구의 제안으로 심부름센터에서 일하게 된다. 그의 일은 '일종의 연기'를 하는 것이다. 완주는 의뢰인이 지시하는 역할로 분해 애인, 가족, 오빠 등 닥치는 대로 연기를 해나간다. 

그 역시 예술의 우회로를 찾아 일종의 유사 연기로 살을 연명하는 것이다. 문제는 흥신소가 늘 그렇듯 범죄의 영역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들을 잃었다는 어머니의 간청에 살인 목격자로 사칭하고, 과거 자신의 팬이었던 여성의 남자 친구 역할을 하지만 그녀는 실종된다. 그 역시 배우로서 대중 예술의 영역에서 쫓겨나, 결국 현실 속의 배우가 되었지만 그것은 범죄였다. 

<양치기들>에서는 제목과 같이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을 낳아 결국엔 인물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작품엔 '박종환'이라는 익숙한 듯 익숙지 않은 배우가 등장한다. 연출은 의도적으로 완주(박종환)의 표정을 클로즈업 해 곤란함과 불안이 뒤섞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잦은 클로즈업은 배우에게 온전히 작품의 다소 들뜬 감정선을 의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박종환'은 없는 자의 생활연기를 능숙하게 해내 내 눈길을 끌었다.

양치기들, The Boys Who Cried Wolf, 2015

영화의 김진황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거짓말에 관한 영화라 말한다. 윤리적 측면에서 예술의 영역과 현실의 세계에서 거짓말은 다른 대우를 받는다. 완주는 늘 생계에 절절거리며 수습하기에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이다. 극의 대단원이 없는 현실 범죄의 구렁텅이에서 그는 진심으로 연기하고 있다. 하지만 연극에서와는 다르게, 예술의 영역에서 보였던 몰입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한다. 그건 의례 범죄영화가 강조하는 윤리와 죄의식의 영역이 아니다. 먹고살고자 했던 행동들을 대해 사회가 그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항거이다. 이 사회의 복지, 범죄수사, 예술의 영역은 권력이 없는 자에게 안착이라는 안온함을 제공하지 않는다. 끝없이 밀어내는 폭탄돌리기처럼 완주는 이곳저곳에서 내처진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Jodaeiye Nader Az Simin,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2011

      

내가 좋아하는 거짓말에 관한 영화 중엔 아시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있다. 우리가 아는 이란이라는 국가를 떠올릴 데 느껴지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지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회드라마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나데르 부부는 별거 중이다. 치매인 아버지를 두고 출근할 수 없었던 남편 나데르는 아버지를 돌봐줄 가정부를 고용한다. 임신 중인 가정부는 나데르의 아버지를 침대에 묶어두고 잠시 외출을 한다. 그 사이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데르는 가정부를 해고한다. 그 과정에서 가정부는 충격으로 유산을 한다. 가정부는 나데르를 살인죄로 고소하고, 법정에서 만난 두 사람의 폭로와 거짓말이 상황을 혼란스럽게 한다. 누가 거짓말이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관객조차 모르는 상태. 임신한 사실을 알았는가. 폭언과 물리적 가격으로 유산에 이르게 한 원인을 제공했는가. 가정부는 정말 아버지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었는가. 각가지 증언은 각자의 사정에 맞게 윤색되어 진실을 혼탁하게 한다. 극은 두 사람의 진실공방을 통해 앎과 관계의 본질을 파고드는 윤리의 장으로 변모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2011

결국 이 복잡한 사실관계와 플롯의 구조를 폭력적으로 요약하자면, 모든 이들에게는 각자의 윤리관이 있고, 그것을 지키려 최선을 다해봤자 갈등은 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각각의 서로 다른 윤리가 충돌하여 벌어지는 부조리극은 세상 어디에나 흔해빠졌다. 결국 그 상황에서 인물의 선택만이 변별력을 가진다. 이혼 위기에 있던 남자 나데르는 이 사건으로 가족과 멀어지고, 가정부는 개인의 종교적 신념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진실이 한 가지일 수 없듯이, 인간 행동은 서로 다른 가치판단 안에서 파열한다

한 인간이 누군가를 살해했을 때, 그가 PC 게임을 자주 하는 인간이라고 해서 게임을 소멸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실의 형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진실은 늘 의구심만 주조하는 복합체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성 속에서도 애매모호하다. 순간의 흥분으로 임신부를 밀친 나데르나, 잠시간의 오판으로 살인의 목격자를 자처한 <양치기들>의 완주처럼 자신이 믿던 가치를 행하지 않는 것도 인간이다. 현대의 지성은 자신의 지식과 믿음이 단단하다고 믿겠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은 늘 깨지기 쉬운 유리를 쥐고 불안에 떤다. 그럴 때 카메라는 인물에게 다가간다. 표정을 살피고, 그들의 할 대답에 귀를 기울인다. 슬그머니 접근해 들어가 그들의 곤란을 스크린에 전시한다. 영화가 현실보다 매혹적인 건 객석의 내가 그 상황에 있지 않다는 안도감이고, 극장 밖을 나서면 그들에게 어리석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권리 덕분이다. 

우리는 영화와 소설 속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인물을 만나면 그와 동조되기보다는, 그를 평가하고 타자화되려고 하는 것도 때문이다. 피고가 아닌 판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내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숱하게 읽어낸 문학과 교양서가 내게 보다 현명함을 줄까. 내가 가지고 태어난 본연의 인성은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영화는 고민의 영역이고, 현실은 리허설 없이 다 한 번으로 끝이 난다. 참을 수 없이 부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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