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모리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작품이 올해 연이어 개봉했다. 1980년대 당시에는 검열이 엄격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개봉을 할 수 없었다는데, 30년도 훌쩍 넘어서 동네 극장에 걸리는 걸 보니 신기하다. 아무래도 작년 개봉해서 큰 화제를 뿌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영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시대가 지나간 고전을 복원하고 포스터도 세련되게 다시 만드니 멋스럽다. 그건 어쩌면 제임스 아이보리라는 텍스트가 전혀 낡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넘치는 생명력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요즘처럼 쉽사리 뜨고 지는 시대에 예술이 낡지 않는다는 건 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제임스 아이보리 대표작 <모리스> <하워즈 엔드> <전망 좋은 방> 모두 문학적 정취를 안김과 동시에 요즘 시대 고민과 맞닿아 있어 세월을 의식할 수 없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누구나 영국인으로 착각할 만큼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많이 연출했다. 앞서 언급한 세 작품도 EM 포스터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전통적인 영국 사회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다룬다. <모리스>는 드물게도 동성애를 택한 인물이 낙관적인 결말을 맞는 영화로, 원작자 EM 포스터가 집필 당시에는 출간할 수 없었을 만큼 문제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 성 소수자에 관한 논의가 활발한 대한민국 땅에 이 영화가 찾아온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모리스>의 배경은 영국 옥스퍼드다. 학우인 모리스와 클라이브는 사교 클럽에서 차츰 우정을 쌓는다. 케임브리지의 엄숙한 분위기와 속에서 서로를 향한 끌림에 가까워진 두 사람은 몇몇 찬란한 순간을 함께하며 사랑에 빠진다. 우정에서 사랑으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애틋하다. 취향을 나누고 지적인 대화로 이루어진 장면을 공들여 연출해서 섬세한 손짓처럼 야릇한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지적이고 날 선 대사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씨실과 날실이 맞물리는 것처럼 평범한 대화 속에서 성적 긴장감을 뽑아내는 연출도 세밀하다. 표정과 손짓 하나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해서 단 한 장면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다. 클라이브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모리스를 갑자기 껴안는 장면은 팽팽한 긴장과 떨림이 베어진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한다. 학우이자 촉망받는 정치 신인이던 리즐리가 동성애 혐의로 위기에 처하면서 클라이브는 심각한 불안을 느낀다. 법원은 리즐리에게 동물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한다. 클라이브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성애를 향한 사회의 냉담한 시선을 의식한다. 두려움에 모리스와 급히 헤어지고, 서둘러 결혼할 여성을 찾아낸다. 클라이브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경력과 사회적 인정을 택했다. 그에 반해 모리스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상처 받는다. 영화 제목이 <모리스>인 이유가 있다면, 사랑에 버림받아 우는 모리스를 향한 응원과 지지일 것이다. 영화는 모리스의 순탄치 않을 인생을 예감하듯 시종일관 어둡고 울적한 톤으로 연출했다.
클라이브는 모리스에게 정신과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육체는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며 선을 긋는다.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사랑하면서도 동성애를 죄악시한다는 점에서 실존적인 모순에 직면한 인물이다. 욕망보다는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믿는다. 정신적 사랑뿐만 아니라 육체적 욕망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모리스는 클라이브와 갈등을 빚자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려고 시도한다. 모리스는 주치의를 찾아가 '동성애병'을 고치려고 한다. 사랑하는 이를 부정하기보단 자신을 책망하며 잊어보기 위한 그의 분투가 안쓰럽다. 모리스는 의사에게 리슬리 경과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주치의는 악마의 유혹을 운운하며 치료를 거부한다. 결국 모리스는 정신과를 찾아가서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최면 요법을 받는다. 하지만 긴 치료에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오로지 클라이브뿐이다. 자신의 본성을 인정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모리스에겐 분열되고 일그러진 고통이 자리한다.
1910년대 영국은 인간 본성 따위를 고려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격식과 품위를 지키느라 고통받는 어깨를 다독일 여력이 없었다. 거기에 목전에 다다른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어서 사회는 더 보수적으로 경직되어 있던 참이었다. 젊은 엘리트는 정신적인 무장을 강요받았고,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고독과 정체성은 입에 꺼내기 버거운 속 편한 소리였고, 신념의 문제는 오직 정치와 전장에서 행해야 하는 고고한 이들의 입놀림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당시 종교는 감정을 마음대로 통제하려고만 들었지 개개인을 위로하는 덴 미숙했다. 학교, 사회, 교회 그 어디에서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소수자는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 풍경화처럼 서정적이고 우아하다. 고즈넉한 음악과 나지막한 배우들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고, 영국 사회를 그려낸 풍경 묘사도 감정의 격랑에 흔들리는 심상과 긴밀하게 맞물린다. 영화는 목숨이 위태롭고 가진 걸 다 버려야 함에도 하인 알렉과 함께 떠나는 모리스를 비추며 끝이 난다.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처럼 주인공이 본연의 자신을 알아보고, 사랑에 투신하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모리스를 떠나보낸 클라이브는 추억에 잠긴 것처럼 떠나간 그의 자취를 좇지만, 이제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에겐 어여쁜 아내와 멋스러운 저택이 남겨져 있다. 한때 모든 걸 줄 수 있었던 사이가 어떻게 이리도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걸까. 우리 이별이 그런 것처럼 거기에도 몇 번의 장난 같은 우연과 고쳐낼 수 있었던 미련이 있다. 회한을 다시 들여다보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 속에 가장 찬란한 시절이 있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이런 영화에 심취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