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저
수십 권의 소설을 쓴 작가 '스티븐 킹'에 의하면 글쓰기란 정신 감응이며, 문학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응이라고 적었다. (유혹하는 글쓰기 중) 독서를 하며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나와 저자가 잘 맞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문장의 생김새와 단어를 어루만지며 내가 자연스럽게 그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갖는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시종일관 멀리 가지 않고 내 지근거리에 있었다. 백지만 보면 겁부터 내는 나 같은 애송이를 위해 이런저런 말을 해준다. 어깨를 툭 치기도 하고, 등을 쓰다듬기도 하면서 다 첨엔 그런 거라고 구슬린다. 이런 책도 있고, 이런 음악도 있는데 끝내주더라. 평상에 마주 앉아 과자 나부랭이를 좀 깔고 카스 맥주를 들이켜며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떠드는 거다. 어려울 거 없다며, 안개가 자욱한 바깥 풍경을 보며 문장을 잇지 못해 긍긍하는 나 같은 인간이 태반이라고. 잔이 비울 새라 한 잔 따라주시니 문장들이 콸콸 쏟아진다. 역시 캔보다는 따라주는 재미가 있는 병맥주를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난 뭔가 찡해져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짓는 허튼 문장이 무의미로 사라져도 괜찮다고. 매일 비슷한 글을 쓰는 것 같은 불안감도 그때뿐이라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글에도 밤하늘 영롱한 빛이 있다며. 난 의심할 새도 없이 다정한 문장에 취해 연거푸 잔을 들이켠다. 정릉 꼭대기 하꼬방 경치는 내 생각과 달리 꽤 근사하다. 날씨가 추워 잠바로 목을 여몄다. 그래도 술이 좀 들어가니 취기가 돌아 살만하다.
퇴근하고 온몸이 녹초라 소파에 드러눕고 싶지만, 어렵사리 뭔가를 적는다.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은 누추한 세간도 어여삐 뵌다. 레이먼드 카버도 '키친 테이블 노블'로 생계를 꾸렸다지. 다들 그렇게 적고 고치고 망설이다 지우길 반복하고 있겠지. 일상을 멈춰 세우고 지금 잘 지내고 있는지 자문하면서. 어쩐지 용기가 나 노트북을 편다.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글이 서랍에 수북하다. 가끔 내가 쓰는 글이 전적으로 혼잣말에 가깝다고 느낀다. 종일 머릿속을 부유하는 잡념을 쏟아낸 탓에 헛소리가 즐비하다. 형체를 알 수 없었던 불안이 문장으로 드러나면 내가 더 초라해진다. 어렵사리 찍은 마침표는 대부분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가끔 보면 맘에 들 때도 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드물다. 그래 이 정도면 꽤 근사한 생각 아닌가, 싶을 때 업로드 버튼을 누른다. 감명 깊게 읽은 책과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일말의 선의를 핑계 삼아 비천한 생각을 전시한다. 슬펐다, 좋았다, 지렸다, 오지다 같은 의심스러운 말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내 글이 안쓰럽다.
종종 누군가 내 글을 읽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는 혼자 글을 쓰면서도 타자를 의식한다. 누군가 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무궁한 가능성을 품는다. 헤어진 지 오래된 연인이 이 글을 몰래 보면서 나를 비웃진 않을까 걱정하고, 나를 잘 아는 직장 동료가 평소 내 행실을 떠올리며 역겨워하진 않을까 불안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미약하게나마 그의 일상을 뒤틀고, 의도치 않게 부정적으로 몰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글을 읽는 그들을 상상하길 멈추지 않는다. 아니 더욱더 치열하게 그들의 존재를 의식한다.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고 마음에 들어가 보려는 심적 상태를 동경하기 때문이다. 내게 그런 태도는 문학이 현현하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기만적 위로가 아닌, 내 삶의 가치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어떤 삶을 택하든 나를 살피고 다듬어서 최대한 자족할 수 있기를. 이 삭막하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누군가의 불행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글을 쓰다 잠깐 졸았는데 악몽을 꾸었다.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20분 만에 눈을 떴다. 꿈이라는 게 참 모호해서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이라고 생각되는 당혹스러운 장면이 예고도 없이 내 의식으로 스며든다. 난 몸을 일으켜 식은땀을 닦으며 찬물을 마셨다. 식도가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차가운 느낌에 몸서리쳤다. 잠에서 깨고도 피곤한 상태에 도무지 뭘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출출해서 라면을 먹으려는데 꿈에서 들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꿈은 전화로 시작된다. 컴퓨터로 야구 중계를 보며 멍하니 있던 나는 유달리 요란스럽게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한동안 울먹이던 어머니는 말을 잊지 못하고, 그럴수록 내 불안은 커져만 간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그녀는 오열하며 큰일이 났다고 했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내 속을 뒤집어 놨다는 느낌만 든다. 마음이 쓰려 울어버렸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슬픈 목소리뿐이다. 어쩌면 좋겠냐는 애타는 말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꿈이었음에 안도했다. 주먹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이 얼얼했다. 실상에서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게 불현듯 꿈에 등장한다. 소파에 앉아 엄마와 통화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드라마에 심취한 목소리에 기분이 풀린다. 다시 작은 방 책상에 앉아 뭔가를 적으려니 힘에 부친다. 이 느낌을 글로 풀고 싶은데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난 평생 이렇게 못 미치는 느낌에 시달리며 살 거라 생각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을 어떻게든 풀려고 화면만 한없이 바라보겠지. 아침만 되면 요사스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찡그리고 어젠 왜 그렇게 늦게 잤냐고 밤을 타박하겠지. 오늘은 유난히 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