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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3. 2019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소고

티빙 <체실 비치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종종 서점에서 들춰본다. 출간 직후 단 한 번도 스테디셀러가 아닌 적이 없었던 작품이다. 잊힐만하면 누군가에게 인용되어 판매고를 올린다. 이 책은 늘 교보문고 귀퉁이 같은 자리에서 날 반긴다. 어느 장을 휙 펼쳐도 의미심장한 구절이 튀어나온다. 읽었음에도 생경한 기분. 이 책을 손에 쥐면 세상살이가 깃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다 읽진 못해도 자투리 시간에 기대어 손에 집히는 대로 살짝만 엿보는 재미가 있다. 소설 속 네 남녀가 남루한 차림으로 동네 공원을 걷는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같은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 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오늘 펼쳐 본 곳은 17페이지(민음사 판) 한 구절이다. 소설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쿤데라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 귀를 울린다. 드넓게 펼쳐진 대지에 싱싱한 언어가 요동친다. 그는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관객 앞에서 초연하는 배우를 생각한다. 인생은 초행길처럼 당혹스럽다.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 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시사회에 다녀왔다. 영화는 1962년 여름, 결혼식을 막 마친 어린 부부와 동행한다. 두 사람에겐 둘 만의 시간이 벅차다. 지나치게 고답적인 영국식 교육의 영향 때문일까, 서로를 극단으로 왜곡한다. 어느 순간 건너선 안 될 서로의 트라우마에 진입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치닫는다. 돌아선 그녀를 잡지 못한 그의 얼굴은 허공에 닿아있다.


 소설의 서스펜스는 섹스다.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옷을 벗기고 눕기까지 과정이 모두 가시방석이다. 섹슈얼이 배제된 섹스. 작가는 미세한 감정 굴곡을 노골적 필치로 파헤친다. 드문 뱉는 대사가 압권이다. 혼란을 정의라도 해보려는 심산인가. 소설과 다르게 영화는 교차편집과 날카로운 사운드 효과, 배우의 상기된 표정을 통해 객석을 얼어붙게 만든다. 


 이 젊은 부부는 책으로 배웠던 모든 지식이 실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무도 그에게 섹스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달뜬 감정에 목소리에 언성은 높아져 가고, 휘두르는 몸짓은 관계를 망친다. 영화는 사소한 오해와 콤플렉스가 인간에게 가져다줄 여파를 잰다. 그는 뒤늦게 깨닫고는 되뇐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누구에게나 첫 경험은 당의정을 벗기는 과정이다. 첫 섹스란 살과 살을 맞댄 폭력과 다름없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과 녹음이 우거진 공원을 산책이 상상과 다른 것처럼.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다분히 동물처럼 느껴지는 본능을 품기 때문이다. 스산한 체실 비치에서 그들은 사랑이라는 그릇에 뭐 하나 담지 못하고 파국을 맞는다. 감정을 토로하는 법을 몰라 스러진다. 스스로 자괴하고 미안해하면서도 입에 내놓을 줄 모른다. 동물처럼 거친 눈으로 상대를 왜곡한다.


 에드워드는 그날 왜 플로렌스를 다잡지 않았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시대의 여파다. 시대의 변곡점에 선 두 남녀. 전후시대의 종말과 함께 개방이 시작된다. 두 남녀는 그 사이에서 어리둥절하던 희생양이다. 소설은 첫날밤 이후 급속도로 해방된 성문화를 기억한다. 혁명의 시간을 지나 깨부수는 70년대가 왔다. 에드워드 역시 뒤틀린 시대를 겪어낸 후 파국의 밤을 회고한다. 연인에 대한 배려와 인내 없이 사랑이라는 관념을 통과해버린 자신을 떠올린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며, 그녀를 떠나보낼 땐 아무것도 몰랐다고 자책한다. 회한이란 시간이 흘려보낸 후 뭉쳐진 마음이다. 에드워드는 모든 게 금기에 휩싸인 시절의 잔재를 회고한다. 체실 비치에서 떠나보낸 그녀를 추억한다.


 영국 1960년대는 비로써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난 부흥의 시대였다. 베트남 전의 시대이자, 히피의 시대였다. 여성해방의 시대이자 우드스탁 축제의 시기였다. 말 그대로 마리화나와 로큰롤의 광란 속에서 젊음은 기성의 틀을 벗어던졌다. 이 즈음 공통적으로 내포하는 화두는 해방이었다. 시대의 젊음은 마치 처녀가 순결을 잃듯, 자신이 그간 배워온 가치를 시대에 반납했다. 상실의 젊음은 얼마나 고운가. 그 누가 시킨 게 아님에도 젊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기득권을 조롱한다. 하지만 오로지 성 문화만큼은 보수라는 미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참고로 저자 이언 매큐언은 62년 당시 14세 소년이었다. 그리고 68년 전 세계가 혁명의 불길에 닿을 때 20살을 맞았다. 세상이 전복되기 직전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는 베트남 전쟁, 달 착륙 쇼 등등 인지 부조화의 여러 갈래를 모두 지켜봤다. <체실 비치에서>는 그 시대를 겪은 이들을 향한 소고다.


 영화는 회고로 두 사람의 맥락을 쫓는다. 두 남녀가 같은 침대에 누워있기까지 수많은 우연의 사슬이 작동했다. 이른바 코르셋처럼 꽉 조여진 성에 대한 인식. 저택을 배경 삼은 가족이라는 철옹성. 그 모든 과정을 목도하고 나면 모든 비극엔 이유가 있는 낙관을 얻는다. 영화가 소설보다 쉬운 점은 바로 명확한 이유 제시에 있다. 소설이 불가해한 마음에 초점을 뒀다면, 영화는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는 학자처럼 명확하다. 영화가 대체로 두 남녀의 연애 감정을 파고드는 반면에, 이언 매큐언은 시대의 뒤안길에 사라진 가치를 살핀다. 난 소설을 더 좋아하지만, 영화는 성실한 각색과 매체가 가지는 이점을 최대한 살린다. 음악과 라디오 소리, 뉴스의 한 장면과 신문 귀퉁이에 그려진 옛 시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언 매큐언의 치밀한 문장을 영화화하기 위해 그려 넣은 디테일이 곡진하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배우 ‘시얼샤 로넌’의 쓸쓸한 표정이 아른거린다. 아역부터 보아온 탓에 정도 많이 들었다. 최근 연달아 내놓은 작품들이 모두 훌륭하다. 영화는 그녀의 나지막한 정조를 최대한 활용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국 상대역으로 출연한 ‘빌리 하울’의 몫이다. 재밌게도 이 청년은 또 다른 영미문학의 거장 ‘줄리언 반스’의 작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했다. 어수룩한 표정이 매력적인 빌리는 얼굴에 당혹과 환희를 모두 담는다. 여러 번 서럽게 우는데 그게 지나온 인생처럼 처량하고 마음을 잡는 구석이 있어 알싸한 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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