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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05. 2019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다가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문장에 밑줄을 쳤다. 종일 찌들어 퇴근하고 이 문장을 노트에 적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오리무중이다. 오늘 무수한 것들을 스쳤는데 뭐 하나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다. 동료들과 술 한잔을 걸치고 헤어졌지만 찜찜한 마음이 든다. 응어리진 뭔가가 있어도 숙취와 함께 사라졌다. 숙취야 내일 아침이면 미역국에 풀릴 테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난 형체 없이 떠다니는 상념을 보려고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늦은 밤에 낮에 잃은 것들을 끄집어내서 들여다본다.

 글을 쓸 때 언어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래서 자주 허공을 응시하고 허벅지를 긁는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가 버거워 부산스럽다. 볼품없는 문장을 적으면 절로 무력감이 든다. 하지만 뭐라도 써야 불안이 사그라지니 어쩔 수 없다. 부단한 성격은 쓸데없이 문장을 늘어뜨린다.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리고, 그러하여, 그런데도'를 남발하면서라도 어찌할 바를 적어나간다. 삽질에도 근력이 붙는지 한결 수월한 기분에 휩싸인다.


 늘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한다. 어렵사리 책을 펴도 귀가 팔딱거리며 또 읽고 싶은 책이 생긴다. 요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신간 몇 권을 더 주문했다.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으니 요령부득하다. 어머니는 분명 책에는 돈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는데, 요즘엔 책도 다 돈이라며 호통을 치신다. 뭐든 정도껏 해야 욕을 면한다. 다행히 오르한 파묵이 쓴 문장은 유려해서 잘 읽힌다. 근데 난 그걸 받아먹지 못해 다 흘린다. 되돌아가 살펴보지만, 의미가 혼비백산 흩어진다. 주위가 어수선해서 그런가. 문장을 붙들지 못하고 스쳐 지난다. 딴생각하느라 시간이 속절없이 지났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다. 어렸을 적에도 그랬다. 난 꽤 열심히 아동문학 전집을 읽었는데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빠서인지, 대충 읽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수십 권도 넘게 사들인 계몽사 아동 문고는 흔적조차 남지 않아서 거금을 들여 방문 판매 서적을 구매한 어머니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난 조바심 내지 않고 다시 문장을 붙든다. 비록 기억에 없더라도 내 세포 어딘가에 새겨지리라 믿어버린다. 내내 잠복해있다가 어떤 위기가 닥치면 날 구원해주겠지.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오래전 쓴 글을 읽으면 생경한 느낌이 든다. 어쩐지 내가 쓴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한가득하다. 현실의 나완 묘하게 다른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다. '당신 누구시오.' 물어봐도 딴소리만 한다. 그건 마치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처럼 시각 너머의 관념에 가깝다. 앙리 마티스의 그림처럼 색만 휘황하지 현실감이 없다. 어쩌면 글에는 내가 바라는 이상향과 애써 보이고 싶지 않은 내가 담겨서 왜곡되는지도 모른다. 마치 인스타그램에 담긴 나처럼 현실과 거리를 둔 이미지만 남을지도. <내 이름은 빨강>에서 등장하는 살인사건도 이런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유럽식 화풍이 오스만 튀르크 말기의 이스탄불에 스며들고, 기존 이슬람 전통 화가들은 생계가 위태로워진다. 결정적으로 술탄이 유럽식 화풍을 적극 지지 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변화하려는 자와 지키는 자가 맞부닥쳐 갈등이 벌어지는 양상은 흔하다. 하지만 그 갈등이 예술과 종교로 번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이슬람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믿는 신은 현실과 달리 전지적이라 그런 수고로움이 필요 없다. 금을 덧씌우고 색을 찬란하게 그리는 데 공을 들여도 그깟 원근법 따윈 무시한다. 신은 저 높은 바벨탑 꼭대기에서 우릴 굽어보는데 원근법 따위를 따질 리가 없다. 쪼그마한 인간은 길바닥의 모래처럼 구분할 수 없다는 식이다. 고작 인간 따위가 보는 방식을 이슬람 화가에게 적용하라는 건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한다.

 난 통념에 세차게 휘둘리는 사람으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겠다는 예술가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을 내키는 대로 그려내고 그걸 믿어버리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그런 사람이다. 소설에서 카라라는 잘생긴 청년이 나오는데 그는 유부녀이자 어릴 적부터 짝사랑한 한 여자를 사랑한다. 남이 보기엔 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여.'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에 투신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 온통 그녀가 아른거리는데 원근법 따위 따질 리 없다.


 오늘은 <내 이름은 빨강>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 남겼다. 생각을 곱씹어도 별것 없지만, 좋으면 좋은 대로 별로면 별로인 그 자체로 정확한 감각을 적었다. 상상의 발로가 글에 드러나 누추한 현실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역시 소설 얘기는 않고 실컷 딴소리만 늘어놨다. 늘어놓은 문장을 읽어보니 평소 의식하지 못했던 생경한 내가 얼핏 보인다. 도시를 에워싼 무수한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 홀로 들판을 걷는 비루한 내 뒷모습이 보인다. 조심스럽게 카라의 뒤를 쫓아 세큐레의 청순한 얼굴을 훔쳐봤다. 이 글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오르한 파묵을 읽는 일상구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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