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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27. 2019

망상에 시달리는 남자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잡지를 통해 서양미술을 접한다. 미술이란 게 평소 접할 기회가 적으니 잡지라도 보며 눈에 익힌다. 사실 그것마저도 쉬운 건 아니지만 내가 모르는 영역을 탐독하고픈 맘에 눈에 힘을 준다. 미술 문외한인 난 미술계 용어들이 낯설다. 잘 모르겠네, 하며 술술 넘기다 보니 우연히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이야기에 눈이 갔다.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은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로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떠났다. 밝고 강렬한 색채를 가진 그의 그림을 떠올리면 그 섬이 어떠했는가 상상할 수 있다. 훌륭한 예술가 중에는 기인이 많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평범함과는 좀처럼 인연이 없던 그였다. 그런 고갱마저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기행을 저지르는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바로 '빈센트 반 고흐'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며 돈독한 우정을 나눴다. 고갱은 자연스럽게 고흐와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이라는 화실에서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며 오순도순 잘 살아간다.

 두 사람은 언제나 그림을 그리며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비워내는 술잔, 혀를 지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점차 어둠이 짙게 깔린다. 어느 시기부터 고흐는 술만 마시면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거나, 느닷없이 폭력적으로 굴어 진저리치게 만든다. 훗날 고갱은 이 시기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나는 아를을 떠나야 했어. 고흐가 너무 이상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지. 심지어 나에게 정말 떠날 거냐고 묻기에 난 그렇다고 대답했어. 그랬더니 고흐는 신문에서 ‘살인자가 도주했다’라고 적힌 문장을 찢어 내 손에 쥐여줬다고.” 고흐는 항상 친구 고갱이 그들의 보금자리인 아를을 떠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에 시달렸다. 그들이 구성한 공동체가 무너질까 봐. 고갱이 더 나은 곳으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까 봐. 망상은 멈출 수 없이 그를 덮쳤고, 정상적인 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친구인 고갱으로서는 절친했던 고흐가 미쳐버렸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고갱은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 증거로 고갱은 그 뒤로도 항상 식사 후에 고흐와 산책하며 지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사단은 어느 맑은 날 오후에 벌어진다. 어느 날 고갱 혼자 산책에 나섰는데, 그를 몰래 따라나섰던 고흐는 고갱에게 이를 들키자 "너는 말을 하지 않아, 하지만 나 또한 말하지 않을 거야."라는 미친 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 사건 직후 고흐는 곧장 산책에서 돌아와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다. 시간은 밤 10시, 평소라면 카페에서 술을 진탕 마실 시간이었다. 고흐는 귀에서 솟구치는 피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를의 집에 자신이 손수 고른 노란 가구들에 튄 핏방울을 보며 아마도 고흐는 어떠한 결심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증거로 고흐는 곧장 자신의 잘린 귀를 가지고 라셸이라는 평소 자주 찾았던 매춘부를 찾아간다. 그리곤 잘라낸 귀를 고갱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와 깊은 잠을 청한다.


 '불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매우 밀접한 개념이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우리의 삶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불안을 맞아들이고 또다시 그것을 떨쳐내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와 함께 독일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야스퍼스'는 불안과 망상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망상이 왜 생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망상의 내용과 그 사람의 관계는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인즉슨 망상이라는 증상에는 그 사람의 징후를 나타내는 인과가 녹아있다. 이는 조현병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정신 분열이란 100이라는 정보에서 10이라는 신호와 90이라는 잡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30~40의 잡음들을 신호로 받아들여 의식을 집중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자신만 의식할 수 있는 망상을 시작한다. 마치 수순처럼 마음속 방공호를 만들어 숨어버리고, 극단에 이르면 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구에 불탄다.

 고흐의 망상 안에는 음란하고 방만했던 고갱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는 듣지 못했고 말하지 못했기에 온갖 상상을 동원해 자신의 낭만을 망쳐버렸다. 극단으로 이른 망상의 끝엔 어김없이 짙은 어둠이 드리운다. 잠을 의식하면 오히려 잠이 들지 못하는 것처럼, 불안을 떠올리면 그 불안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평생 제 그림 한 장 팔지 못했던 남자. 제 음울한 얼굴을 숱한 자화상으로 남긴 화가. 슬픈 눈과 무표정한 얼굴 사이에 잡히지 않는 현실감이 있다.

 종종 단순히 망상으로 치부했던 불안이 현실에 드러날 때가 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비극은 연쇄작용으로 판을 키워간다. 거대한 폭풍우가 내 앞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하지만 어쩐지 표정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건 두려움보다는 잡히지 않는 불안의 형태를 어떻게든 들여다보려는 마음 때문이다. 태연하게 온몸으로 받아내고 살펴보는 거다. 지금 난 어떤 망상에 시달리고 있을까. 난 오늘 내 망상과 불안을 적어보려 했으나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죽은 지 백 년도 넘은 반 고흐를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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