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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15. 2019

이해할 수 없는 일상

대성당,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살아가다 보면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땐 종종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일상에 뻥 뚫린 구멍을 내려다보고도 미처 돌아볼 새 없이 스쳐 지난다. 늦은 밤 뭔가가 떠올라 기억을 구슬려보지만,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꺼풀만 무겁다. 언어는 애초에 불완전해서 내 생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난 소설을 읽으며 창밖으로 멀리 어두워지는 늦저녁 하늘처럼 불가해한 마음을 풀어낸다. 정체 모를 기분에 허우적거릴 때 문학적이라는 말로 위안을 얻는다. 미묘한 문장과 정성스레 조탁한 단어가 감정의 틈을 파고든다다음 세 권의 소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상을 파고든 작품들이다.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2019)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을 읽으며 작가를 자신을 의식하지 않기란 어렵다. 작중 화자 대부분이 이혼했거나, 알코올 중독자며 실직을 당해 우울한 처지기 때문이다. 삶을 살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변화구가 날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우린 최대한 몸을 구부리며 그 시간을 버텨낸다. 별수 없이 비탈에 몰려 허리춤을 짚고 서서 참아보는 거다. 위안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갖다 붙이기엔 가혹한 시간, 레이먼드 카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적는 사람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현실이지만 뭐라도 붙잡고 힘을 내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며 나지막이 말문을 연다.

 수록작 중 하나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화자다. 삶이 일제히 무너지는 시간, 괴상한 전화가 빗발친다. 경황이 없던 부부는 며칠 전 아이의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고 까맣게 잊은 참이다. 빵집 주인은 별다른 말 없이 무례한 말투로 화를 내고 전화를 끊는다. 되풀이되는 전화벨 소리에 부부의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끝내 화를 참지 못한다. 부부는 노기를 띠며 가게로 쳐들어가고, 영문을 모르는 빵집 주인은 겨우 사태를 파악하곤 말을 잇지 못한다.

"그는 컵을 찾아 전기 커피메이커에서 커피를 따랐다. ‘아마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만든 따듯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 롤빵은 따듯하고 달콤했다."

 난 문학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데 회의적이다. 소설을 통해 뭔가 대단한 걸 깨달았다는 과장은 질색이다. 음습한 일상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내게 문학은 변기에 앉아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자정 무렵 침대에 기대 잠을 청하는 용도가 다다. 소설은 종종 독자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순간뿐이고 켜켜이 쌓인 일과엔 낭만이 깃들 새가 없다. 문학의 가치를 부풀리는 순간 그 길로 가짜가 되고 만다. 레이먼드 카버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 후 침대에 누워서 제인 그레이의 책을 읽던 모습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좁은 집구석에서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평온을 맛보던 중년 남자의 사적인 시간을 그려본다. 그게 카버에게 독서가 주는 위안이었다. 그건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건네는 갓 구운 롤빵과 같고, 별건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시간이다. 망자는 돌아올 리 없고,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쉬이 낫지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으로선 서로를 마주하고 먹는 따듯한 롤빵 하나가 전부다. 그 순간 잠시나마 바람이 옷을 적실 때처럼 한결 마음이 느슨해진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저(2019)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화자 이름은 '기 롤랑'이다. 그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억상실증에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지독한 독서광이었던 기 롤랑은 정신착란과 환영을 보는 증상까지 있어 고통을 겪었다. 그는 사라진 과거를 찾겠다며 온 파리 시내를 들쑤시고 다닌다. 소설은 그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따라붙어 기구한 사연을 엿듣는다.

 과거가 사라진다는 건 어떤 상실감을 자아낼까. 보잘것없는 제 인생을 지우고, 누군가의 문학을 대입시킨다는 건 어떤 삶일까. 모디아노의 글은 느슨하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쩐지 처연하고 어딘지 모르게 스산해 독자를 매혹한다. 낡은 빅토리아풍 탁자, 차갑게 식어가는 찻잔, 낡은 소가죽 구두, 알싸함만 맴도는 거리와 네온사인의 아스라함이 선연하다. 작법 자체가 애매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쓰여 의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라는 제목처럼 대상의 모호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소설이다. 난 등불처럼 사라지는 스쳐 간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기 롤랑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그들에게 잊힌 것을 캐묻는다. 이제는 해변을 거니는 무수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버린 과거가 남긴 아스라한 채취를 가늠한다. 어디에도 남지 못하고 오로지 누군가의 사진 한 장에 박제되어 버린 영혼 한 토막이 소설에 남겨진다. 난 그들이 있었음을 상상했다.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속상하다. 아이 같은 생각이지만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기억을 더듬는다. 반쯤 지워진 내 흔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몰라 불안하다. 그런 사람이 이 도시에 수두룩하리라 미루어 추측한다. 항상 뭔가를 적으며 기억해내려 애쓰지만 결국 기억의 가장자리에 머문다. 손쓸 새도 없이 지워진 그들의 손을 잡지 못해 버둥댄다. 굽은 등으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글을 쓸 땐 종종 누락이 주는 상상에 의지한다. 부재는 일종의 가능성처럼 주위로 쏟아진다. 난 그걸 어렵사리 주워 가능성 없는 낙원을 글로 옮긴다. 기억이 지워진 만큼 뭔가를 글로 잔뜩 채워놓았다. 열심히 쌓았다가 부수길 반복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으며 망각의 두려움 앞에 서글픔을 느꼈다. 어둠 속에 침잠하면 그런대로 살만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찾아오는 무력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뮤리얼 스파크 저 (2018)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1930년대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영미에선 꽤 알려진 작가지만 국내엔 비교적 생소하다. 에든버러 마르시아 블레인 사립 여자중학교 한 교실, 담임인 ‘진 브로디’는 아이들에게 일갈한다. 자신은 전성기를 보내는 중이며 내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는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고. 선생은 일부 아이들을 ‘브로디 그룹’이라 명하며 특권을 부여하고 학생들을 권위를 통해 굽어본다.

 학창 시절엔 울타리가 작아 매일 만나는 친구와 교사가 가진 영향이 상당하다. 진 브로디는 누구나 한 번쯤 겪은 바 있는 학창 시절을 지배한 그를 형상화한 캐릭터다. 2차 세계대전 후 연인을 잃었으나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한 진 브로디는 사회에 반감을 품은 젊은 교사다. 그녀의 급진성은 성향은 가뜩이나 보수적인 사립학교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다. 이는 기존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회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 약자에 대한 처우 개선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던 시절이 아닌가. 진 브로디는 영국 중산층 가정 학생을 대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종교 갈등, 교육 보수화가 가진 병폐를 자연스럽게 끄집어낸다. 하지만 역사 개혁이 늘 그랬듯 위태로운 면이 적지 않다. 가령 옳은 길을 위해서 속임수 정도는 눈감을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 하며, 무솔리니 파시즘에 대한 찬양을 거리낌 없이 발언하기도 한다. 아직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채 시작되지도 않던 시절이다. 폭력을 통해 세상을 구출할 수 있다고 믿는 선동가의 목소리가 거리마다 울린다. 진 브로디는 이른바 큰 가치를 위해서라면 작은 가치는 뭉개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브로디 그룹 학생 모임에서 열등한 학생을 일부러 끼워 넣어 우월감을 얻어내는 방식은 지극히 폭력적이다. 그녀에게 낙오자는 필요악일 뿐이다. 계급투쟁이 발발한 무수한 희생자를 모른 척하는 단상 위 선동가처럼 맹목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을 위해 거치적거리는 눈엣가시는 치워 마땅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일그러진 영웅의 몰락, 참호 속에 파묻힌 가치들. 이 소설은 처절한 실패담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됨을 알렸던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암호명은 ‘리틀 보이’였다. 어린아이, 꼬맹이, 꼬마라는 뜻이다. 이보다 부드럽고 감동적인 단어가 어디에 있을까. 황금빛 얼굴로 대지 위를 향해 날아간 쇳덩이의 구호다. 그 일촉즉발의 시간, 누군가는 이 폭탄이 휩쓸어버릴 땅 위의 아이를 떠올렸을까. 타인의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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