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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10. 2020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왓챠 <환상의 빛>

 아침에 출근하면 내가 포기하고 얻은 게 한눈에 들어온다. 알람 소리를 끄며 보는 창문 밖 풍경 이러던지,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드러나는 어제의 흔적 같은 것들. 이건 어느 정도의 단념으로 받아 든 결과다. 만족하지 못한다거나 예측을 벗어난 건 없다. 사실 내 예상보다 잘 풀리고 잘 가닿았다. 나는 이곳에 오기까지 사람을 놓치고 귀중한 시간을 빼앗겼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취하기 위해 훼손을 감수했다. 내 선택이기에 다 납득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가끔 시큰거리는 걸 막을 도리는 없다.


 무엇을 포기했는지 떠올려보면 어떤 희미한 얼굴이 그려진다. 그건 어떤 회한에 가까운 거라 미세하고 은은하다. 만약 그때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면 마치 열차시간표처럼 전혀 다른 행선지를 받아 든다. 그곳에 내린 나는 지금과 달리 좀 더 유유자적할까. 상상한 좀 더 미온적이라 구체성이 없다. 마치 어릴 적 본 테마 게임처럼 선택이 나를 전혀 다른 길로 안내했을지 모른다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생긴다. 그건 나답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다운 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닥쳤기에 받아들였지만, 다시 돌릴 수 있다면 이 모습일진 장담할 수 없다. 그러길래 가지 못한 길엔 늘 미련이 남는다.


 그를 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오늘 철봉운동을 하면서 내가 지금 이 도시에 있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때, 다음 주에는 방을 빼 달라는 요지의 전화를 받았다. '평일 중엔 집을 정리해주세요.' '네 휴가 써서 다 정리할게요. 고맙습니다.' 내가 붙든 기억을 한심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직원의 말은 냉담했다. 괜스레 기분이 상해 분노로 턱걸이를 몇 개 더했다.


 새집에 가구를 들여놨다. 세탁기와 냉장고, 탁자와 침대를 샀다. 현실에 충실한다는 게 나이를 먹을수록 어렵다. 지금 벌이고 있는 짓이 잘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늘 몸을 가볍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걸치적거리는 것들을 집에 들여놓으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신기하리만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나도 무거워지나보다 짐작한다. 생각이 더뎌지고 감각이 무르다는 느낌이 받는다. 부서 친구들이 나를 늙은이 취급하는 데도 익숙해졌다. 직위가 사람을 만든다고 나도 그 늙은 역할에 어우른 말을 할 줄 안다. 나는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얘들아, 한때야.’ 갈수록 심해지는 건 감상에 빠지는 병이다. 회한이 날 붙들고 늘어져서는 쓸데없이 뭔가를 끄적이게 한다. 오늘은 옛 생각을 하다 턱걸이 세트 수를 까먹었다. 그렇다면 네가 간 길은 어떨까. 나를 배제하고 이뤄낸 길은 탄탄대로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지치고 불안해져서 초밥을 먹고 싶어 진다. 우선 모둠 초밥으로 단백질을 보충해야겠다.


 나랑 있을 때 제일 행복한 줄 알았는데, 내게서 놓여났을 때 더 밝아 보이면 정신을 퍼뜩 차린다. 그런 모습이 낯설고 기이하면서 조금 아프다.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악담을 퍼붓게 된다. 아름다운 이별이 어딨냐. 김건모 노래 제목에나 있지. 악의를 갖지 않기 위해 일정을 빡빡하게 채우고 있다. 딴생각 못하게 나를 가혹하게 다루면서 시간이 흐르길 고대한다. "내 맘 깊은 곳엔 언제나 너를 남겨둘 거야. 슬픈 사랑은 너 하나로 내겐 충분하니까. 하지만 시간은 추억 속에 너를 잊으라며 모두 지워가지만, 한동안 난 가끔 울 것만 같아" 건모형 요즘 잠은 잘 주무시나.


 아끼고 좋아하다 보면 내가 없인 그가 있을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알다시피 착각에 불과하다. 대체로 나 정도는 절삭해도 오차 범위 안에서 값이 떨어진다. 과정이 열띠고 다사다난할수록 사실 더 그렇다. 마음을 흔들려고 갖은 소동을 피워도 정리는 한순간이다. 모가 난 기억이라 잘라낼 환부도 명백하다. 경험상 그런 헤어짐이 아팠지만, 정리는 깔끔했다. 그리고 나 없인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그가 더없이 밝아보일 때 핑 돈다. 뷰티 앱을 넘어서 왜곡 수준으로 보이는 어여쁜 사진이 SNS에 나뒹굴기라도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런 충격은 가슴이 오그라들고 머리가 띵해지기에 약 삼십 초간 멈춰 서야 한다. 운전하는 중이라면 잠시 깜빡이를 켜고 차를 갓길에 대는 게 이롭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래도 배운 게 있다면, 다음엔 안 그럴 것 같지만 똑 빼닮은 짓을 반복한다는 거다. 불안하게 작은 방을 서성이다 문틀 철봉을 하면서 쌕쌕거린다. 이별의 아픔을 달랠 때도 폼은 잡아야 하기에 지독하게 쓴, 거의 탕약에 가까운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목구멍을 자학할 때 찾아오는 기이한 안도라니. 각성! 강장! 조지 클루니가 네스프레소를 마시면서 어떻게 그런 그윽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지 몸소 깨달을 수 있다.


 과거 이별이 어땠는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엔 전부였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나 혼자 착각에 빠져 있었던 연애였기에 그렇다. 혼자 부풀리고 과장하고 왜곡시킨 연애담은 히틀러의 연설처럼 독단적이다. 금세 잊힐 해프닝에 가깝다. 남는 거라곤 미화된 기억 찌꺼기뿐이다. 난 그를 한 모임에서 만났다. 성공적인 모임을 위해 온 정신을 몰입하던 때였다. 모임을 잘 성사시키는 것이 무슨 보궐선거 유세라도 되는 양 열과 성을 다했다. 나는 과잉을 부적처럼 달고 사람들을 대했다. 다행히도 눈에 불을 켠 나를 사람들은 무당처럼 신기하게 여겼다. 난 모임을 통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 더 어릴 때 알았다면 이쪽을 직업으로 택했을 거로 생각했다. 밥 벌어먹기 어려워도 살만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건 굶어보기 전까진 알지 못하겠지. 에이 굶기야 하겠어.


 그날도 성공적으로 모임을 마치고 아침에 출근했는데 뭔가 아른거렸다. 어제 모임을 할 땐 들어오지 않던 모습이 자꾸 생각나고, 건네지 못한 말들이 후회돼서 도통 모니터를 쳐다보지 못했다. 난 인스타그램을 깔고 열심히 말을 걸었다. 왜 내 뇌리에서 기웃거리는지 묻고 싶었다. 왜 나와 눈이 마주쳤는지 묻는 대신, 모임은 어떠셨냐고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은 없냐고 묻는 대신, 요즘 어느 동네에서 노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기대한 대답과 다른 소리를 했지만, 말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내 짧은 경험상 좋은 징조였다. 그렇다면 만나서 물어보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는 이성적인 언어를 쓰기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당분간 글을 쓰지 못했고, 저녁이 오기만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다. 그는 내가 관심 있어하는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었다. 열려있었고 부침이 없었다. 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을 만큼 기민했다. 섬세함과 예민함을 오가며 속을 태울 줄 아는 선수였다. 나는 아른거림이 사라질 때까지 불을 끄고 가만히 누워있어야 했다. 어째야 할지 몰라서 불안했다. 나는 그가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혹시나 이상하게 꼬일까 봐 겁이 났다. 그렇다고 제동을 걸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종일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어디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밤거리를 걸었고, 꼬박꼬박 차를 마셨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도 조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그것도 잠시고 만남은 쉽게 끝이 났다. 아니 쉽지는 않았지만 잘 된 적도 없었다. 왜 모든 관계가 헤어진 후에야 명확해지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기행을 반복한다. 소식이 끊겼지만, 기어코 기다린다. 하늘이 죽여주게 맑아도 개운하지가 못하다. 요즘은 대체로 늦게 자고 꿈도 많이 꾼다. 꿈에서는 과거 연인들이 잘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난 간혹 그들의 SNS를 구경하는데, 누구 하나 삐걱거리는 사람이 없다. 가히 내가 좋아할 만했던 사람들답다. 꿈속에서 그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여서 난 편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말을 걸어도 괜찮다는 게 기뻐서 계속 아는 척을 한다. 잘 지냈냐고, 그땐 왜 그랬었냐고 농담을 따먹듯이 회포를 푼다. 그들의 아이와 남편을 바라보면서 기분 좋은 안도를 느낀다. 근데 꿈이 막바지에 이르면 꼭 혼자 동네에 와있다. 노트북에 글을 적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찍 자리를 빠져나온 참이다. 내 방이 눈에 들어온다. 아늑하고 무엇보다 단단해야 할 그곳이 서슬 퍼렇고 버티기 어려운 곳처럼 보인다. 한때는 전부였던 그들을 놓치고 지금 무슨 글을 쓰는가. 악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는 꿈은 아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깼는데 옆에 소설 <환상의 빛>이 있었다. 모임 진행을 위해 읽기 시작했는데 그 모임이 취소돼서 읽지 않아도 되지만 기어코 읽고 있는 소설책이다. 남편이 열차에 치여 죽고 그 원인을 몰라 애달파하는 여자 얘기를 난 왜 이렇게 좋아할까. 이런 처연한 이야기를 읽으니 꿈자리가 뒤숭숭하지.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봐도 꿈자리를 좋게 할만한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제는 예보와 달리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출근길은 녹음이 가득한 곳인데 비까지 오면 더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분위기에 취해 '기리보이'의 서정적인 랩을 들으며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대화도 라임에 맞춰 들리는 듯했다. 기리보이의 어눌한 말처럼 온갖 푸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래서야 아침 회의에서 말을 잘할 수 있겠어.’ 우린 참 많은 계획을 세웠는데, 말처럼 이뤄진 건 하나도 없다. 빛이 바랜 청사진 그걸로 끝이었다.

 난 요즘 쓰는 글이 낯설다. 스스로 신기해할 정도로 낯간지러운 얘기를 적는다. 솔직함을 가장한 감상적인 어휘가 좀스럽다. 주위 사람들이 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ㅎ'자를 몇 개씩이냐 붙이면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다. 난 형식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실험은 개뿔 그냥 낯뜨거운 짓이지. 누군가가 내 궁색함을 비웃고, 그것에 대해 웃고 떠드는 꼴도 더는 못 보겠다.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을 모독하고, 뭔가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질색이다. 값싼 동정이나 받자고 쓰는 글이 아닌데. 나는 다시 고쳐잡고 정확한 글을 적을 생각이다. 이제 가을이니까 시원하고 명쾌한 글이 어울린다. 세상은 눈이 부실만큼 온전해 보이기에 내 문장도 힘을 받길 바란다.


 가끔 차가운 바람이 셔츠 자락을 타고 흐르면 이유 없이 설렌다. 나는 많이 변했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꼴이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고스란하다. 그게 신기하면서도 괜스레 섭섭해서 이런 글을 적어봤다. 오직 나 자신만 돌아보고, 내 감정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요즘 어머니의 기분이 별로다. 그것도 내 감정에 취해 부러 누락했다. 귀여운 조카도 생각해야 할 때다. 친구를 본 게 언젠지 모르겠다. 상준이나 시우한테 전화를 해야겠다. 에녹이는 날 걱정해준 유일한 친구였는데, 그게 성가셔서 톡을 씹었다. 나를 배제한 세상을 상상하지 못해 세상이 딱 내 보폭만큼 오그라들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미련을 갖느라 좀 더 늙어버린 기분이다. 이제 침울한 글은 접고 기틀을 잡고 글을 써볼 생각이다. 어쨌든 오늘도 쓰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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