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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8. 2016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

달리기와 걷기에 관한 책 두 권 그리고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어제 메이저리그 디비전시리즈를 보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잠이 들었다. 텍사스가 경기에서 패해 찝찝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토요일 아침인데도 몸이 상당히 무거웠다. 계속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아 오늘은 아무래도 밖에 나갈 기분이 아니구먼. 뙤약볕에 몸을 그을리기도 싫었고,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빈둥거림의 친구는 역시 TV다. 우리 집은 얼마 전부터 IPTV를 설치했는데, 이놈이 있으니 혼자서 집에 있어도 전혀 심심하지가 않다. 몇 주 전부터 꼭 다시 보고 싶었던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을 켰다. 이런 놈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바람 핀 아내 덕분에 미친 남자,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난데없이 쓰레기 봉지를 뒤집어쓰고 조깅을 하는 '브래들리 쿠퍼'와 그를 뒤쫓아 따라가는 날카로운 눈 화장의 '제니퍼 로렌스'와 조우했다. 콧노래를 유발하는 사운드트랙들도 여전했다. 침대에 누워 과일을 먹으면서 다리를 덜덜거리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정주행 했다. 이 삼복더위에 허물 같은 옷가지를 주어 입고 시내의 교통지옥을 뚫고 나가 영화를 관람한다는 건 얼마나 고역인가. 새삼스런 실감을 머금은 체 어젯밤을 떠올렸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관객이 없는 아트하우스, 단일 취향으로 점철된 삭막한 도시. 이제 외출과 데이트 그리고 극장이라는 포근한 공간적 물성이 사라지고 나면, 아마도 극장은 TV라는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에 밀려 그 자리를 잃을 게 뻔하다.


영화에서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하는 미친놈 같은 남자는 TV 대신 문학책을 보고, 술과 담배 대신 조깅을 하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는다. 아니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약간씩은 미친놈처럼 보인다는 게 희한하다. 아내의 외도로 정신적 상흔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지만,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그의 가족을 비롯한 친구와 형 심지어 동네 불알친구까지 모두 자신만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래 이 엿같은 도시 속 인간들은 다 뭔가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니 너무 속상해 말자. 그런 연유로 실버라이닝이 가진 유머 코드에는 미친 남자와 그를 둘러싼 일곱 미친 사람들의 첩첩산중과 같은 곤란함에 웃음기가 묻어있다. 서로를 향한 트라우마 건드리기와 그에 반응하는 날 선 신경증의 호들갑을 보다 보면 시종일관 웃음이 튀어나온다. 그러니 이 남자는 자중지란을 피해 또 나가서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뛰고 또 뛰는 것이다. 집에 있으나 병원에 있으나 순 미친놈들 뿐이니.

도시를 미친듯이 달리는 성 도착증 환자, 영화 <셰임>

나도 사실 비슷하다. 퇴근하고 꼭 트랙에 나가 조깅을 한다. 일 년에 한 번쯤은 마라톤 대회에서 몸도 풀고, 서울 곳곳을 걷는 것을 하나의 치유 행위로 삼는다. 그것은 일종의 스스로 혼자됨을 반기는 행위라고 명명 지을 수 있다. 걷기와 달리기 모두를 좋아하지만, 이왕이면 천천히 걷는 게 좋다. 주변 풍경이 그림 같으면 금상첨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딴생각을 하며 훌훌 털어버리듯 걷는다.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받은 영향이 컸다. 그는 늘 달린다. 매일 달린다. 하루키의 달리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달리기 애호가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과 에세이에 개인적 취향과 습성을 그대로 투영하는 스타일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름만 달랐지 모두 하나의 하루키적 인물로 읽을 수 있다. 어느 누군가 말했듯이 모든 소설가는 평생 한 편의 소설만 쓴다고 한다. 하루키는 평생 한 남자의 이야기만 써온 것은 아닐까. 아침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생선을 구워 먹고는 소파에 누워 비밥을 듣고, 세 시간의 글쓰기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그는 재즈 마니아고, 클래식과 팝 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리고 맥주와 고양이를 사랑하고, 군살 없는 몸매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다. 성적 취향도 다분히

유아적이라 프로이트와 칼 융을 들먹이지 않아도 혀를 쯧쯧 찬다. 그의 소설이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굳어지는데 이런 자의식의 투영이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나 역시 하루키를 읽으며 사춘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조깅과 재즈음악, 레이먼드 카버, 챈들러에 대한 애착을 피할 수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저

하루키가 꼽는 달리기의 장점은 내가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간편하고, 단순하고, 부대낌이 없는 데다가 주변 풍경을 즐기며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체중을 관리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달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이는 아침마다 트랙 위를 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변이 아닐까 싶다. 그는 달리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하나의 책으로 펴낸 적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최근엔 공원 외에 다른 달리기 코스를 찾고 있는데, 도시에서 좋은 달리기 코스를 찾기란 쉽지 않다. 조금 한적하고, 주변 풍경이 근사한 곳은 모두 페이스북에 까발려져 연인들만 북적거린다. 서울의 혼잡한 산책로에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최근에 본 <월드워 Z>의 좀비들을 떠올리게 된다. 도시의 사람들은 저마다 매서운 눈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도시를 좀비처럼 뛰어다닌다. 그들에게 여유란 사치이고, 달리는 것은 곧 자기 계발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과정 속에 즐김은 없고, 오로지 결과에 천착한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말한 여유로운 달리기의 즐거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시끄러운 음악을 귀에 꽂는다. 그리곤 도시의 굉음을 피해 저마다의 코스를 찾는 수밖에 없다. 좀비들을 피해 잘도 달린다.

다비드 브르통 저

달리기가 껄끄럽다면 <걷기 예찬>이라는 다비드 브르통의 산문을 추천한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래 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걷는다는 행위를 극도로 발전시켜 총체적인 의미를 되짚는 산문집이다. 걷기와 관련된 문학 속의 다양한 의미들이나, 고서들을 되짚으며 걷는다는 행위들에 대해 말한 수많은 이들의 생각을 전한다. 여의도 공원에서 걸을 때도 생각이 날 만한 인상적인 경구도 많아. 누군가의 앞에서 걷는다는 행위의 고적한 즐거움을 표출하고 싶은 자라면 실용적인 책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꽤나 지루했던 이 책을 내가 추천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다비드 브르통이라는 사람 자체가 뛰는 것을 혐오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최대한 느리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현실적 고민과 공상을 아우르며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서 걷기를 추천한다. 운동은 해야겠는데 뛰는 건 힘들고 그렇다고 러닝머신은 진저리를 치는 분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뛰기 싫을 때면 이 책의 멋진 문장들을 떠올리곤 한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으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동차의 소음과 꽝꽝 대는 카라디오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세상 밖으로 외출한 것이다. 그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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