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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23. 2019

삶의 낙차를 응시한 작가들

세 편의 고전이 실패에 관해 말하는 방법

자기 앞의 생,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저


 <자기 앞의 생>은 열네 살 ‘모모’가 바라보는 삶이다. 10살 소년에게 1970년대 전후로 추측되는 프랑스 빈민가의 삶이 쉬울 리 없다. 여러 민족이 엉켜있는 낡은 동네엔 가난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 난 우려를 하고 소설을 읽어 내려갔지만, 모모는 어둠의 지층만을 응시하진 않는다. 음습한 삶의 전경 속에서도 짐짓 체념을 얻어낼 줄 아는 모모의 낯은 가볍다. 억지로 만든 긍정이 아닌 보통 그런 거라며 다독이는 덤덤함이다. 호들갑 떨지 않는 소년의 얼굴은 <자기 앞의 생>을 세대를 불문하고 가슴에 품게 하는 걸작으로 만들었다. 한국 출판사에서 붙인 제목도 좋다. 원제목이 남은 생을 의미한다면, 자기 앞의 생은 앞이라는 방향성을 가진다. 뒤를 돌아볼 틈조차 없는 ‘로자’ 아줌마의 삶처럼 희미한 종착지만 그려진다.

작가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모모는 늘 지근거리에서 숨을 고르는 로자 아줌마를 바라본다. 그녀는 창녀의 아이를 키우는 보모다. 과거엔 본인 역시 매춘부였지만 이제는 시들어진 육체를 추스르기에도 힘에 부친다. 뒤를 보자니 참혹한 과거가 산재하고 옆으로 눈을 돌려봤자 벌거숭이 아이들뿐이다. 그녀는 큰 덩치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데 7층이나 되는 건물을 낑낑대며 올라야 한다. 오로지 통증만이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나날이다. 고통을 응시하는 노인의 절뚝이는 하루는 모모의 여생조차 녹록지 않을 거라는 명징한 신호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녀의 늙음과 모모의 머나먼 여생이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아득하다.

 모모는 죽음을 앞둔 로자 앞에 앉아 화장해준다. 무너진 얼굴을 일으키며 삶을 되돌리고자 낑낑댄다. 그럴수록 난 메멘토 모리, 죽음을 떠올린다. 이 작품은 삶에 내재한 죽음을 끝없이 의식하며 절망적인 여생을 암시한다. 모모는 종종 로자 아줌마가 지하 창고로 들어가는 걸 목격한다. 그녀는 어두운 동굴에서 잠을 자는 곰처럼 그 안에서 고개를 묻고 마음을 다독인다. 아우슈비츠의 경험이 있는 그녀는 자기 삶의 최저점을 불러들이는 셈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 가끔 히틀러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 그녀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삶의 기조가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묘사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 회교도, 성 소수자, 흑인, 이민자, 매춘부, 빈민층 등 이른바 레미제라블이 모여 만든 공동체는 재난을 머금은 자 특유의 활기가 있다. 생계 이외엔 아무것도 개의치 않은 지금 이 시각의 사람만이 가진 꿈틀거림이다.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총구를 겨눈 지금, <자기 앞의 생>은 공동체가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을 불러들인다.

 작가는 로자의 생을 파괴한 후 모모를 홀로 남겨뒀다. 흘러넘치는 여생, 모모는 어떻게 남은 삶을 버텨나갈 수 있을까. 참혹한 결말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속도에 더 힘을 보탠다. 난 누군가 이 소설을 해피엔딩이라 말한다면 다가가서 귀에 속삭일 테다. 거기엔 한 치의 빛도 드리운 적이 없다고.


야간비행,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저


 소설을 읽기 전 생텍쥐페리의 생애를 훑었다. 스무 살 남짓해서 결혼과 등단을 동시에 하고 어려서부터 꿈꾸던 프랑스의 조종사가 된다. 정비사·작가·군인·집배원·기자 등 여러 직업을 거쳤으나 그의 나이는 서른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44살, 정찰기를 타고 프로방스 해변을 비행하다 영영 증발해 버린다. 그의 소설 <야간비행> 속 조종사 ‘파비앵’이 임무 중 교신이 끊겨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처럼. 생텍쥐페리는 위험과 죽음을 낭만으로 끌어 앉고 나아가는 남자였다. 그의 이상과 삶의 기표가 고스란히 새겨진 소설이 바로 <야간비행>이다.

 야간비행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건 조종사 파비앵이지만, 서문을 쓴 작가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눈길을 끄는 건 회사의 책임자 ‘리비에르’의 존재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독재자를 상기시키는 리비에르라는 전 생애를 걸쳐 전쟁의 가치를 숭상했던 작가와 겹쳐 보인다. 요즘이라면 꼰대 소리나 들을 마초지만, 회사 차원에서는 돈 되는 일에 대의명분을 건 충직한 하수인이다. 조직의 이익과 인생의 가치를 동일시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내모는 게 그들의 방식이다. 놀라운 점은 생텍쥐페리가 리비에르의 기질을 끝내 부정하지 않고 작품을 끝마친다는 점이다. 마치 그것만이 남자의 길인 양 독자를 설득한다. 개인주의와 삶의 자그마한 행복을 찾아 나선 요즘 사람에겐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소설이 분명하다. 넓게 펴진 대지와 캄캄한 하늘을 날다 추락하는 이의 탐미적 죽음.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내가 생각하는 고전의 가치란 이해하지 못할 사람에 귀를 기울이고 평생 돌아보지 않을 시간을 들춰보는 과정이다. 참을성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사건의 맥락을 받아들인다. 1931년 전간기(戰間期)의 유럽은 활황을 맞은 자본과 예술의 낭만이 사람들을 고조시킨 말 그대로 황금시대였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이해를 받지 못한 가치가 사람들을 획책한다. 생텍쥐페리는 주위를 쓱 둘러본 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 위험천만한 야간비행에 기꺼이 낭만을 던졌다. 비단 현실에 가닿지 못한 영웅 심리라 하더라도 선연한 상공의 폐곡선이 선명히 그려진다. 죽은 부하를 애써 모른 척하고 다시 스케줄을 짜는 리비에르의 얼굴엔 한 점 어둠 하나 드리우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생텍쥐페리와 같은 조종사 출신 작가들이 있다. 로맹 가리, 로알드 달, 리처드 바크 같은 대문호다. 난 종종 높은 하늘에서 타들어 가는 노을을 등지고 이야기를 상상하는 작가를 상상해본다. 그건 마치 세속적 가치를 뛰어넘은 신의 영역에서 세상을 그려내는 조물주의 마음은 아닐까. 화가가 세상을 네모난 틀에 영속시키는 사변적인 존재라면, 하늘을 나는 작가는 어쩌면 명민하게 세상을 갈고닦는 초월적 존재다. 그들을 이상화하고 저 하늘로 몰아낼수록 인간으로의 삶은 피폐해진다. 극 중 리비에르가 그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터놓지 못한 것처럼. 생텍쥐페리는 그 마음을 잊지 않았고 오늘 서울 한 카페에 앉은 난 추락하는 비행기의 곡선을 그렸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뮤리얼 스파크 저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1930년대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영미 국가의 대중에겐 꽤 알려진 작가나 국내엔 비교적 생소하다. 에든버러의 마르시아 블레인 사립 여자중학교의 한 교실, 담임인 ‘진 브로디’는 아이들에게 일갈한다. 자신은 전성기를 보내는 중이며 내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선생은 일부 아이들을 ‘브로디 그룹’이라 명하며 차별하고, 학생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에 두고 내려다본다.

 학창 시절엔 울타리가 작아 매일 만나는 친구와 담임교사가 가진 영향이 상당하다. 진 브로디는 학창 시절에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 ‘그’를 상징한다. 2차 세계대전 후 연인을 잃었으나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한 진 브로디, 그녀가 가진 사회를 향한 반감은 보수적인 사립학교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다.  

뮤리얼 스파크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 개선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던 시절, 진 브로디는 영국의 중산층 학생을 대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녀의 급진적 사고는 기존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회 흐름과 맥을 같이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 교육의 보수화가 가진 병폐를 자연스럽게 끄집어낸다. 하지만 역사의 개혁가가 그랬듯 위태로운 면도 드러난다. 가령 옳은 길을 위해서 속임수 정도는 눈감을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하며,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대한 찬양을 거리낌 없이 발언하기도 한다. 아직 파시즘에 대한 사회적 유효기간이 끝나지 않았던 시절, 폭력을 통해 세상을 구출할 수 있다고 믿는 선동가의 목소리를 옮기기도 한다. 진 브로디는 이른바 큰 가치를 위해서라면 작은 가치를 뭉개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브로디 그룹이라고 칭하는 학생들의 모임에 열등한 학생을 일부러 끼워 넣는 식이다. 그로 말미암아 학생 간의 우월의식을 자극해 그룹의 동력을 얻어 낸 그녀에게 낙오자는 필요악일 뿐이다. 계급투쟁이 발생시킨 무수한 희생자를 모른 척하는 단상 위의 선동가처럼 맹목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을 위해 거치적거리는 눈엣가시는 치워 마땅하다. 나치즘이 골상학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가둔 것처럼, 무솔리니의 몰락과 진 브로디의 말년은 유사 구조 아래 낙엽처럼 부스러진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일그러진 영웅의 몰락, 참호 속에 파묻힌 가치들. 이 소설은 처절한 실패담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됨을 알렸던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암호명은 ‘리틀 보이’였다. 어린아이, 꼬맹이, 꼬마라는 뜻이다. 이보다 부드럽고 감동적인 단어가 어디에 있을까. 황금빛 얼굴로 대지 위를 향해 날아간 쇳덩이의 구호다. 그 일촉즉발의 시간, 누군가는 이 폭탄이 휩쓸어버릴 땅 위의 아이를 떠올렸을까. 타인의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그들만의 전후 시대는 화려한 개막을 알렸고, 세상은 절대자의 목소리 아래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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