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도시, The Lonely City, 올리비아 랭 저
난 겨울이 좋다. 매해 이맘때쯤 어김없이 겨울이 온다는 건 축복이다. 겨울은 지겨워질 때쯤 사라졌다 되살아난다. 추운 날 커피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영화관을 들어갈 때 느낌이 좋고, 세탁소에서 두꺼운 옷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이 어여쁘다. 겨울이 오면 올 한 해가 썩 나쁘지 않았다고 합리화할 수 있다. 제행무상의 세상을 향해 너그러운 말을 보탠다. 다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나를 자축하는 시기다. 발도 못 맞추고 어영부영 좇기 바빴지만, 그럭저럭 해냈다며 안도한다. 올 한 해도 예년과 같길 바란다.
겨울엔 어딘가에 틀어박히는 경우가 많다. 스타벅스, 시네큐브, 대형서점에 가면 나를 찾을 수 있다. 사진작가 척 클로스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라는 말을 했다. 난 뇌수가 내리치듯 쏟아지는 영감을 믿지 않는다. 결국, 궁둥이를 붙이고 버텨야 글이 나온다는 걸 잘 안다. 겨울은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에 있어 최적의 조건을 가진 계절인 셈이다. 틀어박혀서 뭘 하겠나. 읽고 생각하고 쓰다 보면 겨울도 금세 지나간다. 그래서 내 브런치엔 유독 겨울을 배경으로 한 글이 많다. 누군가는 가을이야말로 글을 쓰기 좋은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가을은 놀기 좋은 계절일 뿐 글을 위한 계절은 아니다. 하늘이 그렇게 맑고 날이 선선한데 누가 허구한 날 앉아서 골몰하나. 겨울이야말로 쓸쓸하고 처연해서 절로 뭔가를 적고픈 계절이다. 입김이 쏟아지는 날씨에 뜨거운 커피를 목구멍에 들이붓듯 잡념이 백지로 쏟아진다.
내 20대는 혼자인 기억이 대부분이다. 요즘엔 혼자 사는 이들이 예능 프로의 주요 포맷이라 익숙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혼자라는 건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상태였다. 고독이라는 어휘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한국에서 혼자라는 말은 훼손된 상태를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혼자 지리멸렬하게 의식했다. 예능에 나온 셀럽은 발랄하게 혼자 즐기지만, 내겐 그의 모습이 다다이즘 화가의 작업물로 보인다. 화려한 주방에서 시간과 공들여 완성한 요리를 혼잣말하며 먹질 않나, 손님을 초대하곤 자기 침실을 소개하는 이해 못 할 짓을 벌인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혼자 사는 집이 청결하다. 그 운동장 같은 집이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하다.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현실감이 떨어진다.
탄탄한 경제력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자의식으로 무장한 네오 싱글이 이 도시엔 그득하다. 이렇게 수많은 개츠비가 모여 살다 보니 밤은 휘황하고 문학은 자취를 감췄다. 21세기의 집시는 세속적 휘장을 두르고 지하철을 탄 일개미를 굽어본다. TV를 보며 발가락을 후비던 난 리모컨을 소파에 던지고 잘 읽히지 않는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를 폈다. “나는 미국의 풍경을 그리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을 그리려고 했지요.” 에드워드 호퍼는 평생 인터뷰를 싫어했고, 사람 만나는 걸 꺼렸다. 파리에서조차 어떤 화가도 만나지 않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뉴욕에 정착한 뒤 그는 가난한 일용직으로 살았지만, 도시에 혼자 있다는 감정을 흔들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난 그가 외로운 와중에도 뭔가를 해냈다는 부분에 밑줄을 긋는다. 내 고질병은 주의 산만이지 고독은 아니라는 걸 절감하며, 잘 소화도 되지 않는 문장을 곱씹으며 예술가의 고독을 우러른다.
서울의 원룸 오피스텔은 이제 교회당보다 많고, 혼자 사는 가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우후죽순 늘어났다. 모두 예능에 나오는 연기자처럼 잘 먹고 잘살고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라면 물을 올리며 세탁기의 종료 신호를 기다릴까. 과거 도시 재개발로 인해 달동네 쪽방촌 거주민이 생계의 귀퉁이에 몰리는 광경을 봤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나. 값싼 연민을 품고 쯧쯧거렸나. 아니면 내 일이 아니라고 안도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즘 신림동과 노량진 뒤편 골목길을 산책하다 보면 마치 오피스텔로 이뤄진 벌집처럼 보인다. 달과 가깝긴커녕, 저지대에 자리 잡아 모든 습기를 빨아들인다. 여차하면 떠날 준비를 마친 도시의 이방인들은 단출한 살림과 혹독한 월세를 감내한다. 이 도시의 주인은 따로 있어 뿌리를 내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 벌집을 그저 나쁘게만 볼 수도 없다. 그 작은 공간도 내가 사는 방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하나뿐인 아늑한 보금자리일 테니. 자그마한 침대에 기대 책을 읽고 도마 하나 놓기 어려운 부엌에서 나만의 요리를 한다. 손수 마련한 책장에 꽂혀있을 책을 상상한다. 생활 양태를 일 인분으로 맞추고 세속적 가치에 반목하는 도시의 보헤미아가 느껴진다. 몰 취향을 혐오하고 번지르르한 놈에 콧방귀 뀌는 그런 아나키즘이야말로 지금 이 도시의 집시들이 버텨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축대일 것이다.
도시엔 수많은 고독이 공존한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온 이들은 고독을 마치 삶의 조건처럼 여긴다. 나 역시 고독이 사무칠 때 영화와 책을 읽으며 잠시 나를 마취한다. 예술은 도시인이 관계에 지칠 때 숨을 돌릴만한 시간을 내주니까. 그래서 난 주말에 향유하는 문화생활을 무척 중시한다. 사회의 부속품이 아니라 각자의 취향을 드러내고 일상을 벗어나 생각의 폭을 넓히는데 제격이다. 그래서 글을 적을 때도 '혼자' 읽고 구경한 것을 적는다. 예술 곁에 머물 때 도시의 고독은 비록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세간의 염려만큼 불행하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제법 숨이 가빠도 나만의 리듬을 지키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는 1인분의 몫을 일상에 드러낸다.
난 조심스레 홍상수를 좋아한다. 아닌 척하지만 아닌 듯 모른 듯 심취해 있다. 그렇게 영화를 많이 봤다고 할 순 없지만, 홍상수 영화만큼은 다 찾아봤다. 어떤 오해나 편견 때문에 그의 영화를 멀리하진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 속엔 통념에 쉽사리 흔들리는 인간과 이를 몇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공존한다. 살아가며 위선과 위악을 오갈 때 그의 영화를 보며 해방감을 느낀다. ‘아 나도 저 뻔한 인간들 사이에 있구나.’ 새롭게 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관성에 머물러 사는구나. 특히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낄 때 넷플릭스로 홍상수 월드를 찾는다. 떨치고 나아가고 싶어서, 거치적거리고 싶지 않아서 본다. 그의 영화 중 겨울을 배경으로 한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그 후>를 유독 자주 본다. 툭툭 털고 또박또박 걸어가는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 계속 돌려본다.
오늘은 술자리에서 새벽을 지새웠다. 혼자가 속 편하다고 술자리에서 떠들었다. 자리가 파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애석한 마음에 자꾸 헛소리를 뱉었다. 결국 새벽 술자리는 결핍을 남긴 채 끝이 난다. 가까스로 잡은 택시에 타자마자 매캐한 숙취가 밀려온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창에 기대 한숨 돌렸다. 그날 한 헛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후회뿐이다. 집에 도착해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더 나은 생각을 하고 요령껏 풀고 살았으면 싶다. 잠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