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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ug 22. 2020

모든 것은 항상 지금이다

영화 <마지막 4중주>

 예술가의 삶이 그들의 예술보다 재밌을 때가 있다. 작품을 이해하는데 흥미를 돋우는 일화, 아니면 도통 이해가 불가능한 사생활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면벽참선할 것 같은 타입이 있는 반면에, 쳇 베이커나 레이먼드 카버처럼 마약과 술에 의지해서 곡절 많은 삶을 살기도 한다.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예술가는 성취를 위해 자신을 몰아세우고, 관계를 왜곡시키면서까지 타인에까지 손해를 끼친다. 이런 뒷얘기는 예술이 지닌 복잡성과 신비로움을 여는 키워드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결성된 지 25주년이 된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 ‘푸가’ 멤버의 이야기다. 그룹 리더이자 그들을 가르쳤던 대부 피터(첼리스트, 크리스토퍼 워컨)가 파킨슨병으로 더는 연주할 수 없게 되자, 팀원 간 묵었던 갈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 감춰졌던 그들의 인간적인 갈등은 무척 흥미롭다. 4명의 관계도 안에 시기, 질투, 연민, 동정, 분노, 증오가 만연해 오간다. 팀에서 제1 바이올린을 맡은 다니엘(마크 이바니어), 그리고 부부인 제2 바이올린 로버트(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와 비올리스트 줄리엣(캐서린 키너)은 연이어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에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다가오는 공연 날짜를 기다린다.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는 그들은 시한폭탄과 같은 위태로운 감정을 넘나드느라 연주를 등한시하고 시기 질투에 신음한다. 어쩌면 이들은 리더의 질병과 같이 팀에 변화를 주고, 갈등을 꺼내 들 사건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늘 해오던 소리를 유지하는 게 지긋지긋했을지도 모른다. 예술에 있어 변화가 없는 지속이라는 게 얼마나 권태롭고 정체된 기분인지 그들은 증명이라도 하듯 엇나간다. 25년간 최상의 케미스트리를 지켜왔던 이들이 리더의 와병을 빌미로 낯선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친구의 딸과 잠을 잔다. 남편에게 막말하며 걸레 보듯 대하고, 열등감이 사무쳐 너를 증오하겠노라고 공표한다. 삶의 진통이 절절하게 스크린 밖으로 전달돼온다.


 그룹 푸가는 해체되는 걸까. 장시간 연주에 어렵기로 소문난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을 더는 들을 수 없는 걸까. 영화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뭐가 됐든 예술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마음을 먹었을까. 영화는 노년에 관해, 나이 차가 나는 연인, 예술적 라이벌, 경력 단절, 부부간의 권태감, 예술이 지닌 영속성과 그 이면에 관한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다룬 드라마다. 지루할 새 없이 얘기가 오가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그 혼란상 중에도 연주를 이어가려는 연주자들의 고민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데도 그들은 연주를 위해 흘러넘치는 갈등을 억누르고 무대에 선다.


 난 영화 속 푸가 팀이 연주하는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을 들으며 여전히 갈등은 봉합되지 않음을 상기했다. 그저 연주는 삶을 잠시 지연시키는 도피의 선율이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 의하면 특정 ‘예술’에 대한 선호는 대체로 학력 자본과 출신 성분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음악’적 취향만큼 한 사람의 계급을 분명하게 확정해주고 분류해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정신의 깊이를 가늠하는 가장 고도의 예술이 바로 음악인 것이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장엄한 연주로 시작하여, 다시 또 다른 무대로 끝이 난다. 우리는 극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역사가 전해 온 예술을 느끼려 한다. 그리고 러닝타임을 지나 연주자들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다시 무대를 감상한다. 좀 더 나아졌는가. 예술은 더 농익은 모습을 드러냈을까. 예술을 아주 잠시나마 고된 삶을 잊고, 정신을 고양한 걸까.


 남기고 싶은 순간은 금세 지나가고, 자주 오지도 않는다. 와도 잘 모르고 지나쳐 버리기에 십상이라 웃을 일이 생길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살다 보니 잊지 못할 일은 드물어 그때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뭔가를 남긴다. 마치 그 순간이 더는 안 올까 봐 불안한 듯 시간을 붙잡아 가둬야 직성이 풀린다. 그럴 때 예술은 죽음에 항거할 수 있는 불멸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다 소멸하고, 비루한 삶이 사그라져도 내가 써낸 예술은 어디선가 명맥을 잇고 있으리라 믿는다. 지나간 연인과 찍은 사진처럼 그 추억만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액자에 남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런 믿음은 누군가를 쓰게 하고, 오랜 고전을 눈을 비비며 읽게 한다. 어떤 이는 순간을 포착해 그림으로 남긴다.


 니체는 고통이란 창조에 수반되는 과정이고, 기껏 이룬 완전한 예술도 새로운 창조를 위해 파괴된다고 말했다. 낯설고 가혹한 문제에 직면해 살면서도 삶 자체를 긍정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며 예술에 산화됐다. 예술을 지속한다는 건 곧 삶을 향한 의지이고, 이를 디오니소스적이라 칭했다. 최근 독서 모임을 하면서 각기 다른 목적과 방식으로 독서를 하는 이들을 만난다. 최근 만난 어떤 이는 삶에 흘러넘치는 자극을 즐기는 방식으로 독서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건지를 결정하고, 책에 몰입해 그 이상향이 되었다고 믿어버리는 과정으로 독서를 이용한다." 이는 예술을 일종의 도피처로 해석하는 나와는 달리, 기운이 넘치게 주도하는 자세다. 세상엔 다양한 이들이 있다지만, 나와 정반대 편으로 세상을 달리 보는 이들을 볼 때, 독서라는 방대한 세계에 난 무수한 샛길을 세어보게 된다.


 나는 독서를 통해 삶의 참담함을 확인한다. 문학이 지닌 기본적으로 어두운 톤에서 비극적인 가련함을 찾는다. 잘 표현된 슬픔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내가 몰랐던 비극이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위로를 건넨다. 내 생과 멀지 않다고 느낄 땐 폭 빠져서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에 취한다. 나는 후자의 경우를 더 좋아하는데, 그래서인지 한국어로 쓴 소설에 애착을 가진다. 그렇게 독서는 내게 수단으로써 삶에 기능하며, 난 이 허송세월을 정당화한다. 예술이 일상을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내게 휴게소까지는 아니고, 졸음쉼터 정도로 볼 수 있다. 잘 쉬고 있다. 



현재와 과거는 어쩌면 모두 미래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래는 과거 속에 있고

만약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재라면 

모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끝은 시작을 앞선다고

그리고 그 끝과 시작은 항상 그곳에 있다

시작하기 전 그리고 끝난 후에

그리고 모든 것은 항상 지금이다.


<Four Quartets>

written by T. S. El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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