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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10. 2016

선배의 결혼

영화 <잠 못 드는 밤> Sleepless Night , 2012

선배가 결혼을 한다고 말했다. 선배는 훤칠하고, 말솜씨가 좋아 인기가 많았다. 취업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일주일에 두세 번은 밤거리를 헤매며 야전생활을 하던 선배. 내가 아는 선배는 1년에 몇 번씩 애인이 바뀌고, 결혼 생각은 애초에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가끔씩 만나 당신의 진보적인 연애관을 설파하고, 이것이 젊음이라며 호탕한 웃음을 짓던 선배. 난 맥주를 하염없이 마시며 나와는 다른 선배의 인생을 경탄했다. ‘아 저렇게 사는 인생도 참 재밌겠구나.’ 나와는 전혀 다르기에 일종의 경외심으로 대했던 것 같다. 형과 나 사이에 놓인 맥줏집 테이블만큼의 거리만큼 떨어져 그를 지켜봤다. 

결혼도 싫고, 애도 싫고, 속박된 인생도 싫다는 이 형이 어느 날 내게 청첩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녀와 2세를 가지고 싶다는 말을 하더라. 난 순간 벙 쪘으나 어색하지 않게 축하해줬다. 속으로는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것 왜인지 나도 잘 파악할 수 없었으므로 묵인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선배와 비슷한 공감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구. 나는 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선배는 가능하다 믿었기에 응원했던 마음이 있었던 걸까. 무엇이 형을 이렇게 변하게 했을까.

한때 철학에 빠져 몇 가지 책을 홀짝거리던 내게 가장 공감되는 명언들을 많이 남겨주신 분이 쇼펜하우어다.(Schopenhauer, 1778~1860) 그는 지독한 허무주의자였다. 부단한 욕망에 쫓기는 인간은 언제나 삶을 고통 속에서 비루하게 연명하는 바퀴벌레 보듯 하셨다. 그런 쇼펜하우어도 사랑에 대해선 관대했다. “사랑은 성직자의 서류 가방에도 애정의 쪽지나 반지를 은근슬쩍 밀어 넣는 방법을 안다.”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이러면 안 된다고 다독여도 소용없다. 사랑은 벗어나면 할수록 빠져들 뿐이다. 또한 사랑을 삶에 대한 의지(Wille zum Leben, Will-to-Life)라고 정의한 것 역시 쇼펜하우어다. 그렇다 사랑은 뒤돌아보지 않는 독신주의자에게 후세를 남겨 번식하려는 욕구를 선물한다. 사랑은 불가항력적이고, 그대가 무능한 탓도 아니다. 이것은 기꺼이 욕망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므로 무력하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에 반응하는 동물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라면 이제 결혼을 하려는 선배에게 불쑥 나타나 이런 말을 해주리라. 고통이 눈에 보여도, 우리의 눈엔 콩깍지가 있기에, 평생 친구라고 생각한 여자와도 사랑에 빠져 애를 낳을 수 있다. 비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생식조차 꿈을 꾸듯 해치운다. 전형적인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여성들 역시 이 사랑의 법칙에 이끌려 불가항력적인 사랑을 맛볼 것이다. 사랑이란 이런 비이성적 끌림으로 성립되어 '내가 미쳤지'를 반복하게 한다. 인생, 욕망 그리고 곧 허무, 헛소리 좀 해봤다.

결혼과 사랑에 대한 보편타당한 주제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은 영화가 있다. 결혼을 한 신혼부부의 삶을 밀착 취재한 듯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영화 <잠 못 드는 밤>이다. 장건재 감독의 <한 여름의 판타지아>로 독립영화계의 스타가 되었다. 데뷔작 <회오리바람>부터 그의 작품을 지켜봐 왔고, <잠 못 드는 밤>은 그의 두 번째 장편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잠 못 드는 밤>은 누구나 하는 보편적 고민이 사려 깊은 감독의 각본을 거쳐 관조적인 미소로 화답하는 작품이다. 

신혼부부의 일상은 서로를 어루만지듯 따듯하다. 결혼 2년 차 커플 주희와 현수는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그들만의 신혼을 즐기고 있다. 주희는 요가강사로 일하고, 현수는 멸치 공장 직원으로 물류창고에서 일한다. 쉬는 날엔 쭈쭈바를 먹으며 아파트 공원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밤이면 자전거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페달을 밟는다. 소박한 것에서 일상 속의 아늑한 행복을 함께하는 두 사람, 여전히 뜨거운 섹스와 달콤한 눈빛을 나누는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 현실의 고민이 있다. 바로  '우리의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라는 주희의 물음이다. 잠시 후 현수는 말을 돌린다. 한 침대 위, 두 개의 마음. 이 흔하디 흔한 보편적 고민의 끝엔 뭐가 있을까. 출산과 양육이라는 일생의 과업이 자신들에게 닥쳐올 때,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그것을 마주하고 있을까. 영화 <잠 못 드는 밤>은 신혼부부의 일상을 통해 그 명과 암을 지척거리며 보여준다. 아직은 사랑의 콩깍지가 온몸을 뜨겁게 하고, 일상에서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주희와 현수. 현재는 현실의 산적한 어려움들을 사랑이라는 대명제로 극복하고 있지만, 언젠간 차갑게 식어버릴 걸 알기에 선뜻 2세 계획을 말할 수 없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의 리듬을 변주하는 건 바로 꿈과 상상이다. 사랑이 식어버리리라는 두려움에 남편과 크게 싸운 후 버려지는 꿈을 꾼 주희. 불안한 마음에 현수가 퇴근하는 버스정류장에 달려 나간다. 따듯한 남편의 손을 잡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쉰다. 늘 비정규직의 아슬아슬함에 시달리던 현수는 직장 상사에게 부당하게 해고되는 꿈을 꾼다. 뒤척이던 그는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자는 아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자유시간도 없고, 평생을 애 양육비 걱정에 시달리겠지. 모든 남편들의 현실적 고민에 이 밤 잠들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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