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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10. 2016

학교에 등장한 대학살의 신

마이케 다케시의 하드고어 슬래셔  <악의 교전>

학교라는 공간은 늘 시끄러운 곳이지만, 밤중엔 고요함이 적막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학교의 축제기간은 다르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학생들은 밤에 학교에 남아 자신들의 축제를 준비한다. 분주한 행사 준비에 학생들은 놀이동산을 방불케 하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든다.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웃음소리 그리고 아무런 걱정이 없는 화기애애함. 그 시절은 어떻게든 즐거운 법이니까.

악의교전 悪の教典 , Lesson of the Evil , 201

이 학교로 한 남자가 유유히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는 학교의 정문을 걸어 잠근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놀랍게도 가방에서 기관총을 꺼내 든다. 이 남자의 정체는 잘생기고 총명하기로 소문난 총각 교사 하스미다. 도대체 어떤 생각일까. 하스미의 얼굴엔 상기된 흔적이 역력하다. 일정한 리듬감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튕긴다. 뭔가 그리 좋은지 만면의 미소엔 여유마저 흐른다. 하스미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이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배경음악으로는 경쾌한 재즈 버전의 <맥 더 나이프>가 흘러나오고, 한 열명쯤 죽이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객석에서는 웃음소리가 세어 나온다. 한두 관객을 시작으로 점점 더 큰소리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하스미는 한 새끼도 놓치지도 않고 죽여 나간다. 나 역시 못 참고 입이 찢어질 듯 웃어 젖혔다. 이제 극장 안에 이 대학살이 그치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말 그대로 학살 축제이자 대 쾌락의 축제다.

일본 호러소설의 대표 작가 기시 유스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악의 교전>은 학교와 총기 난사라는 키워드 만으로 몇몇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콜롬바인 고교 사건, 버지니아 공대 사건의 이미지가 짙게 배어있다. 영화는 더 나아가 B급 하드고어 슬래셔의 외피를 두르고 ‘피칠갑의 쾌락’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스미가 학생들에게 총질을 가할 때 우리는 살인을 즐길 수 있다. 마치 슈팅게임을 하듯 한 놈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찬다. 녀석의 머리통이 날아갈 때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쾌감이란 거부할 수 없는 장르적 쾌감으로 치환된다.

악의교전 悪の教典 , Lesson of the Evil , 201

학교 다닐 때 배운 생쥐에 관한 실험이 기억난다. 생쥐를 우리 한편에 내려놓고 반대편에는 먹이를 놓아둔다. 그러면 생쥐는 먹이 있는 곳을 찾아가 먹어치운다. 그다음에는 생쥐가 음식을 찾아 지나가는 통로에 전기 장치를 설치한다. 일정한 전압이 흐르면 생쥐는 먹이를 찾아가지 않는다. 고통이 식욕을 넘어서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먹이 대신 생쥐를 쾌락에 젖게 하는 환각제를 넣고 실험을 반복한다. 그 결과 생쥐는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척 센 전압에도 개의치 않고 고통을 감수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영화 <악의 교전>이 딱 그런 영화다. 학생들의 죽음은 보고 있기 고통스럽지만, 피가 터져 나올 때의 쾌감은 심히 즐겁다. 우리는 마치 환각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악의 교전> 속의 대학살의 신을 동경한다.

소시오패스라는 소재는 수년 전부터 장르 영화의 단골 소재로 소비되고 있다. 사회적 맥락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사후조치의 보고서를 쓰던 논리적인 구조는 사라졌고, 맹목적인 범행의 시대가 온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표적인 학살 사건이 그랬고, 묻지 마 살인이라는 범죄 용어는 이제 너무 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 어떤 심적·사회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죽여대는 소시오패스는 하드고어 슬래셔와 잘 어울린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행위를 현실적으로 자각하며, 사회적으로 유능한 입지를 구축해 치밀한 계획 하에 범행을 실행한다. <악의 교전>의 학살자 하스미가 딱 이 케이스에 해당한다.

미이케 다카시는 관객의 쾌락을 얻어내기 위해 구질구질한 사연과 사회적 도의는 모두 잊은 체 살인 자체의 행위에 몰두한다. 이 영화엔 학교가 가진 사회적 의제들이 없다. 집단 따돌림, 체벌, 폭력, 성추행 등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도 냉소적인 태도로 무시한다. 현실 고발에 관심이 없다 보니 각 캐릭터에 느껴지는 연민이 없고, 그 결과 모든 살인들에 관객이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이는 원작이 가진 사회파 미스터리라 불리는 학교에 관한 문제제기를 모두 무시한 각색이고, 감독의 연출 의도가 선명해지는 지점이다. 미아케 다케시는 그저 죽이고 또 죽이고 싶었을 뿐이다. 대학살의 명분을 만들고 30분의 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엘리펀트 Elephant , 2003, 구슨 반 산트 감독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가 떠오른다. 영화는 컬럼바인 고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을 재현하면서, 범인인 고등학생들의 일상을 파고들며 학교 안에서 죽거나 살아남은 아이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이 영화 역시 무엇을 두 명의 학생들이 다른 학우들을 죽이게 했으며, 또 학교 안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 날의 분위기와 공기를 재현해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건 어쩌면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에 무엇 때문이라고 쉽게 이유를 갖다 대기 어렵다는 고민 때문이 아닐까. 차라리 <악의 교전>의 학살처럼 인간이란 게 원래 잔인한 것들이라고 믿으며 현실에 숙응해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건 게임 때문이야, 잔혹한 영화 때문일 거라며 쉽게 내뱉는 순간 현실의 고민들은 얄팍해진다. 미아케 다케시의 골 때리는 잔혹극엔 어떤 것도 현실을 쉽게 단언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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