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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3. 2016

나는 왜 이야기에 투신하는가

<인 더 하우스> In the House, 2012 감독 프랑스와 오종

요즘 매일 카페를 간다. 날씨는 덥고, 몸은 처진다. 이럴 때 카페만큼 시원하고 와이파이가 잘 터지며, 늘상 아메리카노가 제공되는 장소가 어디 있을까. 요즘처럼 불쾌지수가 올라갈 땐 영화관을 가는 것도 좋지만, 카페에 앉아 서스펜스 넘치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게 좋다. 장시간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몸이 쑤신다. 졸린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옆자리에 앉은 귀요미를 스캔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김없이 낯선 놈들과 눈이 마추쳐 어색해진다. 좀비라도 본 듯 얼른 마주치던 눈을 피하고, 다른 이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왕이면 옆자리 긴 머리의 여성이 좋겠다. 지금 막 들어오는 땀에 젖은 셔츠를 입은 고등학생들을 보면 옛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한다, 그들의 일상을 상상한다. 겉으로 보이는 밝은 우주에 감춰진 그들 나름대로의 속사정을 떠올린다. 그들의 집 그리고 그들의 가족. 풍성해지는 상상과 다르게 늘어지는 일상에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간다. 생각과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야기는 내 전두엽을 장악한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난 오늘도 카페를 찾아 소설 속에서 피서(避暑) 중이다. 소설이라면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 볼 수 있고, 이루지 못한 욕망을 쟁취할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을 나와 접신시켜 오늘도 이야기 속을 걷는 것이다.

영화 인 더 하우스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영화 <인 더 하우스>를 봤다. 오종의 영화는 사람들이 ‘이야기’라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캐치하고 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문학작품과 싸우며, 그토록 수많은 돈을 지불하여 영화를 보는지에 대한 자문자답이다. 난 왜 오늘도 카페를 찾아 소설을 읽고, 옆자리의 그녀를 상상하는지 오종의 영화에서 답을 구한다. 프랑스와 오종의 전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무래도 <스위밍 풀>이다.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포스터에 적힌 문구를 나는 기억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진...” 내가 왜 이 문구를 기억하냐면, 이 영화를 이 문구 하나만 보고 관람했기 때문이다. 이 문구에는 그녀가 있고, 평범한 일상을 종식시키는 어떠한 사건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 지친 일상을 깨뜨려줄 그녀(욕망)가 영화 속에 있다는 것을. 수영장에 드러누운 섹시한 금발의 여성과 그 젊음을 탐하는 소멸 직전의 노 작가. 그리고 그들은 같은 집(하우스)에 있다. <스위밍 풀>은 마치 우리는 왜 이야기를 욕망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실험 표본이 되어준다.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들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훌륭한 이야기란 당신이 가보지 못한 곳을 대신 찾아주는 대리인이라는 누군가의 정언처럼 명징하다.  영화 <인 더 하우스>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액자식 구조로 진행된다. 우선 한때 작가가 되길 원했던 무기력한 문학 교사 제르망이 등장한다. 그는 학생들의 성의 없는 작문 과제를 보며 혀를 끌끌 찬다. 지난 주말에 무엇을 했느냐 묻는 작문 과제에 단 두 줄로 답한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지난 일요일, 나는 피자 먹고 TV 보고 놀았다” “토요일 부모님에게 스마트폰을 빼앗겨 화가 났다” 이런 핵노답 글들을 보며 제르망은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던 순간 제르망의 눈을 완전히 빼앗는 글을 발견한다. 학교의 맨 뒷자리에 앉아 언제나 조용히 수업을 듣던 학생 클로드의 글이 그것이다.

문제적 감독 프랑스와 오종

클로드는 친구 ‘라파’의 집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과제로 적어낸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이야기 속에는 마치 프랑스와 오종의 영화적 작법을 고스란히 적용한 느낌이다. 클로드가 그린 라파의 집 안에는 그녀가 있고, 특정한 사건이 있다. 그리고 역시 클로드와 제르망 두 사람의 지치고 힘든 일상을 깨뜨려줄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가 신나게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클로드는 작문 숙제 마지막에는 ‘다음에 이어진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야기를 갈망하는 제르망을 완전히 제압하는 문구다. 권태로운 일상의 제르망은 한낱 고등학생의 어쭙잖은 성적 욕망에 완전히 자신을 투영시킨다. 친구의 엄마와 섹스를 하고 싶은 소년의 이야기에 빠져버린 것이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보며 이렇게 묻는다. ‘당신 그거 알아? 그 아이의 글을 읽은 후부터 나랑 섹스를 안 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이것은 결국 이 영화를 보는 내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재밌는 이야기를 갈망하는 인간들을 보며 조롱하듯 또 다른 이야기를 액자 안에 욱여넣은 프랑스와 오종의 이 치열한 재기를 보라. 좋은 이야기에는 언제나 우리가 그리는 욕망이 그리고 우리의 결핍한 일상이 존재한다. 그 집 속에 무엇이 있기를 바라는 상상력이 공존한다. 그래서 인 더 하우스는 완벽한 조건을 지닌 이야기의 창을 통해 독자를 매료시킨다. 이야기를 갈구하는 자들을 작가가 요리하는 장면이 통쾌하다. 스크린이라는 창을 통해 이야기라는 집을 보는 관객, 책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 소설 속으로 헤엄치는 독자, 허구의 이야기의 창을 통해 상상력을 나부끼는 화자. 그리고 영화 속 어느 한적한 공원에서 낯선 집의 창문을 보며 이야기를 상상하는 영화 속의 제르망과 클로드. 이 모든 것이 이 영화의 명징한 주제이자 이야기의 영향력이 아닐까.

현실과 이야기의 간극엔 지리멸렬한 일상이 있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인터뷰 시리즈를 읽었다. 뉴욕의 문학 매거진 파리 리뷰에 실린 거장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이 인터뷰를 읽는 재미는 작가라는 인간들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일상을 어떤 방식으로 압박하는지 보는 데 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트럭에 앉아 속 썩이는 마누라와 아이들을 피해 이야기를 썼다. 들끓는 이야기를 억누르고 펜으로 꾹꾹 눌러쓰는 그를 상상해본다. 언젠가 카버는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했다고 한다. 자신이 들어서지 못했던 그 영역을 상상한 소설들이 자주 눈에 띄는 이유다. 권태와 위태로움이 가득한 시간들을 보낸 늙은 작가는 끝내 <대성당>이라는 걸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마지막까지 남은 건 이야기뿐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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