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Feb 23. 2019

우리, 각자 일 인분의 삶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눈을 뜨니 잔뜩 웅크린 몸뚱이가 스산하다. 요와 이불이 차갑고 부드러웠다. 올겨울은 생전 걸리지 않던 감기에 걸렸다. 텁텁하고 목마른 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시큰해진 공기에 코를 담근 채 솟아난 닭살을 보니 마치 벌레가 된 기분이다. 마치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내 몸이 생경하다. 늘 모로 누워 책을 읽다 잠이 들곤 한다. 얼마 전 집에 들렀다가 문틈으로 누워계신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 역시 나처럼 책을 읽으시더라. 마치 중력에 저항이라도 하듯 책을 곧추들고 계신 모습에 어쩐지 마음에 쓰였다. 어릴 적 혼자일 땐 소파에 누워 잠이 들곤 했다. 눈을 떠봐도 아무도 없음을 알기에 잠에 깨서도 한참을 뜸을 들이다 몸을 일으켰다. 가끔은 커튼이 처진 오후의 적막을 감당하다 보면 나 혼자 버려진 기분이 들어 사무쳤다. 마치 이 시간에 영원히 유예된 듯, 분침에 매달려 안간힘을 썼다. 빈집이 주는 쓸쓸함이란 지금 내가 영위하는 원룸 방에 부유하는 정적관 다르다. 누군가 있어야 마땅한 곳에 나 혼자라는 인식은 허기를 부른다. 늘 고독과 묵언 수행하는 내 방엔 명백한 혼자라는 인식이 우두커니 서 있다.

긴 시간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커튼을 걷어보니 여전히 한낮이다. 읽다만 책들이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마치 누군가 쏟아내기라도 한 듯 어지럽다. 다시 몸을 추스르고 책 몇 권을 집어 들고 거리로 나섰다.


어디에 밑줄을 칠까


<내게 무해한 사람>을 펼치니 녹색 펜으로 그은 밑줄이 빼곡하다. 책을 읽을 때 밑줄과 메모를 남기는 건 일종의 영역표시다. 이곳저곳 내 의도와 채취를 담아서 책 사이에 교점을 찾는다. 다시 이 책을 읽다 보니 지난번 그은 밑줄과 현재의 밑줄이 다름을 느낀다. 어쩐지 내가 조금은 달라진 느낌에 마음이 놓인다. 다만 헷갈리는 건, 내가 그은 밑줄이 과연 내 생각과 같다는 동의 표시일까. 그게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한 깨우침일까. 가끔 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에만 귀를 기울이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이해할 수 없을 땐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우는 꼰대가 되는 건 아닐까 의심한다. 내가 아무리 누군가에게 열려있는 사람 이려 해도, 그게 가당키나 할까. 선한 의도 이면엔 무지한 미련함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속단을 경계하고 마음을 써도 미처 챙기지 못한 마음이 있다. 가장 정확한 단어를 조탁하여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올겨울은 콧물과 으슬으슬한 몸으로 좀처럼 주변을 의식할 수 없었다. 내 몸 챙기기 급급해서 날 쓰다듬는 그들의 눈을 피했다.

다시 읽어서인지 책 읽는 속도가 났다. 두 번 책을 읽는 경험은 마치 유년 시절 친구와 우연히 마주친 느낌이다. 속사정에 몰입했던 시절을 지나, 조금 거리를 두고 꼼꼼히 관찰할 수 있다. 요즘 형편이 어떤지,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지. 옷차림에선 일상을 추측해볼 수 있다. 말투와 제스처에서 나와 비슷한 점을 꼽기도 한다. <내게 무해한 사람>엔 좀 더 현시대가 앓는 갈등의 틈으로 진입하려는 작가의 야심이 느껴졌다. 젠더의식, 남성 권력 그로 말미암은 페미니즘, 빈부격차, 발작적인 폭력, 이방인 정서, 시골 소멸과 도시 정체. 방 한구석에서 제 속내를 드러내던 작가는 이제 버스를 타고, 어느 도시 골목에 기대어 선 타인에 눈길을 보낸다. 처음 읽을 땐 몰랐지만 최은영은 좀 더 무릅쓰려고 한다. 눈을 마주하길 주저했던 수줍음은 여전하지만, 내키지 않는 자리를 감내한다. 그 애쓰는 마음이 느껴져, 신경이 쓰여 읽는 내내 곳곳에서 숨을 골라야 했다. 조금 피로해진 나는 근처 영화관을 검색했다. 아트하우스 모모, 필름포럼처럼 조용한 영화관을 둘러봤다. 북적이는 영화관에서 팝콘 냄새나 맡으며 영화를 보긴 싫었다. 조금 걸을 수 있도록 우회로를 택해 걸었다.


망상이라는 도피처


최은영이 그린 한국엔 지긋지긋한 도시인의 염증과 결국 그곳에서 천착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힘 빠진 어깨가 있다. 감히 위로라고 뭉뚱그려버리기에는 귓가를 맴도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다. 서울의 새침한 생김새와 매캐한 도심에서 거리를 걷는 그들이 친숙하다. 주위를 기민하게 살피며, 어느 곳에서나 고개를 파묻고 카카오톡으로 쭈뼛거리고 인스타그램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그들. 감정을 최대한 압축해서 언어마저 이미지 형태로 소비하는 그들. 말이 적은 시대의 감정이란 서술 불가능한 뉘앙스의 그림자다. 알아보고 언하지 않는다면 뭉친 어깨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최은영의 글은 더딘 손길이지만 최대한 신경 써서 그들을 매만진다. 미처 휘발하지 못한 감정의 여지를 곡진하게 고른다. 느닷없이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밝히는 친구 앞에서 자신이 지었던 표정을 기억하는 아이. 멀리까지 자신을 찾아온 친구를 현실적 고민 때문에 외면했던 무심함. 인생의 순간순간 우두커니 서 있는 음습한 감정은 잊을만하면 기억에서 나를 찾아온다. 늘 불가결한 귀결을 품고 사는 이들이 ‘최은영’의 소설 안에서 용서를 구한다.

영화 <애니 홀>에서 뉴욕에 사는 우디 앨런(극 중 알비 싱어)은 이런 말을 한다. “인생에는 외로움과 고통, 괴로움 그리고 불행이 가득하지만, 그 순간들조차 순식간에 지나간다.” 우디 앨런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인생이 암울하고 고통스러우며 악몽 같고 의미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각자 나름의 망상을 가져야 살 수 있다고요.” 난 우디 앨런을 좋아하지 않지만, 예의 그 냉소적인 면모엔 호감을 가진다. 그가 늘 견지하는 별거 없다는 식의 화법엔 현실 도피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망상’의 힘이란 현실과 괴리되기를 주저 않는 태도다. 적극적으로 책 속에 파고들어 현실과 거리를 두는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나 스스로를 잠시 잊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일상에 틈입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며 시대를 자각하는 아픔이란, 어쩌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이가 가진 숙명으로 보인다. 망상이라는 자기기만이 없는 삶은 얼마나 무참한가. 그래서 최은영의 화자는 늘 이곳을 떠나 낯선 저곳에서 회한에 젖는 꼴이다. 그들의 정직함은 무용지물 한 후회로 글에 눅진한 자국을 남기고, 고립무원의 대지로 몰린 도피자의 마음을 쫓는다. 결코 외면하지 않고 보듬고 살피어 끝내 모자람 없이 터놓는다.


영화관내 카페에서 책을 마저 다 읽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최은영은 사랑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나 종종 사랑한다는 말이 싫어질 때가 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을 한 가지 단어로 축약하면 앙상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의 모든 형식을 수반하지 못하니까. 그 수많은 제각각을 공장자동화 상품으로 나열한다. 최은영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하지만, 그 형태와 냄새, 촉감과 제스처를 서술하여 끝내 닿는다.

작가의 이전글 삶의 낙차를 응시한 작가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