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저
김애란 작가가 2011년에 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었다. 열일곱 어린 부부는 아이를 낳는다. 남보다 빨리 늙는 병을 지닌 아름이가 태어난다. 아이는 죽음에 가까워 일찍 철이 들고, 살날이 구만리인 부모는 삶을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다. 아름이는 거의 병실에만 머물며 무수한 책을 읽는다. 침대에 기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해 글로 적는다. 불치병에 걸린 아름이가 펜대를 쥔 덕에 고단한 병세를 지켜보지 않을 수 있다. 생의 보폭이 좁은 아이에게 책이라는 통로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여린 존재가 버텨낼 시간이 가혹하기만 했다면 아마 책장이 더 무거웠으리라. 비록 글이지만 영락없이 악화할 병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시며 값싼 연민을 품을 내가 두려웠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어떤 통증도 아름이의 문장 안에선 잠잠했다. 아이는 지나치게 위적으로 굴지도, 그렇다고 대책 없이 순수한 말을 뱉지도 않는다. 작가로서 자의식을 지닌 아름이는 공들여 쓴 문장에 스스로 감당해야 할 고유한 불행을 뽐낸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흔해빠진 비극이 되지 않으려는 작가의 사려가 묻어난다.
무엇보다 아름이의 유머 감각이 소설에 숨통을 틘다. 김애란의 초창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벼운 농담이 아이의 시점에 이물감 없이 포개진다. 애늙은이처럼 옆집 노인과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낯선 타인을 유심히 관찰해 재치 있는 묘사를 곁들인다. 그렇게 순간을 하나하나를 챙기다 보면 세상이 잠시나마 그럴듯하게 보인다. 아름은 삶과 적정 거리를 둔 채 느슨한 일상을 글로 푼다. 남겨질 사람의 안부를 살피고, 삶이 돌아가는 꼴에 애정을 표한다. 애늙은이처럼 부모의 슬픔을 독자 대신 살피고, 무참한 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꾸민다. 위엄 있는 죽음이란 어떤 걸까. 아마도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사라지는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김애란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두 분에게 뭔가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우등상도 학사모도 아닌, ‘이야기’ 여야 할 것 같았다.” 예술은 영속한 주물이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기적처럼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아름은 창작을 통해 스러져가는 목숨에 풍향계를 단다. 무수한 작가들이 세상에 이야기를 남긴 것처럼, 정성스레 단어를 조탁하고 미묘한 문장을 배열해 가혹한 삶을 미화한다. 현실감이 엄습하는 순간을 유예하고, 정서적 감응을 통해 세상을 완충한다.
아름이는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 돌려 말한다.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난 걸까. 미약하나마 삶에 의미를 부여할 때 불가해한 세상이 가지런해진다. 불가해한 것이 그득한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결국 서술의 묘가 필요하다. 탄생과 동시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적절한 당위를 만들지 못하면 삶은 무의미로 휘발한다. 우린 어떻게든 이해에 가닿기 위해 뭔가를 적는다. 나뭇잎이 져 초록의 생명력은 사그라져도, 앙상한 가지에서 스산함이 비어져 나오니까. 그렇게 불행은 글로 표현될 때 근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작품의 에필로그, 아름인 죽기 전에 부모의 삶을 저만의 방식으로 각색해 자신의 탄생 설화를 완성한다. 내 존재의 자긍을 위해, 신의 실수로 만들어진 자신을 구원하려고. 단출한 문장에 미사여구를 붙여 꽤 그럴싸한 로그라인을 만든다. 너무 예쁘기만 한 소설은 아니냐는 누군가의 불평도 이해는 간다.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완전한 거짓도 그렇다고 사실도 아니다. 온 감각을 키보드로 두드려 생을 재현할 뿐이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위해 제 방식으로 글의 스타일을 만들어간다.좋은 글은 무기력한 모방을 버리고 표현을 주장한다. 세계의 정밀한 묘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접하며 획득한 감각을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김애란은 한 아이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을 최대한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와 격렬하게 다툰다. 그 결과 정밀한 묘사에 미심쩍은 마음도 어느새 사그라든다.
“그런데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내는 눈빛을 추파라고 하다니, 하고많은 말 중에 왜? 그러자 곧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듯 바람이 나를 보고 속삭였다. ‘가을 다음엔 바로 겨울이니까.’ 불모와 가사(假死)의 계절이 코앞이니까, 가을이야말로 추파가 다급해지는 시점이라고……귓가를 뱅뱅 돈 뒤 사라졌다.”
김애란은 <바깥은 여름>에서 이런 문장을 적었다.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풍경의 쓸모) 생은 본래 불행에 가까움을 느낀다. 살다 보니 웃을 일은 드물어 그때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사진으로 남긴다. 마치 그 순간이 지워지기라도 할까 봐 시간을 박제해야 직성이 풀린다. 생의 진면목은 사실 별거 없음을 의식한 탓이다. 일류 작가는 비극에 낙차를 벌려 장렬함을 극대화하고, 하늘을 뒤덮는 비애도 유머로 눙친다. 그래야 가끔 오는 근사한 순간을 더 즐길 수 있으니까. 불행에 근사한 이름을 붙여 비극을 만끽한다. 내 불행이 초라하지 않도록 꾸며내는 솜씨다. 그것이 내가 느끼는 김애란의 소설이 가진 태도다.
난 가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며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일 년에 한 번 홍상수 영화를 보러 연휴에 극장을 찾는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한 귀퉁이를 배경으로 뜻 모를 소리만 해대지만, 멀쑥한 먹물들이 모여 녹색병을 앞에 두고 이 얘기 저 얘기 떠들면 일상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극장을 나와 광화문을 지나 교보문고에 들어가면, 스테디셀러란엔 어김없이 김애란이 있다. 난 홍상수를 우러르듯 김애란을 읽으며 안도를 느낀다. 여전히 치열하게 생을 고민하는 작가가 나와 동시대를 삶에 감격한다.
김애란은 내가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 등단해 여전히 왕성하다. 등단 초기엔 신선한 청춘의 감각에 집중했고, 이제는 남겨진 사람의 자취를 염려한다. 몇 보 앞서가는 회사 선배처럼 그녀는 멀지 않은 누군가를 소설로 적는다. 내 경험의 유사 영역 아래 숨 쉬는 이들을 염려한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마치 커피 자판기에서 단 밀크커피를 뽑아 들고 건물 계단에서 몰래 소곤거리는 기분이다. 웅웅 울리는 공기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봐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마음을 토로한다. 번지르르한 도시 한구석엔 여전히 은밀한 고통을 겪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에 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스친 무수한 이가 떠올라 그녀의 말을 곱씹는다. 한창 그녀의 글에 심취했을 땐 기회가 닿는대로 그녀의 작품에 경애를 표했다. 커피집에서 다정한 사람들과 둘러앉아 그녀에 대해 떠들었다. 잠들기 전 졸린 눈으로 노트북을 켤 때도 그녀를 잊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녀의 글을 감싸고 돌본다. 연휴엔 그녀의 첫 산문집을 읽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