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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09. 2019

누군가의 불행을 상상하는 사람들

도시의 타인을 비추는 세 편의 소설에 관하여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2018) 중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제9회)

 낯선 동네에서 밥을 먹을 땐 골치가 아프다. 적당한 가격에 분위기도 좋은 식당은 어딜까. 혼자라면 대충 때우겠는데 데이트할 땐 고려할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난 인스타그램을 켜고 요즘 핫한 식당을 찾아낸다. 속으론 이거 홍보글 같은데 하면서도, 환한 미소로 식당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그녀에게 ‘좋아요’를 보낸다.  

 <가만한 나날>은 특이하게도 직업적 블로거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블로그를 통해 특정 상품을 홍보하는 마케팅 회사에서 광고용 게시물을 올리는 일을 한다. 그녀는 가짜 계정을 만들고 온갖 물품의 사용 후기를 올린다. 마치 진짜 자신이 사용한 듯 그럴싸하게 거짓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녀가 만든 캐릭터는 30대 후반의 ‘채털리 부인’이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동년배의 주부들을 현혹한다. 내가 좋아요를 보낸 인스타그램 속 그녀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일상을 자랑한다. 채털리 부인은 삶의 양태를 판매하는 셈이다. 그저 그녀가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누군가를 동경하는 심리가 만든 간접 홍보효과다.

 작가가 되길 희망했지만 여의치 않아 취업을 한 화자는 블로거 일이 본인에게 잘 맞는다고 느낀다. 채털리 부인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는 그녀 안의 문학적 갈증을 일깨운다. 마치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일상을 적는 에세이 작가처럼 그녀는 채털리 부인에 몰입한다. 일종의 유사 문학이랄까. 있을 법한 이야기를 꾸며내어 생생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물론 그녀에게 찜찜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먹고살기 바쁜 요즘 이런 일을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작가들은 종종 소설 속 인물이 저자 자신과 얼마나 닮아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릴 적 헤어진 후 외따른 곳에서 자란 쌍둥이 형을 소설 속 인물에 빗댄 바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르지만 까고 보면 내재된 정서는 꼭 닮아있는 존재다. 소설이란 허구적 틀을 통해 나라는 사람의 측면을 적어보는 수단이다. 채털리 부인의 게시물은 허위를 바탕으로 한 상업적 게시물임을 밝히지 않았기에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다. 어느 날 채털리 부인은 자신이 홍보한 살균제가 치명적인 인명 피해를 유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비극을 유발한 그녀는 더 이상 키보드를 누르지 못한다. 자신의 일이 가닿은 여파가 윤리적으로 바닥을 드러내자 파열한다.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면 내가 지금 적는 글들이 누군가의 인생에 가닿는 상상을 한다. 미약하게나마 그들의 일상을 뒤틀고, 의도치 않게 부정적으로 몰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나를 과대평가하는 거라며 웃어넘기지만, 가끔은 불길한 상상에 젖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글을 읽는 이름 모를 그들을 떠올리길 멈추지 않는다. 아니 더욱더 치열하게 그들의 존재를 의식한다.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고,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보려는 마음 상태를 동경하기 때문이다. 내게 그런 심적 상태는 문학이 세상에 드리우는 방식이다. 기만적 위로가 아닌 자기 삶의 가치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안도다.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든 나를 살피고 다듬어서 최대한 자족할 수 있기를. 이 삭막하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누군가의 불행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2017) 중 <건너편>


문학동네, 바깥은 여름, 김애란 저

 난 김애란의 전작을 모두 읽었다. 이제 그녀도 나이를 먹나 보다. 청춘의 설움과 고달픔에 집중했던 초기작을 넘어 이제 삶의 안정궤도 올랐다. 데뷔 초부터 이어지던 초반의 코믹함과 후반부 진지함이라는 구조 역시 <바깥은 여름>에 이르러 해체된다. 대신 그 자리에 전반적인 체념의 정조가 안개처럼 자욱하다. 이런 변화를 두고 혹자는 여러 추측을 하지만, 난 그저 나이 듦의 한 방식으로 읽는다. 작가 자신이 사회적 약자로서 고통을 분담하던 위치에서 벗어나 문단의 스타 작가가 되었다. 외부에 있던 관찰자에서 어쨌거나 시스템 내부의 특정 거점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서른 후반의 작가 김애란은 이제 예전과 다른 위치에서 이야기를 한다.

 <바깥은 여름> 속 7편의 단편이 다루는 소재들은 전과 다를 게 없다. 변화라면 극 중 화자들이 사회를 어느 정도는 깨닫고 안착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바꿀 엄두도 그렇다고 쉽사리 비난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눈치나 보는 게 그들이다. 난 이를 김애란이 직면한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처한 고민과 같다고 느꼈다. 다음은 소설 <건너편>의 한 단락이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이 있었다. 경박해 보이지 않으려 적당한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한 적 있었다. (중략) 동일한 출발선을 돌아본 뒤 교훈을 찾고 줄거리를 복기할 입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어색한 침묵이 돌면 금방 다른 화제를 찾아내겠지. 어쩌면 다른 친구들도 이미 타인의 삶에 심드렁해진 지 오랜데.”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기엔 버거운 일상, 누가 누구의 삶에 한 소리를 보탠단 말인가. 작가 김애란은 이 소설집을 통해 문학적 고민을 토로한다. 그래 난 너희들의 삶을 잘 몰라. 그저 최대한 가닿아 보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값싼 동정뿐이지만 그래도 당신의 속내를 적어보는 거야. 무뎌진 마음과 무력한 눈으로 김애란은 내게 바깥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말한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2016) 중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문학동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저

 난 가끔 떠올리곤 한다. 쇼코가 감정을 한껏 덜어 낸 얼굴로 집 앞마당에 서 있는 모습, 비 오는 아파트 자취방 앞에 우산을 챙겨 온 할아버지의 남루한 얼굴도. 이 책을 읽은 지 2년이 넘어가지만 소설의 이미지는 오히려 더 생생하다. <쇼코의 미소>가 가진 미덕은 소설집 속 작품들이 하나같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마치 버릴 게 없는 네스프레소 캡슐처럼 저마다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이유는 최은영이 가진 문체에 대한 신뢰에 기인한다. 문장 하나하나 그녀 특유의 사려를 느낄 수 있다. 무리한 보폭이 없이 끝없는 길을 걷는 당나귀처럼 온순하다. 타인을 향한 사려가 담긴 언어의 조탁과 문장을 부대낌 없게 하는 단문까지. 자극적 소재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한 보 한 보에 집중한다. 자신이 내디딘 문장이 미처 뭔가를 놓치지 않았을까 심려한다.

 수록작 중 하나인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의 경우 작은 상처가 덧나 끝내 생채기를 내는 가혹한 소설이다. 군부독재 시절과 빈곤, 운동권 학생들과 노동자의 처우와 같은 먼지 나는 소재들을 다룬다. 하지만 작가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을 바라본다. 역사는 잊었으나 한 개인에겐 상흔처럼 남아있는 그 사람을 그려낸다. 상처 난 자의 궁여지책을 고육지책으로 만드는 참혹한 전개에 고통스럽지만 최은영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당신의 이야기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며 독자를 설득한다. 소설이 가진 이러한 끈덕진 태도는 삶이란 당신의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목소리다. 작품의 말미에 최은영은 이런 문장을 적는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최은영이 그린 한국엔 지긋지긋한 도시인의 염증과 결국 이곳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힘 빠진 어깨가 있다. 감히 위로라는 말로 뭉뚱그리기에는 내 살갗이 기억하는 감정들이다. 서울의 새침한 생김새와 매캐한 공기 속에 주위를 기민하게 살피는 그들을 난 안다. 어느 곳에서나 고개를 파묻고 카카오톡으로 쭈뼛거리고, 인스타그램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그들. 감정을 최대한 압축해서 언어마저 이미지의 한 형태로 소비하는 그들. 말이 적은 시대의 감정이란 뭉친 어깨처럼 딱딱하다. 최은영의 글은 더딘 손길로 그들을 매만진다. 미처 휘발하지 못한 감정의 여지들을 곡진하게 다듬는다. 최은영은 등단 초기부터, “선천적으로 눈이나 위가 약한 사람이 있듯이 마음이 특별히 약해서 쉽게 부서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며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 앞에 겸손히 귀를 열고 싶다고 밝혀왔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작가라면 난 계속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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