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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24. 2018

당신의 취향은 어떤가요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 짓기 La Distinction, 1978

월요일,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좀 걷다 금세 집으로 갔다. 몸이 말이 아니었다. 78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쓴 <구별 짓기>라는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우리가 취향이라고 부르는 건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이다.” 이 문장이 내 눈에 붙들려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누구나 자신의 취향을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한다.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입는지, 어떤 식당에서 무얼 보고 있는지, 지금 읽는 책이 무엇인지 낱낱이 오픈한다. 서로의 취향을 비교하고 그 우위를 점하기 위해 그 정도를 높여가는 경주가 빼곡하다. 자신이 스스로 낮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온라인에 풀지 않을 것이다. 이건 누가 봤을 때도 분명히 앞에 내놓을만한 고급 취향이라고 생각하기에 오픈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말한다. “출신 배경이나 학벌이라는 요인이 사회적 가치는 물론이고 예술에 대한 취향마저도 결정한다.” 내 취향이 나의 출신성분과 내가 살아온 이력을 말해주기도 한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2권짜리다)

내가 이른바 콤플렉스에 가까운 역부족을 느끼는 건 클래식 음악이다. 없던 관심이 갑자기 생길 리도 없거니와, 최근 부쩍 관련 책도 읽어보아도 그 복잡한 맥락 앞에서 갈피를 못 잡는다. 카라얀의 열정적 지휘에 맞춰 연주하는 음악을 유튜브를 통해 찾아들어도, 여전히 베토벤의 교향곡 넘버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 않지만, 전인에 대한 맹목적인 이상으로 고전 음악을 소비한다. 어떤 이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산다고 말한다. 난 이렇게 다시 고쳐 말할 것이다. 지적 열등감이 당신의 취향을 고양시킨다. 내게 남들보다 무언가 잘 모른다는 인식은 나의 지적 허영을 자극한다. 늘 책을 옆구리에 끼고선 내 열등감의 발현을 마주할라 짐짓 두려워한다.


화요일, 과거 누군가가 내 책장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그의 부탁은 결국 책을 좀 추천해달라는 요지였는데, 난 그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 누군가 내 가방 속에 있는 물건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면 난 순순히 열어서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난 책장을 보여주긴 꺼린다. 내게 책장은 내 속내를 비추는 투명 거울처럼 그 자체로 나 자신이다. 난 누군가와 몇 시간을 대화해도 그 사람을 대체로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책장을 본다면 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난 지하철에서 우연히 누군가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면, 그 책 제목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판단을 한다. 그건 근거도 미약하고 편협하기 그지없는 시각이지만, 나라는 사람이 가진 취향의 기준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읽는 책이 당신을 말해줄 것이다.

영화 <아가씨>의 비밀서재

내게 취향이란 맥락을 읽는 것이다. 이제 지식의 깊이와 넓이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다면 손 안의 검색으로 알아내고, 상식을 올리려고 일반상식 책을 통째로 외운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의 맥락을 아는 사람은 돋보인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다름의 취향을 주장하는 사람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 본 영화의 주연배우가 생각이 안 나 구글을 검색해서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 영화가 지닌 장르적 특성을 이해하는 덴 맥락을 짚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 시작된 것인지, 그것이 '누벨바그'인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향인지 판단하려면 그 맥락 속에서 맥을 짚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취향의 폭이 넓은 사람은 그만큼 하나의 예술작품에서 더 많은 재미를 찾아낼 수 있다.    


수요일, 키키 키린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요즘 바빠서였는지 한 주가 지나서야 그녀의 죽음을 알았다. 돌아가시기 전 최근까지 계속 투병생활을 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늘 밝은 모습만 보았기에 그녀의 웃는 얼굴만 떠올리는 난 죄스럽다. 일부 영화관은 그녀를 추모하는 영화들을 극장에 걸고 있다. 이 연휴에 한숨을 돌리고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주마등이라니, 요즘엔 그 누구도 말을 타고 환한 불빛을 스쳐 지나가지 않는데. 키키 키린 할머니라면 내 구질구질한 표현에 구박을 했을 테지. 조금은 뿌루퉁하고, 가끔은 얄미웠던 그녀의 말투가 무척 그립다

영화 <어느 가족>의 '키키 키린', 난 그녀를 이 영화에서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과거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 좁은 집을 밝히는 그녀의 능청스러움에 연신 감탄하며 영화를 보던 기억이 난다. 적당이 떼가 묻고, 난데없이 천진한 데가 있어서 정이 가는 할머니.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설탕물을 얼린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열심히 깨면서도, 아들의 가슴을 시큰하게 하는 잔인한 말을 내뱉던 우리 할머니. "떠나고 난 뒤에 그리워해 봤자 소용없어. 도대체 언제까지 잃어버린 것을 쫓아가고, 그렇게 살면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은데...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야"


목요일, 지난주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관한 글을 여럿 읽다 보니 엉뚱하게 김연아 생각이 났다. 2010년, 캐나다 밴쿠버의 새하얀 빙판장, 상기된 표정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아사다 마오’의 얼굴도 떠오른다. 우린 늘 냉철한 얼굴로 신기록을 달성하던 김연아를 기억하지만, 난 그 당시 일본의 기대를 저버리고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아사다 마오가 패배를 직감한 순간의 표정이 더 인상 깊었다. 경기가 끝난 후, 우리 국민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작은 소녀는 애처로운 얼굴로 은메달을 걸었다. 올림픽이 뭐라고, 금메달이 뭐라고.

환호성과 싸우는 그녀, 아사다 마오의 밴쿠버 올림픽 프리 스케이팅 직전

난 가끔씩 당시 올림픽 영상을 유튜브로 찾아보곤 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피겨스케이팅을 본 적이 없었는데, 경기 당일만큼은 사무실 작은 TV 앞에서 짝다리를 짚고 몰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내가 그 어떤 예술에서도 본 적이 없던 육체의 움직임이었다. 온 나라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감탄을 쏟아냈기에 내가 더 보탤 말은 없을 것이다. 그저 그녀가 입은 파란색 의상과 프리의 배경음악이었던 ‘조지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의 멜로디가 기억난다. 글렌 굴드의 전기를 보면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예술이 고양되는 순간은 육체적 움직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글렌 굴드의 굽은 등과 현란한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출 때, 그 장면은 피아노와 용해되길 원했던 한 예술가의 육체성을 목격한다. 액션 페인팅을 하는 잭슨 폴록처럼, 난 김연아의 곡예와 같은 움직임에서 한 예술의 궁극의 지점을 목도한다.


토요일, 어젠 오랜만에 예술의 전당을 다녀왔다. 한가람 미술관에서 '마르크 샤갈'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올 초 유럽여행 때 수많은 미술관을 다녔기에 감흥이 크진 않았다. 다만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장난기와 귀여움을 동반하기에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미술관에 들르기 전, 그의 인생 이력을 읽어보고 예술 사조를 읽으며 사전 지식을 쌓았다. 작품의 곳곳에서 몸이 붕 떠 있는 여인의 얼굴과 난데없는 말대가리의 등장이 눈에 띄었다. 천사는 공중에서 배꼽 없는 배를 드러내고, 큰 나무는 고향의 뿌리를 간직한다. 한 작가가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샤갈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밝은 감정을 표현하는 독창성에서, 그 캐릭터 구축 능력에서 발군이다. 거의 100년을 해로한 이 노인은 죽는 그 날까지 고향과 가족에 관해 수많은 그림과 글을 쏟아내며 행복한 자아도취를 만끽했다. 난 미술관의 수많은 인파들이 샤갈의 그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내심 궁금했다. 기억 속 그리움과 현재의 연인에 대한 애틋함을 그림으로 풀어냈던 이 화가의 기개에 퍽 감동을 받았을 거라 미루어 짐작해본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샤갈:러브 앤 라이프

일요일, 추석 연휴가 시작됐지만 난 거의 집에서 몇 분 안 걸리는 여의도에 머물고 있다. 연휴 속 여의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카페들은 텅텅 비어있어 독서를 위한 최적의 장소를 제공한다. 식당들은 거의 문을 닫았지만, 만두 같은 분식을 파는 가게들은 여전히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최근 여러 독서모임을 신청한 탓에 시간에 쫓기며 책을 읽고 있다.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게 독서를 한다. 무려 조지 오웰과 밀란 쿤데라, 장 자크 루소와 씨름하고 있다. 제한된 시간과 엄청난 양의 책들을 가방 안에 넣고 카페 안에 들어서면, 마치 창작의 압박에 시달리는 작가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음에 즐겁다. 낯선 타인과 몇 주 전까진 전혀 몰랐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의 틀을 벗겨내는 시간을 고대한다. 이 누추하고 부박한 삶에 잠시나마 지적 사유의 공란을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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