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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20. 2019

살아있음을 느끼다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제목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지만 영희 곁엔 늘 다정한 사람들이 함께한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강릉의 한 해변까지 영희가 홀로인 시간은 드물다. 지인들은 그녀를 위해 술자리를 열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등을 토닥인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도, 함께 술을 마시는 그들도 그녀가 혼자임을 안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쓸쓸한 공기는 떨쳐내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고독이다. 짙게 드리운 슬픔이 스크린 위로 팽배하다. 추운 강릉의 어느 커피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영희는 스러질 것처럼 나약하다. 아무리 주변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도 상실을 머금은 이는 일상을 배겨나기 어렵다. 영희는 지금 겉돌며 간신히 버티고 서있다. 그리움은 통증과 같아서 매 순간이 혹독하다. 여차하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고독. 위태로운 걸음과 널뛰는 감정. 영화엔 그녀의 감정만이 오롯하다.


 영희는 남자의 연락을 기다린다.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유부남인 그는 지금에 어디에 있을까. 함부르크의 한 공원에서 지인과 산책을 즐기던 영희는 느닷없이 녹슨 다리 앞에서 무언가를 향해 절을 올린다. 이별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녀는 그 순간 구원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평생 믿지 않았던 존재를 향한 기도엔 무력감이 배어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큰 이야기 얼개 없이 오직 그녀의 기분을 좇기 바쁘다. 그녀의 슬픔, 고독, 분노, 오열, 자조, 체념. 김민희는 너른 감정을 그러모아 한 그릇에 담아낸다.


 영희는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 어려서 공부가 부족했고, 지금은 시간이 지천이니 독서를 해보겠다고 말한다. 난 그녀에게 책이 있다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책장을 넘기며 고독으로 말미암은 안식을 얻기를 바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의 한 횟집에서 남자를 마주한 은희는 그에게서 한 권의 책을 선물을 받는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사랑에 관하여>. 그는 낭독을 청하는 그녀에게 한 구절을 소리 내 읽는다.

"헤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객실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둘 다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난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에 몸을 맡겼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의 얼굴, 어깨 그리고 젖은 손에 키스할 때, 그때 우리는 정말 불행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고, 사소한 것이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해변에 누워있던 영희가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가며 끝난다.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뜨고 모래를 털고 걸어가는 그녀는 괜찮아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결연한 의지가 비어지고, 객석에 앉은 나는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턱을 치켜든다. 난 살아있음을 느끼며 극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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