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을 나서다

by 박민진

오늘 수년간 살던 집을 비웠어요. 널찍한 집을 구해서 더는 둘 필요가 없었거든요. 얼마 없는 세간마저 사라지니 이제는 빈집이 됐어요. 문을 닫기 전에 집을 쓱 둘러봤어요. 여러 번 경험한 바임에도 싱숭생숭했어요. 제가 택한 삶의 방식이면서도 어쩔 땐 무척 야속하게 느껴지죠. 마음이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약해지나 봐요. 이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봤어요. 물론 전적인 평화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을 추억이 가득하네요. 뭔가 특별한 일보다는 시답잖은 농을 하고 울고 화를 내고 대개는 속 이야기로 가득 찬 밤이 생각나요. 모든 애틋한 시간이 결국엔 찰나에 불과하다는 게 야속해요. 싸우다 지쳐 토라진 채 잠들었던 날도 기억나요. 저를 꿰뚫어 보던 그 시선 하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침묵이 이음매 없이 파편처럼 떠오르네요. 제 나름대로 기억에 보존했으니 나중에 함께 꺼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을 누르면서 얕은 숨을 내쉬었어요. 늘 가던 버스정류장으로 걷다가 그냥 택시를 잡았어요. 몸에 힘이 확 풀리면서 역까지 걸어갈 기운도 없었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난 혼자에 익숙했어요. 어두컴컴한 집에 들어서는 느낌을 누구보다 잘 알았죠.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늦은 밤 녹초가 되어 돌아왔고, 유별난 사춘기를 겪던 형은 저와 무관했어요. 반쯤 처진 커튼과 어둑한 실내, TV가 윙윙대는 소리가 떠올라요. 전 늦은 밤까지 하염없이 소파에 앉아 시간을 보냈어요. 소파에 늘어져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집구석을 둘러보면 문 틈새로 형 방이 눈에 들어왔죠. 휘황한 브로마이드와 음반 진열장이 있고, 당시 형이 입던 옷들이 침대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어요. 빈집은 한없이 고요하고 시간은 좀체 속도를 내지 못해요. 낮부터 컴퓨터 게임을 붙들다가 텔레비전을 켜서 '6시 내고향'부터 일일드라마까지 줄곧 봐도 겨우 초저녁이죠. 엄마가 며칠째 끓여놓은 김치찌개로 저녁밥을 먹고 나서야 겨우 바깥이 어두워졌어요. 아마 당신도 나처럼 그런 빈집의 시간을 보냈겠죠. 당신도 갈라진 틈새에서 홀로 토라진 아이였나요. 내가 아는 당신은 외로움을 많이 타고 혼자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죠. 특히 속아 버려지는 것을 무엇보다 겁내는 그런 애였죠. 전 이제 당신을 마음껏 상상해요. 당신이 했던 말을 복기하면서 당신이 어떤 아이였을지 떠올려봐요. 저는 여전히 당신을 알고 싶나 봐요.


한때 우리 가족이 잠시 머물렀던 집을 생각했어요. 익숙한 골목과 동네의 생김새가 그리웠어요. 부모님은 기억하기 싫을지 몰라도 전 그 반지하 방을 좋아했어요. 이제는 재개발로 사라져서 오직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동네예요. 사진이라도 좀 찍어뒀으면 좋았으련만 우리 가족에게 한 치의 여유도 없던 시절이라 별수 없었어요. 전 그 녹슨 동네에서 추억이 많아요. 아이들과 골목을 구석구석 누비며 뭔가 숨길 여력이 있는 공간을 찾아내곤 했어요. 요즘처럼 집을 나서면 매연 가득한 대로에 내몰리는 동네가 아니었어요. 골목을 걸으면서 혹독한 하루를 맞을 준비도 할 수 있는 느슨한 곳이었죠. 언덕배기에 있던 우리 집은 비좁고 어두웠지만, 꽤 낙관적인 기운을 머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급격한 도시계획은 작은 골목들을 뭉개버렸고, 휑뎅그렁한 도회지만 남겨뒀어요. 일률적인 아파트가 밀집하고 인위적으로 나눈 구획이 서슬 퍼런 시멘트 덩이만 세워놨죠. 늘 내 집 마련의 열망에 휩싸였던 부모님은 한참이 지나서야 수도권 신도시로 탈출할 수 있었어요. 그 벌집 같은 동네에 아파트 한쪽 마련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전 잘난 친구들이 많은 동네로 이사를 했고 그 결과 방과 후의 빈집을 견뎌야 했어요. 내가 살던 그 작은 골목들을 그리워하면서 빈집을 원망했죠.


지난 며칠간 집을 비우려고 열심히 청소했어요. 팟캐스트를 틀고 먼지를 닦아내며 제 흔적을 지웠죠. 구석구석에 꺼멓게 낀 먼지를 다 제거했어요. 머리카락은 어찌나 많은지 아무리 모아 버려도 계속 나왔어요. 수북한 당신 흔적이 집 곳곳에 끼어있더군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당신이 보이지 않으면 서글플 거예요. 사실 사는 게 이런 뒤치다꺼리의 일환이에요. 매일 비슷한 노동을 하며 유사한 풍경을 만들고, 타성에 젖은 얼굴로 아침을 맞이하죠. 늘 하던 대사를 뱉고 더는 신선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겠죠. 인생이 더는 새롭지 않다고 느껴질 때 문득 침대맡에 있는 당신 머리카락을 생각할 거예요.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지겠지만 당신이 남긴 머리카락이 불현듯 나타나서 저를 주저앉게 하기를 기대해요. 그 한 올을 만져보며 많은 생각에 잠기는 순간을 기다려요.


우리 사이에 구두점을 어디에 찍을까 고민하는 저와는 달리 당신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네요. 기분 좋은 긴장이 사진에 다 보여요. 저는 마지막에 센 척을 했지만, 당신은 내 거짓된 표정을 보고 안심하는 눈치더군요. 전 화가 나서 위악적인 말을 뱉었지만, 지금은 후회해요. 좀 더 곱게 마지막을 장식할 순 없었는지, 그놈에 자존심이 뭐라고 못나게 굴었네요. 당신을 붙잡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해야 할 말을 제때 못 하고 미루는 게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몰라요. 당신의 새로운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걸 보지 못한 게 아쉽네요.


최근 당신의 추천으로 '발터 베냐민'의 <사진에 대하여>를 읽었어요. “극도로 정밀한 기술을 통해 제작된 사진에는 회화가 더는 우리에게 줄 수 없게 된 어떤 신비로움이 있다. 사진가의 예술적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모델의 자세가 아무리 계획대로라고 해도, 보는 사람이 그런 사진 속에서 우연이라는, ‘지금 여기’라는 빛점 한 개, 현실의 빛으로 사진의 성질을 태우는 그 작은 빛점 한 개를 찾고 싶어지는 것, 눈에 띄지 않는 그 작은 한 곳을 찾아내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도 미래의 일들은 예전에 과거가 된 그 1분 속에 뚜렷이 깃들어 있기에 지금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멋진 문장 아닌가요. 어제의 나도 이랬고, 오늘의 나도 고작 그저 그런 상태이니 아마 내일도 비슷할 거라는 소리로도 들리고요. 당신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했죠. 아마 망각이 절 반길 테죠. 하지만 그래도 전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작은 빛점 하나면 보여도 당신을 떠올릴 겁니다. 당신은 아주 가끔은 그렇게 절 추억하기를 바라요.


전 미래를 내다보고 큰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세워봤자 어차피 다 어긋나니 고작 오늘내일을 떠올리고 말죠. 끽해야 뭘 먹을지 뭘 읽을지 뭘 보러 갈 것인지에 관해서 메모해두는 정도죠. 지켜지기를 바라지 않고 쓴 계획이라 미미하고 소소하죠. 물론 내년에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십 년 후의 내 모습도 어느 정도는 그려지지만 그건 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저 막연한 빛점 하나에 불과해요. 우선 지금 해야 할 게 눈앞에 산더미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요. 한 땀 한 땀 씨실과 날실을 엮어가면서 오늘 하루 수습하기 바빠요. 한때는 저도 강박적으로 계획을 세우곤 했어요. 그걸 못 지키면 스트레스받고, 계속 계획을 늘려가는 악순환에 빠진 시기였죠. 회사에서도 일이 계획과 어긋나면 주변 사람을 괴롭혔어요. 조바심이 들어 자꾸 딴말을 하며 짜증을 부렸죠. 계획을 수정하다 스텝이 꼬이면 그걸 다 남 탓으로 돌렸어요. 끝없이 동료의 의지를 의심하면서 분위기를 망가뜨렸죠. 그렇게 버둥거리던 시절에는 계획이 저를 동여맸어요. 근데 그렇게 세운 계획이 저를 배신하면서 저는 놓여날 수 있었어요. 불안과 초조를 진자 운동하던 기분이 사라지고 무계획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졌죠.


제 삶이 흘러온 궤적을 보면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노릇임을 알 수 있어요. 우연이라는 배수구에 휩쓸리며 어디로 갈 예정인지도 모르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당신과 함께 세운 약속은 삽시간에 다 어그러졌죠. 그렇게 공들여서 긴 시간 얘기한 끝에 내놓은 우리의 미래는 이제 없어요. 그래서 인생은 항상 뒤늦은 후회로 이루어진 앙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다행인지 비극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제부터 살게 될 집은 또 어떤 앙금을 남길는지 모르겠어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계획은 넣어뒀어요. 당신의 새집에도 좋은 기억만 깃들기를 진심으로 기도할게요.


새집에 새 가구를 들여놨어요. 거실엔 '오늘의집'에서 산 탁자를 놓고 이케아에서 스탠드형 갓을 씌운 등도 주문했어요. 이제 여기서 글을 쓸 생각입니다. 피곤하면 커피도 내려 마시고, 듣는 이가 없어도 서간문을 쌓아갈 생각이에요. 제가 내놓을 다음 책이 어떨진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제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바깥으로 밀어내는 글이 아니라, 바깥에 선 이를 들여다보는 글을 드릴게요. 분명 점차 더 나아질 거예요. 당신 모습이 담긴 책이 나올 겁니다. 수많은 일이 반복되며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나날에 당신을 녹여낼게요. 정든 집을 비우며 쓴 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