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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20. 2019

아무리 잔혹하다 할지라도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는 홍상수의 겨울 영화는 밤거리를 걷는다. 코트를 여미고 카페와 고갈비집을 기웃거리며 낯선 생각을 한다. 그걸 엿보는 재미에 난 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본다.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살고 싶어서. 통념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잘 보고 싶어서. 그래서 난 요즘도 홍상수 영화의 배경이 된 북촌과 종로 일대를 산책한다. 홍상수의 겨울이야기에 머물고파 자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겨울이 오니 눈 오는 수원을 배경으로 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떠오른다. 15년 여름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이 영화를 봤다. 상영관을 나와 이끌리듯 곧장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수원에 가서 행궁 주위를 배회하며 그들이 머물던 공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눈발이 날리는 허름한 골목에서 커피를 사 마시며 마음을 녹이는 함춘수와 윤희정을 떠올렸다.

 무던히 춥던 날 함춘수는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GV 행사에 참여하려고 수원으로 향한다. 그는 꽤 심심했던지 하루 일찍 도착해 호텔방을 잡고 화성행궁 근처를 돌아다닌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함춘수는 예술영화 몇 편을 만든 먹물 감독이다. 부가적으로 덧붙이면 여자 같은 사람을 보면 한없이 감동하는 천진한 남자다. 커피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그는 행궁 내에 있는 복내당에 들른다. 그는 느닷없이 ‘복내(福內)’란 단어를 상기한다. "일으켜 얻는 것은 밖으로부터 이고, 복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안으로부터다." 그때 햇살이 내리쬐는 평상에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는 윤희정과 마주친다. 정말 복이 생겨난 것일까.

 윤희정은 귀여운 여자다. 그녀는 모델 일도 하고 가끔 그림을 그리며 산다. 두 사람은 대화가 잘 맞는다고 느꼈는지 한껏 들뜬 모양이다. 어느새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하며 담소를 나눈다. 서로를 알아가며 몸이 스르르 풀린다. 늦은 밤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에 심취한 두 사람은 애틋한 마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희정의 작업실(행궁동 레지던시)에서 시작해 초밥집(이찌마라 스시), 전통찻집(시인과 농부), 수원 팔달산 아래 불상이 눈에 들어오는 희정의 집 앞까지 거닌다. 문득 강원도로 떠날까 고민하던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짐을 받아들인다.


 영화가 독특한 건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이다. 지금과 ‘그때’와 ‘지금’이 연이어 등장하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보여준다.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진심이 동할 때 맞아 들어가고, 거짓으로 일관하면 어김없이 틀려먹는다. 그러는 새 과거와 현재가 섞여 들고 시간과 공간이 모호해진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이 커피 프림처럼 서로에 눈에 섞이고, 살을 에는 추위는 맑은 햇살처럼 달뜬 육체 앞에 누그러진다. 그래서 이야기는 반복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렸지만, 다시 만나진 않을 것이다. 홍상수의 수원 여행이 다시 있으리라 믿을 수 없고, 희정이 그 귀여운 얼굴로 서울로 떠난 춘수를 굳이 찾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갔고 진심도 그 순간뿐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우연에 의해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생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한낱 그림자에 가깝다. 일상이 아무리 잔혹하다 할지라도 찰나에 가까워 견딜만하다. 영화는 현재를 응시하며 통념의 찌꺼기를 털고, 위악과 전형에서 벗어나 진실을 털어놓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나았을까. 고민하고 자책하지만 그건 기억이 만든 회한에 불과하다. 후회는 술안주에나 어울리는 주전부리니까. 취해 휴대폰을 보며 처자식을 생각하는 춘수의 근심과 다른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뜨는 희정의 주저함은 이내 엇갈린다. 어그러진 말들이 장난처럼 오가고, 속내를 감추고 떨쳐낸 사심이 속살처럼 올라올 때 영화는 처연한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혹독한 날씨에도 미련을 품고 인연은 멀어져 간다. 꽃이 피고 지듯이 상황이 미묘한 결로 흩어진다. 그게 이 겨울을 견디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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