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Oct 01. 2016

예술로 덮은 삶의 참담함

영화 <마지막 4중주> 그리고 니체와 쇼펜하우어

오래된 미학 수업 공책을 들여다보며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이란 삶의 참담함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는 그저 수단으로써 예술을 정당화한다. 과거 미학 수업에서 쇼펜하우어의 미적 염세주의를 들었을 때, 머리에 스파크가 온 듯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오로지 예술만이 삶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도피처라는 통찰. 그 당시 대학 기숙사 방에서 뒤늦은 중2병을 앓고 있던 나로서는 니체가 쇼펜하우어에 관해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 역사상 가장 엄청난 심리학적 날조'라 비난한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독을 찬양한 쇼펜하우어의 경구들을 사랑한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초상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공부하고야 비로써 쇼펜하우어의 미적 염세주의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다. 귀가 얇은 나는 이 소리 저 소리에 휘둘린다. 미를 대하는 태도는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니체가 주장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삶의 빈곤이 아니라 삶의 흘러넘치는 기분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술을 하나의 도피처로 생각했던 염세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해석이다. 니체에게 삶은 모순 투성이의 공간이다. 약자는 삶에서 고통의 근원만을 느끼고, 강자는 반대로 활동력과 생산성을 긍정하게 된다. 니체는 삶을 위해 영원한 파괴와 창조의 과정을 인정하고 긍정한다. 강자의 생산과 약자의 고통은 양면의 날이다. 고통이란 창조의 수반되는 과정이고, 강자의 완전성도 새로운 창조를 위해 파괴된다. 니체는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을 향한 의지.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너무 긍정적인 해석인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도 결국 미적 활동 상태의 완전성이 도피라고 하지 않았던가. 도피 행위의 끝엔 역시 고통이 수반된다. 어쩌면 니체의 디오니소스와 염세주의 역시 같은 말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결국은 삶의 태도의 문제다. 시시해빠진 결론으로 빠질 생각은 아니었으나 스스로 그렇게 의식했다. 나쁜 점 위주로 세상을 보는가. 혹은 좋은 것만 보려다 보니 나쁜 것 역시 완벽한 창조를 위한 과정으로 이해시키는가. 긍정의 힘이 발휘되어야만 니체의 디오니소스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어느 누군가는 쇼펜하우어의 그 염세주의에 깊은 공감을 표하겠지만, 현재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위상을 살펴보면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니체의 시각에 동의를 표함을 느낄 수 있다.

호흡과 절정, 그들에게 균열이 갔을 때 운율은 무너진다.

영화 마지막 4중주 : 죽음과 고통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언급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한 이유는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크리스토퍼 월큰을 비롯한 명배우들이 공연한 이 작품이 강렬하게 내 뇌 중추에 새겨졌다. 그리고 노년과 사랑의 열정이라는 지점에서 망설여지는 삶에 대한 결론 역시 묵묵부답이다.

줄거리를 요약해보자면 결성된 지 25주년이 된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 ‘푸가’는 영화의 시작부터 멋들어진 연주를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그룹의 리더이자 그들을 가르쳤던 대부 피터(첼리스트, 크리스토퍼 워컨)가 파킨슨병으로 더 이상 연주할 수 없게 되자, 팀원들 간의 묵었던 갈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인간적인 갈등은 무척 흥미롭다. 4명의 관계 안에도 시기, 질투, 연민, 동정, 분노, 증오가 만연해 오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팀에서 제1 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다니엘(마크 이바니어), 그리고 부부인 제2 바이올린 로버트(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와 비올리스트 줄리엣(캐서린 키너)은 연이어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에 방향감각을 상실한 체 다가오는 공연 날짜를 기다린다.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토록 많은 갈등이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사람들은 리더의 질병 혹은 팀에 변화를 가져다줄 중대한 사건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갈등의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25년간 최상의 케미스트리를 지켜왔던 이들이 리더의 병을 빌미로 낯선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친구의 딸과 잠을 잔다. 남편에게 막말을 하며 걸레 보듯 대하고, 열등감이 사무쳐 너를 증오하겠노라고 공표한다. 삶의 진통이 절절하게 스크린 밖으로 전달돼온다.

곡진한 감정연기를 보여준 크리스토퍼 웰켄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는 건가. 푸가는 영원히 해체되는 것인가. 장시간의 연주로 어렵기로 소문난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은 물 건너가는 건가. 그렇지 않다. 진짜 제대로 된 소리는 이제부터다. 우리에게 닥쳐온 삶의 거센 고통은 더 나은 예술을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니체 말대로라면 분명히 그렇다. 그리고 예술은 이 고통스러운 지리멸렬 속 인생의 유일한 도피처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라면 역시 또 그렇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든 염세주의에 휩싸인 인간이든지 간에 음악이란 그렇게 서로 다른 인간들의 갈등을 헤치고 겪어 나가 결국에 최상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인간 예술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극장에서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을 들으며 그간의 인물들이 겪었던 모든 갈등들을 마음속에 봉합한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연쇄된 질문에 대한 지연 행위이고, 대답할 의도가 없음을 명백히 하는 도피의 선율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에 의하면 특정 ‘예술’에 대한 선호는 대체로 학력 자본과 출신 성분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음악’적 취향만큼 한 사람의 계급을 분명하게 확정해주고 분류해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정신적 깊이를 가늠하는 가장 고도의 예술이 바로 음악이라는 주장이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하나의 무대로 시작하여, 다시 또 다른 무대로서 끝이 난다. 우리는 극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이 고도의 예술을 느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인간들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다시 무대를 감상한다. 좀 더 나아졌는가? 예술은 더 농익은 모습을 드러냈을까? 예술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것을 이겨나가는 인간상의 구현을 통해 우리는 좀 더 나은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든 너무나 멋진 영화적 결말이 아닌가.


작가의 이전글 지루하지 않은 과학교양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