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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25. 2018

생의 기록이 없는 존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1961), 뮤리얼 스파크 저

명동이 예전만큼 부산스럽지 않다. 언제부턴가 골목마다 화장품 가게를 가득 메우던 그들이 이제 듬성듬성하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맵고 짠 음식들을 먹던 그들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살 것 같다. 어릴 적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씩 파마를 하러 명동을 찾으셨다. 아침에 꽃단장을 하시고 날 데리고 좌석버스를 탔다. 그녀의 부산스러움엔 기분 좋은 들뜸이 있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정류장에서 보이는 명동성당의 모습을 마주한다. 칼칼한 김치를 곁들인 칼국수를 먹고, 추운 날엔 길거리 어묵을 끼운 막대기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시간들. 첫 여자 친구를 위한 향수를 산 곳도 명동이었다. 인터넷 쇼핑이 사람들을 질식시키기 전, 특가를 외치던 외국 화장품 도매상들이 골목마다 즐비했다. 거금 5만 원을 주고 산 향수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핑크색 포장지로 싸인 그 상자를 들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간 2층 돈가스 집은 여전하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머니와 명동을 가지 않게 되었다. 그건 내 유년시절의 끝을 의미했던 걸까. 이후 이 곳을 버스로 지나칠 때마다 왠지 모를 그리움과 서글픔을 느꼈다. 기억날 듯 말 듯 기시감에 몸을 들썩였지만 어쩐지 가닿을 수 없는 손끝만 창문에 미끄러진다.     

영화평론계의 김연아,  시네21의 기자/작가 '김혜리'

생각으로부터의 도피


저녁 10시, 명동의 한 극장을 나서는 내 손엔 찢어진 영화표가 들려있다. 조금 흐리던 하늘이 야밤에야 제 색을 찾았다. 퇴근할 무렵 우연히 인터넷을 하다가 영화 <살아남은 아이>의 기사를 읽고 서둘러 명동역에 내렸다. 평일이었지만 객석을 가득 채울 만큼 북적거리는 상영관이 반가웠다. 한국 독립영화는 늘 텅 빈 상영관에서 몇몇 사람들과 서로를 의식하며 보는 게 일반적인데, 오늘 김혜리 기자의 시네마톡 때문인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화 평론계의 김연아(?)로 불리는 김혜리 기자는 종종 시네마톡을 통해 오프라인의 팬들과 마주한다. 그녀의 모든 저서를 읽은 나로서는 왠지 모르게 좀 불편하다. 그녀가 연재하는 씨네 21의 <영화의 일기>를 매주 지하철에서 탐독하는 난, 나 말고도 그녀의 팬들이 이렇게 많은 것에 심히 유감스러움을 느낀다.(심지어 인형을 선물하는 극성팬? 도 있었다.) 명동 거리로 나와서 그녀가 했던 몇 가지 화두를 복기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펄떡이는 생선에서 날카로운 가시를 발라내듯, 참혹한 전개를 가진 이야기에 능숙한 칼질을 하는 그녀의 화술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긴 시간 그녀의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내 생각은 모두 휘발된 것 같아 찝찝했다.

4년 동안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내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아침부터 줄을 서서 일류 강사의 강의를 목 빠져라 듣고 있으면 내 생각은 한 치도 할 수 없다고. 고시원 쪽방의 머리 하나 들어가기 어려운 창문을 마주한 아침부터 누군가의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기계의 일상. 곱창을 먹으며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소설 속 사이보그가 된 것 같다며 푸념을 늘어놓던 녀석. 그 친구는 작년 한 소도시의 9급 공무원이 되어 노량진을 잊고 산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그의 사고방식에 동조하게 되면 그 앞에서 엇나가는 생각을 하기 어려워진다. 녀석에겐 공무원 학원의 쪽집개 강사가 그랬고, 내겐 몇몇 작가가 내 생각의 갈피를 잡았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고 했다던데, 내 생각에 누군가의 글을 반복적으로 읽으면 그 작가의 생각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마치 종교처럼 그가 가진 사고의 틀에 내 생각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우선 나 스스로 창의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없기에 편하고, 반복해서  눈뜬 이의 장광설도 성경의 한 구절처럼 ‘오 지저스’ 하게 된다. 난 그걸 텍스트의 주술적 힘이라고 믿는다.

소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1930년대 스코틀랜드의 한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뮤리얼 스파크 저, 1969년작)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읽었다. 미국과 영국의 대중들에게 꽤 알려져 있는 소설이나, 국내 독자들에겐 비교적 생소한 작품이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마르시아 블레인(Marcia Blaine)이란 사립 여자 중·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인 진 브로디 선생의 영향력 아래 있던 아이들은 그녀의 삶을 추종한다.(아니 진 브로디가 그렇게 믿는다) 진 브로디 선생은 일부 아이들을 휘하로 거느리고 ‘브로디 그룹’이라 명명한다. 자신을 늘 전성기(The Prime)라 자칭하고, 교육을 학생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따라야 하는 수직적 관계로 본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천박한 경쟁주의


학창 시절엔 그 울타리가 작아 매일 만나는 친구와 담임교사가 가진 영향력이 엄청나다. 폭력적으로 말한다면 학창 시절 친구와 선생님을 제외하면 우리가 영향을 받는 이가 얼마나 될까. 진 브로디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학창 시절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의 다른 이름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연인을 잃었고, 그에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한 체 사회에서 버려진 약자 진 브로디. 하지만 그녀는 굽히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신여성으로 살아간다.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 개선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던 시절. 진 브로디는 보수적인 영국의 중산층 학생들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녀의 급진적 사고는 전통을 타파하려는 사회적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 학창 시절의 '그'처럼 막 사춘기에 들어선 학생들에게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 교육의 보수화가 가진 병폐들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낸다. 그녀의 급진성은 가령, 옳은 길을 위해서 속임수 정도는 눈감을 수 있다고 말하며,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대한 사상적 목소리를 거리낌 없이 표출한다. 아직 파시즘에 대한 사회적 유효기간이 끝나지 않은 시절, 폭력을 통해 세상을 구출할 수 있다고 믿는 선동가들이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녀는 이른바 큰 가치를 위해서라면 작은 가치들을 뭉개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가령, 자신이 '브로디 무리'라고 칭하는 학생들의 모임에 열등한 학생을 일부러 끼워 넣는 식이다. 그로 말미암아 학생 간의 우월성을 자극하여 추친력을 얻는 천박한 경쟁주의이며, 낙오자는 버리는 지극히 계급적인 사상을 보여준다. 다른 학생들 역시 진 브로디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역할을 부여하고(물론 실패한다) 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관리하는 식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을 위해 거치적거리는 눈엣가시는 치워 마땅한 것이다. 이는 나치즘의 원리인 골상학과 유사하며, 히틀러의 몰락과 진 브로디의 말년을 유사하게 묘사하는 것도 작가의 의도로 읽을 수 있다.

영화<미스 진 브로디의 전성기>, 여학교 처녀 선생의 현재를 즐겨야 한다는 태도는 전통을 타파하던 당시의 윤리관과 잘 맞아떨어졌다.

이 소설의 백미는 동료 남자 교사들과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진 브로디의 사랑이다. 유부남 선생과의 금지된 연애를 위해 자기 학생을 대리로 내세우는 파격성이나, 육체적 관계를 맺지만 결혼은 하지 않다가 배신당하는 그녀의 처지는 통속과 파격을 오고 간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소녀들이 섹스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나, 진 브로디의 개방적인 성생활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부분도 훌륭하다. 2018년, 페미니즘과 보수적 결혼관에 대한 재고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지금 이 시점에 읽기에 뒤떨어지지 않는 소재를 품고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내 일그러진 영웅의 몰락, 참호 속에 파묻힌 가치들. 그렇다, 이 소설은 처절한 실패담으로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됨을 알렸던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암호명은 ‘리틀 보이’였다. 어린아이, 꼬맹이, 꼬마라, 이보다 부드럽고 감동적이고 미래에 가득 찬 단어는 없을 것이다. 희망의 황금빛 얼굴로 대지 위를 향해 날아간 쇳덩이의 구호다! 그 일촉즉발의 시간, 누군가는 이 폭탄이 휩쓸어버릴 그 땅의 작은 가치들을 떠올렸을까. 그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그들만의 전후시대는 화려한 개막을 알렸고, 세상은 절대자의 목소리 아래 뿌리를 내렸다.


* 표지 사진은 작가 진 브로디의 생전 한 잡지의 인터뷰 사진이다. 배우 못지않은 아우라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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