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입다 드립 커피

#13 커피를 마시면 내 사연을 털어놓고 싶어진다

by 박민진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면 원두를 갈기 시작한다. 전완근에 힘을 주고 수동 그라인더로 힘차게 분쇄한다. 커피 향이 온 사무실로 퍼져간다. ‘잠이 좀 깨는 것 같네.’ 매일 의식처럼 이 냄새를 맡으며 아침을 시작한다. 아직 업무 시작 전이니까 소파에 몸을 기대고 게으름을 피운다. 어제 왜 난 그렇게 늦게 잤을까.

새벽은 내게 취약한 시간이다. 기억의 잔해들이 나뒹구는 황량한 벌판이다. 마의 새벽 두 시를 넘기면 증세는 더 심해진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전화통을 붙잡고, 쉴 새 없이 뒤척이다가 라면 물을 올린다. 침대 주위에 쌓인 책더미에서 소설을 하나 골라잡고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의식은 더 또렷해지고 새벽 네 시쯤 되니 잠이 쏟아진다. ‘대체 지금 뭘 하는 거지.’ 그제야 내가 잘 수 있는 시간이 고작 세 시간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불에 머리를 파묻고 잠들기 전부터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린다. 커피를 줄여야지 줄여야지 하면서도 줄이지 못하는 건 왜일까. 난 왜 커피잔이 옆에 없으면 불안할까. 누구나 하나쯤은 인생에 별반 도움 안 되는 데 중독되기 마련이라는데. 도움이 안 되긴 왜 안돼. 모닝커피가 없다면 난 극심한 무기력에 시달릴 텐데.


물이 끓는 소리에 눈을 비비고 드립을 시작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 입 먹고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쓴 소설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데, 난 예가체프 드립 커피 향을 들이마시며 내가 하루 8시간 노동을 해야 퇴근할 수 있는 샐러리맨이라고 주문을 건다. 어서 정신 차리고 일이나 하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큼 길고 긴 장편소설은 못 썼어도, 11년 넘게 일을 해왔으니 내가 마신 커피는 내 방광과 요도를 거쳐 대한해협을 지나 태평양까지 많이도 흘러갔을 것이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한 조직에서 일을 해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커피 너 없었으면 버티기 어려웠을 거야 고마워.

원두를 갈고 내리는 과정은 귀찮지만, 커피 향은 혹독한 아침에 조금이나마 온기를 불어넣는다. 업무차 내 사무실을 들르는 모두가 이 냄새를 좋아한다. 난 목소리를 내리깔고 이렇게 말한다. ‘이건 로스팅한 지 일주일 된 예가체프 원두커핍니다. 향이 참 좋죠. 에티오피아 농부들이 이 원두를 키우기 위해 쏟은 땀을 떠올려봐요. 한 잔 따라 드릴까요.’ 설탕 조절을 하는 안성기 님처럼 커피잔을 들고 그윽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사실 드립 커피 내리는 요령은 어느 카페에서 열린 강좌에서 전부 보고 배웠다.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커피 박람회에 가서 도구를 사들여놓기도 했다. 근데 아침엔 귀찮아서 대충 물을 때려 붓고 만다. 점 드립, 동전 드립 신중하게 물줄기를 고르고 팔뚝 근육이 잘 보이게 자세를 취하고 조심스럽게 물을 붓는 건 여자 앞에서나 하는 기술이다. 최대한 빨리 커피를 흡입하고 싶은 아침엔 우선 뜨끈한 커피 국물을 들이켜는 게 우선이다. 열이 오르면서 강력한 카페인이 몸 전체를 휘감는다. 나는 종종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가 제 팔에 헤로인을 주입하고 고개를 젖히고 전율하는 것과 아침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이왕이면 마일즈 데이비스나 찰리 파커보다는 잘생긴 쳇을 상상한다.) 그러면서 최근 대마초를 하다가 붙잡힌 미국 교포 출신들이 모인 힙합 레이블 '메킷레인' 래퍼들이 대마 합법화를 주장하고 다닌다는 뉴스를 떠올렸다. 내 전 여자 친구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 누군가와 연애담을 나누며 그 자리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다들 그렇게 뭔가에 취해서 사는 거지.’ 내 아버지도 아침에 숭늉 같은 연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아침을 시작하셨다. 아버지와 파리 여행을 할 때도 매일 아침 뜨끈한 원두커피를 마시면서 여정을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알다시피 유럽은 에스프레소나 룽고 정도지 아메리카노같이 물 많고 뜨거운 커피는 찾기 어렵다. 그래서 결국 찾아간 간 곳이 맥도널드였다. 미제가 좋다는 걸 알지만 카페의 도시 파리까지 와서 햄버거 냄새 풀풀 풍기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게 짜증이 났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아버지가 그걸 원하니 난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맥도널드 매장 이 층에서 창밖을 보니 누벨바그 영화에나 나올법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기자기한 커피집이 즐비했다. 한 파리지앵이 아침 출근길에 작은 에스프레소 잔에 설탕을 넣고 휘휘 저어 마시며 서둘러 지하철로 향하는 게 보였다. 저들도 저리 취해 사는구나. 사는 게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며 물이 많은 커피를 후후 불어 마셨다.


매일 커피를 마시면서도 잔을 잘 씻지 않아서 끓인 물로 대충 컵을 헹구고 커피를 따른다. 내가 왜 이렇게 더럽게 사는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유달리 귀찮은 게 설거지다. 설거지가 싫어서 집밥을 안 먹는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렇게 더러운 컵에 커피를 담아 마시면서 문서 결재를 시작했다. 매일 책을 읽고 나름대로 독서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일에 관한 문서만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먹고사는 일과 관련된 게 오늘 쓰는 글처럼 흥겨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커피도 좀 줄일 수 있을 텐데. 도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문장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 남은 커피를 다 마셔버렸다.

반복되는 일상에 질식할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드립 커피 정도로 아침을 위로하기 버거운 시간이었다. 벗어나고 싶었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늘 떠올렸다. 하지만 목구멍은 포도청이라 결국 포기하고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서식지를 바꾸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차분히 보고 작은 변화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뿐이었다. 산책하고 창밖을 보며 내 삶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걸 의식하려고 애썼다. 다들 이렇게 사니 실망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날씨에 민감해졌고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려고 노력했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미묘한 변화를 느끼며 글을 썼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떠올렸다. 매일 아침 커피가 내게 그런 존재였다. 커피는 활기찬 주중과 비교적 한산한 주말에 차이를 만들고, 커피를 마시며 내 곁을 스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공원을 소요했다. 헬스장에서 매일 보는 사람.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사람. 출근길에 자주 마주치는 사람. 카페에서 늘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매일 다른 커피 향과 매일 다른 뉴스처럼 내 눈에 그들은 각자 다른 한순간을 사는 것 같았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산다는 게 심심찮은 위로로 다가왔다. 비로소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버틸만한 것으로 바뀌었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보고서를 쓰고 문서 결재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삶이 내 것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이게 벌써 몇 잔째인가 몰라.


보고서를 띄우기 전에 미국 대선 개표상황이 궁금해서 핸드폰으로 어제자 JTBC 뉴스 다시 보기를 틀었다. 손석희 앵커가 그만둔 후로도 뉴스룸만 보는 건 정이 들어서일까. 한창 뉴스룸을 열심히 볼 적엔 오로지 이 보도만 신뢰할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요즘은 그보다는 일종의 리추얼로서 늘 보던 두 앵커와 세상 돌아가는 꼴을 살핀다. 내게 드립 커피와 뉴스룸은 아침을 여는 한 쌍이다. 요즘 진행하는 두 앵커는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손석희 앵커가 다시 오면 더 좋고. 정을 떼는 건 무서운 일이다. 기억을 떨쳐내는 일이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 애를 써야 겨우 될까 말까 한 고난도 인생살이다.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사고들이 뉴스를 가득 채우지만, 내 머릿속에는 고달픔을 해치울 수 있는 누군가를 향한 집착밖에 없다. 드넓은 퀘벡주의 깊고 깊은 숲을 다 태우는 산불을 보면서도 내 관심은 온통 카톡 창에 가 있다. 실패를 반복할 줄 알면서도 말을 걸어본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서도 짐짓 신나는 척 텐션을 올리고 한껏 들뜬 이모티콘을 섞어가며 어제 새벽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군다. 네가 한 말이 당최 기억이 안 나고,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너스레를 떤다. 더는 연락하지 말자는 부탁도 다 잊었다. 산불은 내가 잠든 새벽 시간에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유구한 세월을 품어온 녹음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게 가당키나 한가.' 낯선 도시에서의 삶도 다시 내 루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석 달이 지나서 커피 맛도 예전과 다르지 않다. 다음엔 예가체프 대신 과테말라 안티과를 좀 사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