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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10. 2018

그들이 사는 세상

웨이브 <스타 이즈 본>

난 뭔가를 적을 때 종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벌써 BIFF가 개막하는 10월이 되었음에도 내 몰스킨은 여전히 새하얀 민낯을 자랑한다. 그냥 노트북에 두서없이 적은 것들을 모아서 글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뭔가로 만들어낸다. 작은 웅덩이들을 여러 개 파고 고랑을 내어 물이 흐르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가을처럼 상쾌한 기분이 된다. 그러다가 가끔 노트에 뭔가를 적을 때가 있는데, 그건 기록의 의미보다는 그저 쓰는 행위가 자체가 주는 기쁨 때문이다.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사각거리며 노트에 녹여내면 손가락과 내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마치 생각을 밀고 나가는 기분을 준다. 여전히 연필과 지우개로 소설을 쓰는 작가 ‘김훈’은 여전히 자신의 낡은 책상 위에서 쓴다는 행위가 주는 물성에 이야기의 전말을 맡긴다.

영화 <스타 이즈 본>, 영화 속 브래들리 쿠퍼는 연출과 주연배우를 동시에 소화한다.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시작된 그의 필모그래피는 여전히 형형히 빛난다.

몸에 정체성을 그리는 사람들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타투를 한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과거처럼 타투를 조직폭력배의 두터운 팔뚝이 아닌, 낭만적인 무언가로 느끼는 것 같다. 헤어진 연인의 이름을 가슴팍에 새겼다가 엉뚱한 말로 고친 ‘조니 뎁’의 경우가 아니라면(조니 뎁은 과거 연인 ‘'Winona Forever'의 이름을 새긴 문신을 'Wino Forever(술주정뱅이 부랑자)'라고 고쳐 놨다.), 적극적으로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걸 몸에 새기는 게 나쁠 리 없다. 물론 훗날 나이를 많이 먹고 한 아이가 맑은 눈으로 내 팔뚝을 보며 엉뚱한 질문을 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기로 하자. “할아버지 젊었을 때 쓰레기였어요?”

영화 <메멘토>에서 단편적 기억상실증의 대응 목적으로 문신을 하던 남자를 기억하는가. 메모장 하나 챙길 여력이 없었던 이 남자는 살아남기 위해 문신을 한다. 어쩌면 20세기의 문신이란 이처럼 특별한 상황에 몰린 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오해와 섣부른 판단에 앞서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흉기처럼 드러냈다. 그렇다면 요즘 시대의 문신이라는 건 어떤 걸까. 마치 박재범의 힙한 랩처럼, 좀처럼 표출하기 녹록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의 표현 수단이려나. 마치 스스로를 홍보하는 네온사인처럼 거리에서 나를 드러낸다. 칼날 같은 메시지는 없고 당신을 유혹할 귀여움이 충만하다. 이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 창작 행위에서 난 엄두도 내지 못할 그들의 자신감을 본다.      

영화 <스타 이즈 본>,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이 교감하는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대화들이 감탄사 연발이 아니라 담백해서 좋다.

내가 기억하는 재밌는 문신 중에 하나는 ‘레이디 가가’의 왼 팔목에 새겨진 ‘평화’의 표식이다. 존 레넌을 존경하는 그녀는 팔뚝에 이 표식을 새기고 공연을 한다. 이는 쇠고기를 잘라 만든 의상을 입거나 파격의 아이콘으로서 전 세계를 누비는 레이디 가가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고(미안해 가가) 두꺼운 화장과 기괴한 옷으로 무장한 그녀가 부르는 노래의 속뜻은 대부분 보편에 밀려 허덕이는 소수자를 위한 격려다.      


스타 이즈 본, 레이디 가가의 현현한 육체


평화를 팔에 새긴 레이디 가가의 배우 데뷔작은 <스타 이즈 본>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가진 스타 탄생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 같은 익숙한 것이지만, 어딘지 모를 마음의 동요를 자아내는 것들이 있다. 영화를 다 본 후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모니터를 보며 보고서를 쓰는 내 눈 속에 뭔가가 아른거렸다. 우선 영화의 첫 장면, 역시 록 스타답게 알약 두 개를 먹으며 무대로 등장하는 우원재, 아니 브래들리 쿠퍼(극 중 잭슨). 이 장면에서 휘청거리는 잭슨을 헨드헬드 카메라가 따라가면서, 그를 뒤흔드는 대중의 함성과 스러져가는 육체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렵사리 공연을 마친 그는 술에 의지하려 작은 바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잭슨은 레이디 가가, 극 중 앨리의 공연을 처음으로 관람하게 된다. 꽉 끼는 코르셋 같은 옷에 광대처럼 과장된 얼굴을 한 앨리는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부른다. 바 테이블 위에 누워 <La Vie En Rose>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잭슨을 매료시킨다.(나도 매료됐다) 에디트 피아프가 거의 바닥에 맞닿을 것처럼(선천적인 어려움으로) 몸을 숙이고 노래를 하는 반면에, 앨리는 마치 토굴에 있던 선승마저 뛰쳐나올 정도로 도발적인 무대를 선보인다. 난 객석에서 그녀의 공연이 클로즈업되는 걸 보며 살짝 위압감을 느꼈는데, 그건 마치 대단한 미인을 봤을 때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리는 것처럼 명백한 위험신호였다. 육박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어쩌면 스트립쇼보다 야하고 ‘멋지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대단한 퍼포먼스였다. 난 피곤한 록스타의 울음 같은 공연 이후에 이 대단한 공연을 배치한 연출자(브래들리 쿠퍼)의 의도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이제 지는 스타의 녹슨 몸과 막 부상할 이 시대의 스타의 엇갈린 운명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것이다.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대위법처럼, 영화는 서로 다른 노선을 가진 두 예술가의 길을 오가며 연주를 지속한다.

영화 <스타 이즈 본>, 영화 속 모든 공연장면이 라이브였다는데, 난 믿을 수 없다. 브래들리 쿠퍼가 그 얼굴에 노래실력까지 그렇다면 반칙이다

탄생, 성교, 그리고 죽음


영화에서 무대를 촬영할 때 거의 대부분 공연자의 관점에서 촬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팽팽한 긴장감과 완전 노출의 세계란.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라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체험해볼 수 있는 장면이다. 희미한 객석의 관객들은 매 순간 공연을 하는 뮤지션을 재단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저 친구 한 물 갔네.” 우리도 쉽게 TV를 보며 말한다. "이제 저 친구 끝났어." 그렇다면 무대 뒤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성기가 지나 간 록스타 잭슨은 청각이 망가지고, 경력의 내리막에서 갈피를 못 잡는다. 잭슨은 선한 마음을 가진 어른이지만, 자기 파괴적 본능을 지닌 남자다. 우리는 수많은 예술가의 몰락에 술과 마약이 있는 걸 보아왔다. 마치 클리셰처럼 따라다니는 이 묘약들은 무대 뒤에서 특히 효험을 발휘한다. 조용한 곡 <Maybe It’s Time>을 부를 때, 잭슨의 여린 면모는 그의 커리어가 사실상 끝장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말미에 잭슨은 죽음의 뒤안길로 사라지는데, 정작 그를 추모하는 무대에서 앨리는 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앨리의 얼굴엔 슬픔보다는 온 세상을 품은 만능감이 보이는 건 착각일까.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 다시 확대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난 이 말에서 사랑의 위대한 측면보다 잔인한 속성을 본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스타는 하나뿐이고, 그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의 등장과 함께 퇴장한다. 'T.S. 엘리엇'은 인생의 총체를 '탄생, 성교, 그리고 죽음'이라고 한 바 있다. <스타 이즈 본>은 이 과정을 고스란히 밟는 영화다. 이는 마치 숱한 예술가가 경력의 정점에서 목숨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화화된 예술가에 대한 동경이 스며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완전히 몸이 망가지기 전에 스스로 신화 속에 박제되길 선택한 록스타의 몰락은 어째 좀 무책임하다. 잭슨은 죽음을 택함으로써 '앨리'라는 자신이 발굴한 스타의 탄생을 보전했다. 스크린에 살아 숨 쉬는 레이디 가가의 거친 육체와 매혹적인 목소리는 그 아찔함만큼 끝내 허탈해지는 원형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계절의 순환처럼 무대 뒤의 삶이란 몰락하는 자의 자리만 가득하다.

영화 <스타 이즈 본> 극 중 수수한 얼굴로 등장한 레이디 가가는 뭔가 이질적이다.

딜레탕트란 말이 있다. 과거엔 예술이나 학문을 체계적인 지식 없이 도락으로 즐기는 사람을 놀리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내 생각에 이런 딜레탕트가 가득한 세상이라고 믿는다. 예술을 취미로 즐기며 세상의 엄정함에 울타리를 치는 사람들이 도시 속에 가득하다. 고독의 농도가 짙은 만큼, 울타리 밖의 공기는 더 팽팽하고 첨예하다. 스스로 만든 그 공간을 침범받지 않는 방법은 심각해지지 않는 것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에 무심해진다. 현실성도 없어 보이고, 광장에 나갈수록 수많은 재능들이 그를 압박한다. 학교 다닐 적 온 동네에 향기를 뿌리던 미인이었던 내 동창은 어느 기획사에서 연습생 하다가 시집갔다고 하더라. 물론 그 삶이 더 행복할 수도 있지만, 어느새 마음은 차가워진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오로지 취미로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취할 뿐이다.

<스타 이즈 본>의 영문 제목은 A Star Is Born이다. 여기서 관사 ‘A’의 삶은 타자를 의식하는 보편의 가치다. 내가 믿는 것은 ‘The'의 내밀한 언어의 온도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그들만의 세계가 지옥의 다른 이름으로 보일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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