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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독서 편력

소설 <생의 이면> 이승우 저,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by 박민진

소설 <생의 이면>, 이승우 저


처음 책장을 열 땐 늘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급하게 덮어버리는 난 교무실 문을 열 때처럼 조심스럽게 책과 만난다. 첫인상이, 첫 장의 느낌이 이 책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벼운 소설집이어도 처음 펴 들어 읽은 몇 마디의 문장으로 난 섣불리 책을 판단한다. 온몸의 감각을 열고 작가의 문장을 공들여 받아들인다.이승우’ 작가의 장편소설 <생의 이면>은 나와 그렇게 서툰 이별을 했다. 소설은 작가 박부길의 '삶의 과정'을 쓰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한 작가가 이를 청탁받아 박부길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작품을 뒤지고, 그와의 짧은 인터뷰를 통해 일대기를 구성하는 것이다. 난 이 액자구조의 소설에서 그 어떤 흥미도 읽어내지 못했다. 우선 문장이 지나치게 딱딱했다. 내가 보기엔 사어에 불과한 반복의 구조가 여기저기서 눈에 띄어서 진행이 더뎠다. 사유의 강도가 너무 심해서, 그걸 이해하느라 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이 소설의 대상이 되는 박부길이라는 사람의 인생 자체가 궁금하지 하지 않았다.

이승우 <생의 이면>

어두침침한 표지와 형이상학적인 그림이 그려진 표지의 이미지도 한몫했다. 어쩌면 생의 이면이라는 제목 자체가 날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의 정면도 보기 급급한데 이면까지 보긴 좀 힘들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대체 편집자는 왜 이런 어려운 소설 제목을 용인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쩌면 어떻게든 생의 이면을 보려는 이들만이 이 책의 복잡 대단한 세계로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걸까. 하드커버의 딱딱한 <생의 이면>이 우리 집 책장에 꽂혀서 그 누구도 찾지 않게 된 이유는 이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책장에 늘 꽂혀 있는 이승우의 책이 좋았다. <생의 이면>은 날 근사한 문학청년으로 느끼게끔 했다. 언젠가 이 이야기와 만날 나 자신을 생각하며 나이를 먹었다. 어쩌면 책 중에는 소유가 주 목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데코의 목적으로서의 책이랄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몇몇 책들이 그런 목적에 부합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 역시 저서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비슷한 얘기를 한 바 있다. ‘읽지 않아도 읽은 것처럼 말할 수 있는 책’, 아니 왠지 읽었어야만 한 것 같아서, 읽을 때면 주변에 ‘어 그 책 다시 읽는 거야’라고 말하는 책이 고전문학이라고 했다. 이런 책들의 특징은 오로지 그 책 주변에 떠도는 얘기만으로도 다른 이와 소설에 관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줄거리를 몰라도 의례 뛰어난 문학에 따라붙는 몇몇 일화를 통해 책을 섭취하는 것이다. 난 이것도 독서의 일종이라고 믿는다. 그 존재감만으로 문학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하나의 경로일 것이다.


다시 <생의 이면>으로 돌아오자. 이것은 사회 부적응자의 소설이자, 연애 무능론자의 소설이다. 박부길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인데, 주변에 있으면 딱 피해야 마땅한 녀석이다. 어두침침한 방에서 온갖 책을 독파하여 세상을 이해하지만, 정작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따귀를 갈기는 극심한 열등감의 소유자. 거기에 종교적 콤플렉스와 어려서 부모에게 버려진 상처가 온 얼굴에 상처처럼 드러난 남자다. 난 소설의 박부길과 함께하면서 한국사회를 말할 때 일종의 레떼르처럼 붙는 화합, 동지, 우리라는 단어가 불편해졌다. 혼자일 때 스스로 안정감을 찾는 개인주의자가 살아가기 힘든 곳으로 보였으니까. 거의 카운터 펀치로 박부길은 연애에 관한 불능까지 달고 산다. 이건 이승우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주요 원인이기도 한데, 여자에 대한 환상을 모성애(어쩌면 성모 마리아처럼)의 부재와 엮어 생각하니 발전적인 연애가 될 리 없다. 아니 사랑하지 않은 소설에서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종교적 경험의 테두리로 몰아넣는 구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냔 말이다. 거기에 주인공은 친구조차 버거워한다. 그에게 종종 등장하는 친구들은 어떤 이상향의 모델로서는 의미를 가지나, 주요 인물로서 그와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절대적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은인이기도, 못된 악당일 수는 있지만 끝내 대상화되어 소비되고 있음을 스스로 시인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소설을 읽었다. 올해 어떤 마음이 생겼는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책을 붙들었다.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몇몇 순간들을 뒤로하고 끝까지 달려 나갔다. 책장을 덮을 때마다 늘 개운치 않은 마음이 들었지만 분명한 이야기의 매혹이 있었다. 내가 나이를 먹었나 스스로 되묻기도 했지만, 어쩌면 박부길이라는 남자에게 내게 있는 몇몇 공통점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 이 책을 읽어 나갈 때는 늘 힘에 부쳤다. 그 이유는 늘 박부길과 내가 다른 것이 마치 같이 대화하기 싫은 친구와 동행하는 기분 때문이었다. 군대 훈련소에서 말을 섞기 싫어도 늘 같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근데 서른이 넘고 박부길을 다시 보니 나와 꽤 닮은 녀석처럼 보인 것이다. 그건 늘 책과 혼자 있는 시간에서 안정을 찾고 있음을 보았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나 역시 그처럼 노골적인 부적응의 티를 내고 싶으나,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룰에 굴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그의 지나친 부적응을 하나의 쾌감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이 복잡 대단한 도시에서 스스로 테두리를 치고 어둠으로 침잠하는 것에 묘한 개운함을 느꼈다고 생각해본다.


세속적인 것이 없는 인간이 과연 매력적인 화자가 될 수 있을까. 박부길은 그런 의문을 조금은 해소시켜주는 사람이다. 그는 세속 밖에 것에서 스스로 속되지는 이상한 사람이다. 스스로 자신의 속된 것을 경멸하면서도 세상의 세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자신의 부적응에 대한 변명 대신, 나나 그들이나 다를 것이 없는데, 내 방식이 좀 더 편하다는 정도의 인식으로 보인다. 다들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라는 이런 인식에는 종교마저 예외일 수 없다. 지극히 종교적으로 보이는 <생의 이면>에서 신의 숭고함, 영적 경험의 구원 같은 개념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건 읽는 이의 마음이 아닌, 작가가 의도적으로 심어 놓은 ‘갈 곳 없는 박부길’의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는 교회당 안의 인물에게는 좀 더 너그러운 시선을 가지고 있다. 신을 향한 구원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교회 안의 안온한 분위기와 사람들의 친절함을 그리워한다. 그가 자신을 키워준 큰아버지의 집을 나와서 그가 정착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도 인상적인 지점이다. 그곳에서 성가대에서 피아노를 치는 첫사랑도 만나고, 자신을 지원하려는 어머니의 온정을 차단하는 곳 역시 교회 앞이다. <생의 이면>이 종교소설도 읽히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자장을 피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부분에 있다.

어려웠다. 그걸 피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읽는 게 느리거나, 탄력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시대의 변화를 가장 늦게 체감하는 자가 겪는 모진 깨달음과 같은 필연적 어둠이 있지만 그렇다고 공감할 수 없는 먼 거리의 정서는 아니어서 멀리하고 싶지 않았다. 이 글에서 몇 가지 지문을 인용하고, 그것의 느낌을 말한다고 내가 가진 이 책을 향한 애착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오히려 더 멀어질 것이다.) 그저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책을 거쳐버린 나는 읽기 전의 나와 도드라지게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박부길이라는 인물을 체화하는 과정을 거친 결과로도 보이는 이 체감은 이 소설이 가진 위력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6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6


최근 본 영화에서 박부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한 사람을 만났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김민희가 맡은 ‘여배우’는 불륜으로 인해, 아니 그럴 수도 있고 다른 이유일 수도 있는 이유로 해외에서 체류 중이다. 그녀는 외국에서 늘 그 남자를 기다린다. 그 남자는 단편적인 정보로 추측해 보건대 감독이자 유부남이다. 외국에 하나뿐인 지인과 공원을 산책하는 그녀는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싶다고 호소한다. 그 남자를 기다리고 그리워하지만 그녀는 책고 함께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려서 공부가 부족했고, 지금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이제야말로 공부를 하며 책을 가까이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녀 역시 세상에 버려지고 상처받은 사람이다. 늘 같이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혼자임을 느끼고, 담배와 서글픈 노랫말 속의 눅눅한 우울함을 달고 산다. 그녀는 잠시 한국으로 돌아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동해 바다 앞에서 술을 마신다. 그리고 꿈도 꾸고, 성질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꿈일지도 모르는 곳에서 책을 한 권 선물 받는다. 그녀는 그 책을 잘 몰랐지만, 무언가 대단한 위로를 받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끝내 혼자 걸어서 스크린 밖으로 사라진다. 괜찮다고 이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객실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둘 다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난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에 몸을 맡겼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의 얼굴, 어깨 그리고 젖은 손에 키스할 때, 그때 우리는 정말 불행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고, 사소한 것이고, 기만적이었는지를 때 닫게 되었습니다.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 중

독서는 내가 가진 가장 순수한 취미다. 그것도 삶의 가장 최전방에서 스스로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삶을 지휘하는 기분을 안겨준다. 나의 블로그를 구독해주시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매일 책에서 어마어마한 기쁨과 행복을 건져 올린다. 이승우의 <생의 의미> 같은 무거운 책이든,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등장하는 시집이든 상관없다. 내가 블로그에 감상을 적어내는 책 속엔 그 어떤 기준도 우열도 없다. 책 읽기는 내 학창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고, 앞으로도 내 영원한 가방 속 동반자였으면 좋겠다. 책을 향한 순진무구한 담론에 참가할 생각이 없다. 책의 무용론에 말을 보탤 필요도 없다. 인터넷 뉴스 댓글 란에 똥을 싸지를 필요도 없다. 책은 혼자서 쌓는 고독의 시간이며, 그걸 즐길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더없이 조화롭다.


표지 사진 : 밤의 해변에서 혼자, 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6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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