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웨이
오늘은 기분이 어떤가요. 뭔가 특별하고 신나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는 게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한 직장에 오래 다니고 있는데, 십 년이 넘어서도 열 받는 일 천지입니다. 별의별 놈들이 다 있거든요. 그렇게 스트레스받다가 퇴근하면 글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그래도 항상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절 부추깁니다. 그런 희망 하나쯤 품고 살아야 거뜬히 하루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물론 한 권의 책은 벌써 출간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말도 잘 못 합니다. 그냥 퇴근하고 조용히 카페에 앉아서 새 책 원고에 매진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써온 글은 꽤 되는데 그게 한없이 초라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늘 쓰지만 쓴다고 다 작가는 아니잖아요. 매번 글 쓸 때마다 곁길 가는 나그네 신세라고 느낍니다. 요즘 자주 꾸는 꿈이 있는데, 늘 앉던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언젠가 다 쓰고 잊어버린 원고 한 묶음을 발견하는 내용입니다.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네요.
그도 절 떠났습니다. 사실 요즘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불안함과 조바심이 천장 위를 부유해서 자꾸만 넋을 놓고 바라봅니다. 역병에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감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자꾸 마트에 가면 와인을 들고 나옵니다. 혼자선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부엌 찬장에 쟁여둬요. 못 먹어도 곧 마실 일이 있겠거니 하면서, 그럼 정말 좋겠구나 상상하면서 진열합니다. 그러고 보니 남자 둘이 바디감 좋은 와인을 찾아 캘리포니아 양조장을 전전하는 <사이드웨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이 영화 못 보셨겠죠. 절로 와인이 당기는 작품이에요. 와인잔을 흔들며 코끝에 살짝 머무는 향기에 취하면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집니다. 프랑스에 일 년 가량 머물 때도 매일 와인을 마셨습니다. 까르푸에서 몇 병씩 사서 쟁여놓고 마셨죠. 타국에서의 외로움도 와인 향에 사그라들었습니다. 프랑스 온갖 지방 와인을 다 마셨는데 사실 잘 구분을 못했습니다. 와인을 즐기기보단 와인을 마시는 제 모습을 즐겼던 겁니다.
요즘 시내 와인바나 술집에 가면 칠레 와인이 자주 보입니다. 칠레는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같은 와인으로 유명한 나라보다 가격이 싼 편이라 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습니다. 유럽산 와인은 빈티지에 따라서 맛이 너무 복잡한데, 칠레는 품종이나 연도에 따른 맛 차이가 거의 없어서 쉽게 고를 수 있더군요. 게다가 대체로 떫지 않고 과일 향이라 저 같은 초짜에겐 제격입니다. 물론 <사이드웨이>의 주인공 마일즈 같은 와인 전문가가 보기엔 타닌이 거의 없는 칠레산이 단순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찌나 까다로운지 그 유명한 프랑스 와인들을 즐기면서도 가차 없이 깍아내리더라고요. “카베르네는 매력이 없고, 메를로는 개성 없는 와인을 분류할 때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와인이지. 샤르도네? 가장 순수성을 잃은 와인이야.”라고 일갈합니다. 저도 마일즈 같은 녀석이랑 술 먹으면 되게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날도 그와 편의점에서 칠레 와인을 사 마셨습니다. 근데 다음 날 전 차였습니다. 간밤에 달콤한 시간을 보낸 터라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향이 입가에서 다 사라지기도 전에 증발한 겁니다. 그 사람은 제 얘기를 재밌게 들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도통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뭐가 자라고 있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요. 그와 첫 데이트를 떠올려보면 근사한 와인바를 갔었습니다. 사실 제가 그를 처음 발견했던 것도 인스타그램에서 레드 와인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말 다한 거죠. 그와 모임 자리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도 와인병이 놓여있었습니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대화를 나누며 계속 와인을 마셨습니다. 좋아하는 시구를 외기도 했고요. 저는 기형도 그는 황인찬을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관계이다 보니 그를 와인과 함께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찰랑대는 와인의 매력과 그를 동일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관계는 지금 돌이켜보면 와인만큼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저처럼 한심한 인간이 지구 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경솔하게 굴었습니다. 이럴 땐 와인을 정말 병째로 들고 한 번에 들이붓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는 저로 인해 상처를 받았고, 저는 시간을 돌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루저처럼 혼자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습니다.
영화 <사이드웨이> 얘기를 하다 말았네요. 이 영화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작품인데, 2006년 개봉했을 당시 독립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히트작입니다. 페인은 루저에 가까운 남자를 세밀하게 그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입니다. 그 전형이 마일즈예요. 와인잔을 들고 아는 척을 일삼는 재수 없는 놈이지만, 또 미워하기엔 처지가 딱합니다. 마일즈의 아내는 이년 전에 그를 피해 달아났고, 부재감을 뒹구는 와인병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차오르는 우울을 약으로 달래며 소설을 쓰지만 신통치가 않습니다. 완성한 소설은 족히 구백 쪽은 돼 보이는데 출판사는 거절 놓기 바쁩니다. 소심하고 예민한 중년인데 키도 작고 못생겼으니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밖에요. 마일즈는 어느 식당에 가든 와인 한 잔은 제대로 마셔야 하는 사람이지만, 여자랑 단둘이 있을 땐 분위기도 제대로 못 잡는 숙맥입니다. 이런 그를 사랑해줄 수 있는 여자가 있을까요. 쉽지 않겠지만 힘내 마일즈. 난 녀석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는데, 끝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아서 울적해졌습니다.
이 술맛 까다로운 친구가 좋아하는 품종이 브루고뉴 지역 대표 와인인 '피노 누아'에요. 저도 프랑스에서 정말 많이 마셨던 와인이죠. “피노는 까다롭고 재배하기 어려운 품종이지만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와인이지. 신경 안 써줘도 아무 데서나 자라는 카베르네와는 달라. 끊임없이 신경 쓰고 돌봐줘야 하는 골치 아픈 녀석이지만 굉장히 복잡하고 다양한 맛을 지녔거든.” 마일즈의 이 말은 삶과 사랑, 자신의 실패한 결혼과 소설 창작에 관한 생각으로 들려서 괜스레 슬퍼졌습니다. 제가 피노 누아를 좋아한 건 단순히 싱그러운 포도향 때문이었는데 그는 어떤 복잡하고 다양한 맛을 느꼈을까요. 마일즈는 이처럼 상류층의 고급 취향으로 불리는 와인에 관해 박식한 사람입니다. 근데 그걸 여자에게 작업할 때는 전혀 이용하지 못하니 저로서는 답답한 노릇이네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마일즈는 그 비싸다는 1961년 산 와인 ‘슈발 블랑’을 맥도널드 햄버거에 그냥 마셔버립니다. 궁상맞지만 때론 포도주 한 잔이 사람을 진정시키는 진기한 장면입니다. 영화를 볼 당시에 제 기분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기에 몇 번을 끊어서 본지 모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소비란 게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지 느끼고 있습니다. 근데 취향이 생기면 돈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제 경우엔 커피랑 책이 그렇습니다. 커피 도구만큼은 비싸도 제대로 사고, 유명한 로스팅 원두를 주문해서 먹습니다. 집 찬장에는 칼리타 드리퍼와 그라인더, 비알레띠 모카포트에 바덤 프렌치프레스가 있습니다. 설거지하다 깨 먹으면 또 삽니다. 합정 엔트러사이트 커피를 굳이 택배로 공수해서 먹고 있습니다. 주로 찾는 원두 이름이 나쓰메 소세키입니다. 책도 매주 몇 권씩 사들입니다. 엄마는 저보고 미쳤다고 말합니다. 나름 문학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출판사랑 서점 좋은 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 읽는 것도 아니면서 침대 옆에 쌓아두고 냄새만 맡고도 좋아합니다. 각기 다른 알록달록한 표지만 봐도 인생이 풍성해지는 기분입니다.
그는 평소 와인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간 연남동의 와인 집에서는 오크통에서 오래 숙성시킨 와인을 주문해서는, 맛이 헤비한데 피니시가 어쩌고 하면서 한껏 들떠 보였습니다. 전 뭐가 다른지 잘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저것 많이 마셔본 티를 냈습니다. 사실 그는 편의점 와인으로도 뿅 가는 사람인데, 제대로 먹을 땐 호기심이 많아져서 비싸도 안 먹어본 걸로 시키곤 했습니다. 주문한 와인이 나오면 아이처럼 좋아하곤 했습니다. 저 기쁨으로 사는구나 싶었습니다. 어떤 것이든 취향을 가지면 감식안이 생기고, 각기 다른 개별성에 눈을 뜨게 됩니다. 취향은 무색무취한 맹물 같은 인생에 그윽한 향을 선사하잖아요. 그와 와인잔을 쨍하고 부딪치며 대화를 나누면서 삶이 한결 나아진다고 느꼈습니다. 몸이 노곤해지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습니다. 그의 눈이 와인잔에 비치는 걸 보면서 이 순간이 언제까지나 기억되리라 확신했습니다.
<사이드웨이>의 마일즈는 결국 샛길로 빠졌다가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봐 준 마야라는 여자와 재회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사랑을 찾은 것입니다. 마일즈는 큰 실수로 결혼을 망쳤고, 공들여 쓴 소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헤피엔딩을 맞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그저 조용히 중학교 영어 선생의 자리로 돌아가겠죠. 그래도 난 그가 계속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문학을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와인의 다채로운 결을 짚어내는 솜씨를 소설에 녹일 수 있길 바랍니다. 소설은 큰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이야기니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마일즈처럼 한순간의 방종으로 그를 놓쳤지만, 그래도 어렵사리 잘 이겨냈습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처지지만 더 나은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