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랜짓>
참 작은 영화관이었습니다. 의자가 폭신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영화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다 본 후에도 별말을 보탤 수 없었습니다. 우린 별말 없이 극장을 나왔습니다. 다 먹은 음료를 정리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영화관을 빠져나와서 차에 오를 때까지도 별 말이 없었습니다. 영화가 준 느낌을 형언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좋으면 오히려 말로 하기 어렵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아 보여서 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때 공간의 모양과 냄새에 대해 더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어루만지는 느낌과 달뜬 시선이 더 선명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보던 거리의 풍경이 영화와 함께 제 기억에 새겨졌습니다. 당시엔 이 영화를 말로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날의 기분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인제 와서 <트랜짓>에 대한 감상을 글로 풀어내려는 글로 옮겨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게오르그는 독일군 공습을 피해 독일에서 프랑스 마르세유로 도피합니다. 그는 몰래 프랑스 행 기차에 오르는데 거기서 다리를 크게 다친 작가 하인츠를 만납니다. 게오르그는 하인츠가 잠이 들었을 때 그가 작성하던 원고를 몰래 읽어봅니다. 하지만 열차 안에서 하인츠가 끝내 죽자 게오르그는 원고를 챙겨서 홀로 기차에서 내립니다. 연고도 없는 마르세유에서 경찰과 군인의 단속을 피해서 거처할 곳을 찾아 헤맬 때는 이 영화가 스릴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그가 피로한 얼굴로 여관방을 찾아 머무르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마르세유라는 도시에 천착합니다. 도시가 지닌 거리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얼굴들이 게오르그의 피로와 겹쳐지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다소 눅눅하게 가라앉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마르세유라는 도시를 향한 알 수 없는 정념이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건 당신과 제가 처음 여행을 떠난 곳이 그 장소라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처를 전전하던 게오르그는 한 여인과 마주칩니다. 묘령의 여인은 게오르그의 어깨를 두드려서 아는 척을 합니다. 낯선 땅에 지인이 있었던 걸까요. 하지만 그녀는 게오르그를 보고 실망스러운 낯빛을 보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말도 안 해주고 사람을 잘못 봤다면서 급히 떠나버립니다. 이후에도 그녀는 게오르그가 이동하는 곳마다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어둑한 게오르그의 침대에서 현현하게 살아납니다. 한편, 게오르그는 하인츠의 가족을 찾아 그의 부고를 알립니다. 그 과정에서 하인츠의 아들과 가까워진 게오르그는 간혹 들러서 병세가 깊은 하인츠의 아들을 돌봅니다. 하지만 병세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자 게오르그는 독일인 의사 리처드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도망자 신세에 우연히 만난 하인츠의 가족을 챙기고, 그의 원고를 가지고 출판을 의뢰하는 게오르그의 정체는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갑니다. 자신이 쓴 것도 아니면서 작가 행세를 한 이유는 뭘까요. 왜 그렇게 하인츠의 가족을 챙기려는 걸까요. 떠돌이 신세라서 신분 세탁이라고 하고 싶었을까요. 다분히 돈을 벌어보려는 묘수일까요. 영화는 의문투성이를 앉은 채로 흘러갑니다. 몇 가지의 우연이 겹치면서 영화는 점점 더 신비로운 기운을 품어갑니다. 그 우연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의사 리처드 곁에 머무는 마리라는 여인이 그간 마주쳐온 묘령의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마르세유로 도망쳐올 남편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간의 의문이 풀립니다. 죽은 작가를 사칭하는 남자, 죽었을지도 모르는 남편을 찾아 떠도는 여자. 영화는 그렇게 겉도는 이방인들의 정서를 진득하게 새긴 채로 남은 시간을 버텨냅니다.
영화는 모호하고 시종 분명하게 잡히는 게 없습니다. 게오르그, 마리, 리처드. 세 인물은 마르세유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딘가에 걸려서 발버둥 치지만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합니다. 시대 배경은 전쟁 기간처럼 보여서 2차 세계대전을 떠올리게 하지만, 마르세유의 번화가 모습은 최근 여행을 갔던 마르세유 시가지가 고스란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혼동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묘한 혼돈을 부추깁니다. 게오르그는 마리의 남편이 죽었음을 알지만 애타게 기다리는 마리에게 말해주지 않고, 마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게오르그의 눈빛을 애써 무시합니다. 리처드는 마르세유를 벗어나기 위해 배에 오르지만 배는 떠나자마자 침몰해 버립니다. 그렇게 영화는 기묘하게 처연하고 몇몇 장면은 몹시 껄끄럽게 연출함으로써 관객이 지속해서 마음을 쓰도록 유도합니다. 오해와 이끌림, 수치심과 불안함, 고독과 공감, 의기투합하는 정신과 어이없는 죽음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는 삶. 기다리는 사람들은 초조하고, 떠나려는 이들은 놓친 게 없는지 자꾸 뒤를 돌아봅니다.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과 사랑을 박제하려고 현실을 외면하는 얼굴도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관능의 열기와 죽음의 시퍼런 땅바닥이 공존하는 이상한 도시. 이 쓸쓸하고 변화무쌍한 영화를 앞에 두고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그러기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냈네요.)
우선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런만큼이나 플롯을 불친절하게 다룹니다. 처음부터 관객을 혼돈에 빠뜨리는 건 연달아 등장하는 네 통의 편지가 누가 누구에게 썼는지, 언제 쓰인 건지, 어떤 말을 하는지가 뒤죽박죽에 가깝게 섞여 있죠. 감정은 한 겹 안에 싸여있고, 그걸 해소하려는 움직임도 미온적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상황이 가진 정서에 집중하게 되고, 편지는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부재한 대상을 좇는 얼굴과 도시의 이방인이 지닌 불안한 정서가 영화의 중추입니다. 떠나려는 사람과 붙들지 못하고 오직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기억에 진득하게 남습니다. 마리는 남편과 헤어지려고 하지만 다시 돌아오라는 편지를 남김으로써 섣불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게오르그도 다르지 않죠. 그는 마리의 빗나간 편지로 인해 마르세유에 도착하지만, 신분증과 비자도 없어서 늘 쫓겨야 하는 신세입니다. 마리를 바라보는 게오르그의 시선은 그리움과 애처로움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거짓된 정체성 때문에 다가서지 못합니다. 마리 역시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눈에 걸리는 게오르그와 맘 편히 만나지 못하죠. 그들은 유예되어 어딘가에 걸쳐서 오도 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외부인입니다. 그래서 <트랜짓>은 빗나간 인연의 집합소처럼 보입니다. 편지는 늘 잘못 전달되고, 믿었던 사람은 전혀 기대와 다르게 행동합니다. 죽은 사람을 산 자로 혼동하고, 떠나야 할 배는 어김없이 고꾸라집니다. 정체를 오인하지만 그걸 바로잡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도 쉽게 꺼내놓지 못합니다. 그저 멀리서 멍하니 사태가 악화하는 걸 지켜볼 뿐이죠. 하지만 어디 그게 영화뿐일까요. 내가 운명이라고 믿었던 상대를 사랑하지 못하고, 가혹하게도 상대도 더는 나를 상대해주지 않을 때 모든 게 무너집니다. 시간은 흐르지만 결코 회복되지 않습니다. 때론 망각을 부르려고 하지만 의식할수록 점점 더 마음이 조여 옵니다. 영화는 나를 향해 다가오던 그녀가 멀어져 갈 때 느껴지는 절망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잔인하게도 끝까지 좇으면서 그 멀어짐을 통해 아픔을 극대화합니다. 그 뒷모습엔 거침이 없고 주저함이나 미련 따위도 없습니다. 오직 후회와 치기만 남아 화면을 부유하죠. 그는 늘 부재한 자리를 의식하고, 무심한 손실에 침묵합니다. 이쯤부터 영화는 영화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과 내가 놓친 앞으로의 시간과 지나간 순간을 아로새길 뿐입니다.
시종 모호한 <트랜짓>은 제게 있어서는 떠나간 사랑과 그걸 붙잡으려는 사람의 이미지로 남을 것 같습니다. 삽시간에 찾아온 매혹과 헷갈리는 감정의 진창에서 끌어올리려는 것은 결국 그리움입니다. 분열하는 인물의 정체성이 희미해질 때 이별은 명백해지고, 그걸 바라보는 얼굴은 가냘프기 그지없습니다. 영화는 내내 떠나가는 뒷모습만 좇다가 놓치고, 수소문해서 다시 찾았다가 미끄러지길 반복합니다. 게오르그와 마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갈까요. 그들의 실패에 낙담하다 지쳐 더는 견디기 어려울 때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건 아픔에 심취한 자에겐 낭만적이지만, 멀리서 관조할 수 없는 자에겐 쓰디쓴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조용한 거리에 선 게오르그는 완전한 혼자입니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그렇게 버려진 기분일 겁니다. 연고도 없는 거리에서 홀로 밥을 시켜 먹고, 누군가가 나타나길 염원하는 상태. 혹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자꾸 핸드폰을 만지고, 별 볼 일 없는 옛 기억만 끄집어내는 비루한 하루가 계속됩니다. 게오르그는 문을 등지고 앉아 문이 열릴 때마다 누군가를 쳐다봅니다.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잘되지 않죠.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그 옆에 메모합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계속 앉아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립니다. 작은 빛점 하나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그런 식일 겁니다.
누구나 후회를 합니다. 근데 후회가 더 극심한 시기가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당신을 놓친 그 순간이 후회로 가득합니다. 몸이 쪼그라들고 걸음이 더딘 상태로 어리석음을 곱씹고 삽니다.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어깨도 쑤시고 등도 구부러지고 점점 더 위축되는 느낌에 시달립니다. 그때 안 그랬으면 어땠을까,라고 시작되는 회한이 줄줄 새는 기분입니다. 다시 과거로 돌려봤자 다를 게 없다는 말엔 귀를 닫습니다. 그리고 제 딴엔 집중력을 발휘해서 다시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당신과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한 도시에서 진득하게 삶을 꾸며가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곡진한 어휘와 표현을 탈탈 털어 넣고 흐뭇한 결말을 짓습니다. 글을 읽는 이들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서, 내 감정을 위해서만 쓰는 겁니다. 영화 <트랜짓>에서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니 어물쩍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기다림의 영화라는 점에서 전 당신과 이 영화를 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을 거의 다 잊었지만 아직은 영화를 보고 나오던 그날의 들뜬 감정을 잊지 못합니다. 어두운 상영관을 나와 잠시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거울을 잠시 보고 밖을 서성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에 내려 차를 향해 다가가기까지 일분일초가 다 또렷합니다. 시동을 걸 때 옆을 보고 잠시 웃고 운전대를 만지던 순간이 예쁘게 보존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