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일이 별로 없어

by 박민진

우리가 본지도 꽤 됐네요. 퇴근을 앞두고 당신의 웃음을 떠올렸습니다. 호탕하고 꾸밈없던 기쁨이 넘실거리는 광경이 생각나서 저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전 웃을 일이 없었는데 당신 덕분에 웃은 셈입니다. 그래도 요즘 평소에 잘 웃고 삽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잘 웃지 않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어쩌면 전 누구보다 잘 웃고 사는 걸지도 모릅니다. 떠올려보니 그건 다 다정(多情) 덕분입니다. 제 주변엔 놀랄 정도로 정이 두터운 이들이 많습니다. 전 그들을 보면서 삶이 썩 나쁘지 않음을 깨우치곤 합니다. 제 웃음엔 의례적인 게 많고, 업무에 기름칠하는 실용적인 미소가 대부분이지만 종종 시간을 내어 다정한 이들을 만나면 웃게 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웃음엔 일정 부분 상대를 향한 존중이 있던 셈입니다. 그게 그렇게 다행이다 싶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웃음이 다정한 기운이라면 당신 웃음은 제게 은밀한 관능이었습니다. 당신 웃음을 떠올리니 환한 얼굴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떠오릅니다. 특히 저녁 무렵 발그레하게 미소 지을 때 참 기뻤습니다. 모든 게 열려있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전 당신의 얼굴을 참 좋아했습니다. 내 품에서 아기처럼 잠에 들고, 내가 불안해할 때 잘 안아주던 당신이 그립습니다.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운동을 하러 가서 땀을 쭉 뺐습니다. 샤워하고 나오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날씨였습니다. 저녁 밤공기가 가을의 절정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전 이 가을이 지나가는 게 아쉬워서 더 격렬하게 웃어젖혔습니다. 이 계절을 붙잡고 싶어서 온 힘을 다해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계절은 매해 지루하게 반복되는데 항상 저는 가을을 첫 손님처럼 환대하곤 합니다. 네온 속에 노을이 지고 영락없이 허기가 져 여지없이 스타벅스를 찾았습니다. 지금 이 시각이면 당신은 지하철에 올라 한강의 노을을 보고 있겠네요. 또 청승을 떨며 풀리지 않는 고민을 하겠죠.


사이렌 오더로 커피를 주문하며 생각했습니다. 카페를 가득 채운 웃음이 저와 무관하다고. 귀를 틀어막은 에어팟 음악은 오히려 절 소외시켰습니다. 구슬픈 발라드 가사처럼 노트북에 뭐든 끄적였지만 이제 당신은 제 곁에 없습니다. 당신이 그리워서 집중이 안 되고, 아무리 고쳐도 문장이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백스페이스를 때리듯 누르니 옆자리 학생이 날 노려보네요. 별수 없이 허공을 응시하며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받지 않을 걸 알면서 거는 전화는 신호음이 세 번 정도 울리면 끊게 됩니다. 이제 저를 그냥 스쳐 지나가고 더는 내 걱정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죠. 당신은 아무 말 없이도 버틸 수 있구나 싶어서 야속해졌습니다.


카톡으로 오늘 무사했냐고 물었습니다. 자질구레한 농담을 하며 별일 없는 척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내 글을 잘 읽고 있다고,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며 마치 먼 친척에게 안부를 묻는 것처럼 되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다 보고 있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죠. 저는 밤에 보지 않겠냐고 물었고, 당신은 못 이긴 척 집 앞으로 택시를 타고 왔죠. 전 1이 지워지지 않는 톡 창을 보며 당치 않은 기대를 했습니다. 당신이 오늘 밤 저를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에 차올랐습니다. 당신은 술을 마실 거고 그러다 내 생각이 나면 분명히 저를 찾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오늘은 고등학교 친구 성기와 통화를 했습니다. 반 박자 빠른 속도로 말과 말 사이에서 너스레를 떨던 재기 넘치는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먼 도시에서 이혼 전문 변호사로 살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강인하고 단단했던 녀석이 변호인단에서 진술서를 들고 따지고 드는 광경이 그려졌습니다. 전 종종 학교 다닐 때 녀석의 개그 레퍼토리를 써먹곤 했습니다. 녀석처럼 남을 웃기는 재주는 없어서 별 반응이 없었지만, 제가 말장난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도 다 성기 때문입니다. 녀석은 여자애들 앞에서 야한 농담을 더럽지 않게 잘했습니다. 전 그것까진 따라 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섹스에 관한 유머를 날리면 이상하게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그래도 우린 꽤 야한 농담을 많이 주고받았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킥킥거리고, 사랑을 나누면서도 이상하게 흥분을 자아내는 속된 말로 서로를 웃겼죠. 내 말장난은 요즘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는 중입니다. 당신만큼 웃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진지하게 충고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재 개그라는 말로 눈치를 주고, 웃기면서도 입술을 깨물고 꾹 참는 사람도 있습니다. 너무 웃음에 인색하게 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제 주변에는 뭐든 웃어주는 다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덕에 쉼 없이 농을 치며 살고 있습니다. 당신처럼 내 농담에 자지러지게 웃진 않지만, 그럭저럭 잘 통합니다.


며칠 전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날을 떠올렸습니다. 당신은 제가 빨리 집에서 나가주기를 바랐습니다. 아무리 웃긴 말로 당신 기분을 풀어보려고 해도 역부족이었습니다. 밀쳐내는 당신을 어째야 할지 몰라서 저 역시도 화를 냈습니다. 그럴 거면 왜 불렀는지. 주눅 들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 일로 당신을 미워하며 잊는 데 도움이 됐지만, 가끔 생각이 나면 가슴이 시큰합니다. 밤마다 회신을 기대할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아요.


요즘 전 속 시원하게 웃지 못하고 삽니다. 웃어젖히고 싶어도 기운이 없습니다. 격한 다이어트 탓이지만 저는 당신의 부재를 떠올립니다. 당신 없는 하루가 버겁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회의 도중에 시종 쓴 커피만 들이켜며 졸음을 참습니다. 일이 침체일로를 걸어가도 전 일 다음 또 일이 생기는 이 상황이 나쁘지 않습니다. 내일은 조금이라도 힘을 내서 다정한 사람들을 위해 커피라도 내려야겠습니다. 쿠키를 접시에 놓고 요즘 사는 얘기를 하면서 기운을 내려고요.


이제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의 근심이 사라졌으면 좋겠고, 하나뿐인 조카가 계속 건강했으면 합니다. 열심히 떠드는 주위 사람들이 더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쉼 없이 농담을 건넬 생각입니다. 그런 다짐을 하며 아파트 계단을 올랐습니다. 오늘 하루도 초가을과 함께 저물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