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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9. 2016

트루먼은 잘 살고 있을까

영화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 1998

트루먼은 정말 잘 살고 있을까. 난 가끔 생각한다. 영화 <트루먼 쇼>가 나온 지 어언 이십 년이 되어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모든 사실을 간파하고 세상을 향해 문을 연 트루먼은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한다. In case I don't see ya! Good morning, good afternoon, good night. 세트장을 나선 트루먼과 함께 급작스런 종영. 잠시 후 훌쩍이던 시청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TV 채널을 돌려 그를 잊는다. 나도 트루먼을 잊고 살았다.

<트루먼 쇼>는 오랜 시간 동안 미디어의 폭력성과 그 천박한 속성에 관해 얘기할 때 어김없이 거론됐던 작품이다. 티브이는 트루먼의 사생활을 통해 낱낱이 중계한다. 그의 탄생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인생을 모조리 지켜볼 수 있다. 거대한 몰래카메라이자 관찰 프로그램인 트루먼쇼는 시청자와 미디어의 암묵적 동의 아래 ABC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CCTV와 SNS가 개인의 모든 사생활을 중계하는 현재 이런 관찰형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래서인지 참신하게만 보였던 이 영화가 더 낡아 보인다. 그래서 트루먼은 잊혔을까.

The Truman Show, 1998

트루먼이 사는 세상은 거대한 세트를 통해 현실세계를 모조한다. 태어날 때부터 세트 안에서 살아온 트루먼은 세트 자체가 온전한 세상이다. 트루먼은 PD(빅 브라더)의 통제 아래 그들이 요구하는 정보와 인간관계로 삶을 지탱한다. 방대하게 동원된 배우들과 엑스트라, 스텝들이 모두 트루먼과 함께 생활하며 바깥 세계에 대한 트루먼의 호기심을 관리한다. 트루먼이 사는 세상엔 여행이라는 게 존재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바다에서 아버지를 여의는 사고를 당해 배를 타기 싫어한다는 트라우마를 주입한다. 이런 연출은 시청자에겐 극적이지만, 이를 권력의 은유로써 읽어 내려가면 복잡한 속내가 된다. 트루먼 쇼는 언론을 무조건 악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PD는 트루먼의 행복을 위해 그를 부모처럼 대한다. 그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심지어 와이프까지 캐스팅했으니까.) 누군가를 속인다는 의미가 아닌, 미디어가 조물주로 기능하는데 방점이 찍혀있다. 연출로 가공된 공간은 자연의 빛을 모두 조명으로 대체하고, 수많은 카메라는 트루먼의 동선마다 숨겨져 있다. 엄청난 제작비는 우스꽝스러운 PPL로 매운다. 트루먼의 삶이 광고 그 자체인 셈이다. 이는 곧 언론과 매스미디어의 권력이 그를 보호라는 명목 아래 두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다룸을 보여준다.

90년대 말은 배우 '짐 캐리'의 전성시대였다.


영화 <슈퍼 스타>(프랑스, Superstar, 2012, 자비에 지아놀리 감독)는 2013년 판 <트루먼 쇼>로 부르면 적당하다. 역시 미디어에 대한 고발과 대중의 시선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느 날 이유 없이 슈퍼스타가 된 남자가 있다. 마르탕이라고 하는 수더분한 남잔데, 노총각에다가 매력 제로인 대머리다. 그는 공개적으로 방송에서 평범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인생을 산다. 이 남자가 어느 날 신내림(미디어의 포커스)을 받듯 매스컴의 관심을 독차지한다. 처음으로 접한 유명세는 다분히 폭력적인 데다가 지극히 맹목적이다. 조용한 남자 마르탕은 도무질 견뎌내질 못한다. 마르탕은 나름대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공장에선 장애인들을 돌보며 일을 하고, 자주 가는 식당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보통 남자일 뿐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대중의 관심은 그의 일상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그는 왜 내게 관심을 갖느냐며 질문하지만 대중과 미디어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식이다. 질문이 없고, 답도 적절치 않은 현상들이 마르탕에겐 폭력적인 위협일 뿐이다. 미디어는 그를 뉴스거리로 소비하는데 집중하고, 대중들은 그들과 결탁한 조폭들처럼 마르탕을 시선 안에 두고 쇼를 즐긴다.

영화 슈퍼스타, Superstar, 2012, 프랑스

그런 와중에 마르탕의 주위에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방송국 PD와 국장 그리고 변호사와 예술가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그들은 마르탕에게 ‘왜’를 가르쳐 주겠다고 접근한다. 하지만 현실은 자신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는 ‘어떻게’를 원하는 놈들뿐이다. 스마트폰을 들고 좀비들처럼 달려드는 사람들과 바퀴벌레 같은 기자들 그리고 점점 더 스트레스에 쇠약해져 가는 마르탕. 트루먼이 거대한 세트 안에서 비호받았다면, 마르탕은 SNS와 언론의 지옥 안에서 숨을 곳을 찾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방송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유명세에 대해 패널에게 추궁을 받던 마르탕은 결국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이 장면은 미디어와 여론 그리고 대중들의 손놀림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뻗어나간다. 누구는 그것을 일종의 사회적 혁명으로서의 분노로 읽고, 누구는 정치적 함의를 캐낸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마르탕이 자신의 입으로 설명하기 전에 선전지 기사들은 빠른 속도로 기정사실이 된다. 이것은 비단 이 영화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현실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각자 제멋대로 생각한 것을 무책임하게 보도(공유)하고, 책임은 피해자가 해명하는 악순환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미디어 이론엔 피하주사 이론(hypodermic needle theory)이란 말이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미디어에 주사된 정보를 수용하는 대중들은 직접적으로 미디어의 양태에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미디어 메시지가 주사기 속의 약물처럼 수용자 대중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흡수되고, 그것을 사자 새끼들이 어미를 따라 하는 것처럼 고스란히 답습하는 대중의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용어로 돌려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TV를 자나 깨나 곁에 두고 자라온 세대다. 이제는 SNS가 프로슈머로서 1인 대중매체의 역할을 갖는다. 대중이 프로슈머가 되면 생산자(미디어)와 수용자(시청자)의 양자 구조는 무너진다. 트루먼이 매스미디어라는 거대 권력 바깥으로의 탈피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면, 오늘날의 대중들은 스스로를 서로의 통제 안에 두고 끊임없는 간섭을 통해 스스로를 의식한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는 이 도시의 유동인구 중에 묵묵히 제 일을 하고 있을 트루먼에게 묻고 싶다. 당신을 연결하는 수많은 끈들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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