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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7. 2019

우두커니 정류장 앞에

 정류장에 한참을 서 있었다. 어디 갈만한 동네가 있나. 노선표를 이리저리 살폈지만, 피로가 앞선다. 아로나민 골드라도 사 먹어야 하나. 지금 먹는 영양제가 몇 갠데 이러냐. 이른 아침 청량한 날씨에도 이상하게 잠이 부족하다. 어제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의 사생활>이란 책을 읽으니 코골이와 무호흡증이 수면의 질을 좌우한다고 한다. 혹시 나 코 고는 거 아냐.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도 어제 내린 비에 씻겨갔다. 목이 칼칼한 게 감기 기운이 좀 있나 싶어서 그냥 평소대로 대방역 지하철로 향했다.


 누구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플랫폼엔 익숙한 모습을 한 사내가 비친다. 우두커니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고 있다. 포털 뉴스를 뒤적이지만, 별것 없어 액정을 끄니 둔탁한 얼굴이 보인다. 표정이 없어 입꼬리를 올려 스마일을 만들었다. 창밖을 보니 늘 보던 노들섬이 오늘도 똑같다며 시위한다. 내가 못 본 사이에 노들섬은 싹 바뀐 모양이다. 신기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니 카페도 생기고 번지르르한 건물도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한강 다리를 정처 없이 걸은 게 언젠가 싶다. 지난 계절에 노을을 보며 감상에 젖었건만,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자꾸 지하철로 숨기 바쁘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디카프리오도 매일 똑같은 하루라는 실감을 지하철 정류장에서 실감한다. 비슷한 모자를 쓰고 같은 종착지를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그들과 함께하는 게 못 견딜 만큼 숨을 조여 온다. 멋대가리 없는 시멘트 건물에 나사 볼트처럼 매일 하던 일을 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삶. 일이 경력이 되고, 하루하루가 쌓여 세월이 되면 노동자는 일종의 무심함을 비춘다. 흥분할 일이 줄어들고 돌아가는 꼴이 눈에 선하다.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같은 역에 내리는 삶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애써 만들어놓은 여권엔 도장이 찍힌 지 오래고, 오래전 세워둔 계획은 재고정리를 위해 창고에 쌓여있다. 디카프리오는 파리로 가서 살자는 케이트 윈슬렛의 호통에 눌려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다. 나도 종종 스카이스캐너를 켜서 최저가 항공료를 살피지만, 유럽 대륙은 멀기만 하다. 그 한 뼘도 안 되는 지점이 아득하기만 하다. 지중해풍을 맞으며 시칠리아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상상에 히죽거린다. 막상 여행할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회상은 늘 과거를 포장한다. 요란스럽게 울리는 전화가 내 공상을 깨고 지리멸렬한 일상을 되받았다. 수북한 투두 리스트에 겨우 한 개 체크하며 오전을 흘려보냈다.


 난 하고픈 게 별로 없다. 그걸 인정하지 않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삶의 질은 호기심이 좌우하는데 난 늘 같은 궤도에 머문다. 조금이라도 방향을 틀라치면 몸을 사린다. 잃을 것도 없으면서 몸을 수그리고 안전을 지향한다. 사람 관계도 일도 심지어 글쓰기도 비슷비슷 그렇게 정적에 휩싸인다. 수전 손택은 “글을 쓰려면 (자기의 온갖 모습 중에서도 가장)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에 스스로를 허락해야 한다”라고 했다.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나를 직시할 때 글에 바닥이 보이면서 얻어지는 쾌감이 있다. 최저점을 인정하고 그걸 나로 인정해버린다. 난 내 모습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작은 우물 안에서 규칙적이고 틀에 박혀 지낸다. 반복과 규칙을 옹호하고, 통찰과 일탈을 경계한다. 그런 취미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조금 서운하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다. 

 올더스 헉슬리는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라고 말했다. 가령 하루에 한 번 들르는 체육관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렇다. 냄새나고 끙끙거리며 인상을 쓴 자들이 난무하는 곳이지만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몸과 마음이 평온해진다. 매일 들르는 카페에 가방을 올려놓고, 매일 발을 디디는 보도블록을 지나 어두컴컴한 동네 골목에서 '나플라'의 음악을 듣는다. 귤을 까먹으며 속을 시끄럽게 하는 놈들을 휴지에 싸서 버리고 문틀 철봉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별반 다를 거 없는 밤, 수잔 손택의 단호한 글에 밑줄을 친다. "예술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 경험해야 한다." 도통 이해를 못 해 어쩔 수 없지만 어제완 조금 다른 문장을 밑줄을 치며 삶을 그 자체로 맞닥뜨린다. 별반 다를 게 없지만 머리를 울리는 문장을 상기하며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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