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1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가방을 여니 진동벨이 있었다. 순간 아득해지며 내가 어젯밤에 뭘 했는지 떠올렸다. ‘난 잘 취하지도 않는데 이게 뭔 일이람. 어젠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잖아.’ 그저 한낱 평범한 술자리였고, 집에 가기 아쉬워 이차로 커피집에서 목을 축였을 뿐인데. 이 당혹을 주변에 말하진 못했다. 창피함보다는 조금 무서운 마음이 일어서였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다니. 내가 통제하지 못한 시간에 난 뭘 했나. 잃어버린 시간은 내게 어떤 상징처럼 진동벨을 건넸다. 사무실에 출근해서도 울릴 리 없는 진동벨을 앞에 두고 커피를 마셨다. 혹여나 누군가가 보내는 신호를 놓칠까 봐 한참을 바라봤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어제 집에 들어온 기억이 없다. 이런 일시적 망각을 혹자는 필름이 끊겼다고 할 테지만, 나는 알코올 영향 없이 스스로 내 기억을 훼손했다. 어젯밤 주황색 조명이 눈을 찌르는 어느 술집에 앉아 나는 주위 사람 얘기는 듣지도 않고 먹태를 씹었다. 정확히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질겅질겅 바싹 짭조름한 노란 먹태를 벗 삼아 풀리지 않는 고민과 씨름했다. 어젯밤 내내 지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별말 없는 날 등한시하고 지들끼리 잘만 놀더라. 난 정신이 사나워 가끔 얼굴을 찡그리며 먹태를 씹는 되새김질에 속도를 붙였다. 그냥 집에 가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웠는지 그들 곁을 떠나지 못했다. 일행은 내게 종종 의례적인 말을 건넸지만, 난 동공이 풀린 눈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종종 이럴 때가 있다. 가슴 저미는 불안과 미심쩍은 기분이 연한 커피처럼 내게 스며든다. 거슴츠레한 얼굴로 당치도 않은 불길한 상상을 편다. 결론적으로 난 진동벨을 가방에 넣음으로써 스스로 위험신호를 보냈다. 아, 사장님은 어제저녁 얼마나 바쁘셨으면 진동벨 없이 내게 커피를 주셨을까.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얼마나 찜찜하셨을까. 자신을 스쳐 간 무수한 고객을 불신하고, 요즘 놈들은 다 글러 먹었다며 욕을 한바탕 했을지도 몰라. 애꿎게 죄 없는 알바를 구박하며 기분이 더러워졌을지도. 난 쪽팔려서 직접 돌려드리지 못하고, 사과 쪽지와 함께 택배 상자에 진동벨을 넣어 부쳤다. 다행히 진동벨은 내 곁을 떠날 때까지 끝내 울리지 않았다.
#2
어제 집에 들어와 도통 잠이 오지 않아, 김혜리 작가 블로그를 염탐했다. 가끔 익명으로 그녀의 블로그에 이런저런 댓글을 남긴다. 물론 무수한 인파가 몰린 그곳에서 대답을 듣기란 어렵다. 난 그저 어떤 의식처럼 매주 댓글을 달뿐이다. 일종의 회개처럼 성자를 향해 고민을 토로한다. 난 딸깍거리는 마우스로 내 결핍을 그녀에게 떠넘기고 편히 잠을 청한다.
종종 그녀의 답글이 달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난 하던 일을 멈추고 마치 사도신경을 읊는 자세로 곱씹어 읽는다. 지난주에도 기자님이 친히 내 댓글에 대댓글을 남겨주셨다. 내가 지하철에서 <씨네21> '영화의 일기' 꼭지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기자님은 고마움을 표하며 거기에 내 아이디를 추론하는 댓글을 남기셨다. 내 아이디는 ‘성촉절’을 의미하는 영어단어(groundhogday)인데, 이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원제이기도 하다. 작가님은 이를 알아보고 내게 의미를 물었다. 이런 세심한 사람 같으니. 난 또 감동에 휩싸여 정성스레 내 의미 없는 작명에 관해 설명했다. 난 언어에 민감한 사람을 보면 사랑에 빠진다. 세심하고 기민한 감각을 지닌 이를 보면 막연한 동경이 피어오른다. 너무 무차별적이라 헤어 나올 수 없다. 약도 없는 병이다.
#3
난 ‘섬세’와 ‘민감’, ‘세심’ 같은 단어를 좋아한다. 나와 정 반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 단어들을 볼 때마다 애틋하다. 하지만 동시에 기가 죽는다. 특히 일류 작가가 가진 민감한 촉, 문장에 새겨진 곡진함을 보면 문득 두렵다. 왠지 눈가가 촉촉한 사람만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저 세계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겠구나. 절망과 치기는 도를 넘어 어쩌지 못하고, 멜론 플레이리스트에서 힙한 힙합곡을 따라 부른다. 그래 문학은 개나 줘버려라. 난 세상을 헐뜯고 나만 잘난 힙합을 듣겠다. 일하다가도 자주 세심한 감각과 멀어짐을 느낀다. 쉽고 편하고 싶어 폭력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부지런히 뭔가를 관찰하고 생각에 빠지지만, 그마저도 자꾸 눈이 감겨 요원하다. 하루의 소멸이 목전에 다다라서야 조바심이 든다.
그날도(진동벨이 내 곁으로 온 날) 일과 중 일어난 미묘한 갈등에 마음이 쓰여 종일 고민했다. 내가 놓친 그의 입장과 순식간에 치솟은 흥분이 날 쥐구멍으로 몰았다. 난 뒤숭숭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즐기러 간 술자리에까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난 가끔 어떤 이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건, 사실 이해할 게 너무 많아 생긴 착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해는 피곤한 일이니까. 이것저것 고려하기 시작하면 쉽사리 지쳐버린다. 마치 뉴스 헤드라인처럼, 본문은 읽지도 않고 댓글을 다는 네티즌처럼 섣불리 속단하고 추측한다. 덮어두고 믿어버리면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어쩌면 내가 문학을 붙들고 사는 건 고된 이해를 풀어내는 일류 작가를 통해 실마리를 찾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사건의 스펙터클이 아닌, 사건 이후 스펙트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이니까. 정말 순수문학이라는 게 있다면, 그 '순수' 안에는 사건이 자아내는 파장에 따르는 빛의 성분이 줄줄이 적혀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 리스트를 분석해 빛을 자아내는 물질의 조성과 구조를 낱낱이 알아낸다. 문학은 내 편치 않은 마음을 다독이려고 이 밤에도 수고를 마다치 않는다. 그런 막연한 믿음으로 난 침대 귀퉁이에서 졸린 눈을 부여잡고 소설에 심취한다.
#4
'앤드루 포터'라는 낯선 작가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단편집을 좋아한다. 서점 직원이 이 책을 받아 들면 혹시 물리 서적 코너에 넣지는 않을까. 앤드루 포터라는 이름부터 뭔가 공학자의 냄새가 나니까.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 이후 가장 난해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제목은 검색창을 두드려보니 리처드 파인먼의 1985년 강연을 정리한 <양자전기역학: 빛과 물질에 관한 이상한 이론 QED: The Strange Theory of Light and Matter>에서 따왔다고 한다. 낮에 램프를 켜놓고 보면 빛이 유리창 표면에서 부분적으로 반사된다. 가령 빛의 입자 100개가 있다면 96개는 투과하지만 4개는 부딪혀 돌아온다. 문제는 누구도 빛 입자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단상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수록된 열 개의 이야기에 알맞은 주석이 된다. 한 사람이 하루하루 스치며 마주하는 일은 무수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극히 제한적이다. 내가 이 책을 몇몇 순간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그 정확하거나 중요하지도 않은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결국 그런 자취에 불과한 느낌에 의지해 삶의 감각을 깨우친다. 작가는 누군가가 스친 별거 아닌 순간을 정밀하게 묘사해 미묘한 생의 감각을 밝혀낸다. 이건 문학적 경험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다. 내 미천한 언어 조탁으로는 딱 이 정도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찬사다.
#5
이 책에서 가장 좋은 건 역시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다. 노교수와 여학생의 사랑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는 어느새 잊히고, 작가는 삶이 뒤틀린 지점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회한(remorse)이란 단어는 어원을 살펴보면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 인간이 다시금 회고한다는 건 그렇게 통증과 함께 일종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그녀는 노교수를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그가 남긴 몇몇 순간을 그녀가 환기할 때 우리는 문학적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 기억은 홀로 공원을 산책하던 주말 밤이나,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그녀를 찾아와 다시금 깨물고 사라진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다.
표제작 외 하나 더 꼽자면 <구멍>이라는 작품을 얘기하고 싶다. 고의는 아니지만, 친구를 죽게 만든 한 인물이 평생 그 사고에 매여 사는 이야기다. 머릿속으로 사건 재구성하고 제 과오를 탓하며 친구의 죽음에 미련을 남긴다. 당시 경찰과 가족에 진실을 고백하지 못한 걸 자책한다. 차마 상상으로도 친구가 여전히 살아서 자신과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무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고통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를 어떻게 구렁텅이에서 꺼내 줄 수 있을까. 앤드루 포터는 사건 당일 여름날 아득한 동네 풍경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마치 주워 담지 못한 진실이 거기 흩어져있기라도 하듯 그날 공기를 낱낱이 문장에 옮긴다.
“버지니아는 가뭄 철이었다. 2주째 비가 오지 않았고, 기온은 세 자릿수를 기록했으며, 저녁이 되어도 40도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늦은 오후의 공기는 투명하고 가볍고 아주 얇아서 마치 그 속을 움직여 다니는 것이 느껴질 정도이고, 눈을 찡그려 뜨면 쇄석 진입로 위로 물결치듯 솟아오르는 연기가 보일 듯했다.”
기억이란 편의로 조작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학은 인위적인 구원을 배척한다. 곪지 않도록 보호막을 씌울 순 있어도 거짓을 꾸며낼 순 없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폭력적으로 요약하면 오직 제스처만 남겨둔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 화자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후회로 얼룩진 시간을 매만지며 가까스로 추스른다. 결국 그 정도가 소설이 할 수 있는 다가 아니냐며 어깨를 으쓱한다.
#6
세상은 살면 살수록 알 수 없다. 전에는 뭔가 안다고 설쳤는데, 요즘엔 더 모르겠다. 나이를 먹을수록 미궁에 빠진다. 그래서 현실을 단호히 재단하고 사건을 손쉽게 해석하는 소설에 지친다. 섣부른 단정엔 진실이 깃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져 격정을 토로하는 이와 마주하는 것도 고역이다. 내게 작가는 다소 답답하더라도 주저하고 후회하는 사람이다. 가망이 없어도 되돌리려 애쓰는 사람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앤드루 포터는 고심 끝에 펜을 든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문장을 적는 작가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신뢰하고 읽을 수 있다.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 게 되는 그 부분은.”
<구멍>에서 화자는 자신이 왜 그 구멍 안에 친구를 두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지금 얘기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서 그런 걸까. 어차피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일이니 그냥 넘기는 게 최선일까. 내 생각에 작가는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로 돌아가도 비극은 반복된다. 그날은 그저 신이 그에게 너클볼을 던진 날이었을 뿐이다. 거기엔 어떤 숙명적인 구석이 있어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운명이 폐곡선을 타고 다시금 내게 날아오는 광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