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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02. 2016

아무리 잔혹하다 할지라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Right Now, Wrong Then, 2015)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는 홍상수의 겨울 영화는 북촌과 종로 일대의 분위기로 날 이끌었다. 코트를 여미고 커피집과 고갈비집을 기웃거리는 홍상수의 페르소나는 내게 익숙한 거리를 걸으며 낯선 생각을 한다. 그걸 엿듣는 재미에 난 여전히 그의 영화를 반복해서 돌려본다.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살고 싶어서. 통념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잘 보면서 살고 싶어서. 그래서 요즘도 그의 영화 촬영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산책을 즐긴다. 홍상수의 겨울이야기는 내게 늘 머물고픈 사색의 시간이다.


 겨울이 오니 눈 오는 수원을 배경으로 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떠오른다. 15년 여름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이 영화를 봤다. 상영관을 나와 이끌리듯 곧장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수원에 가서 행궁 주위를 배회하며 그들이 머물던 공간을 배회했다. 눈발이 날리는 허름한 골목에서 사진을 찍으며 마음을 녹이는 함춘수와 윤희정을 기억했다.

 무던히 춥던 날 함춘수는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GV 행사에 참여하려고 수원으로 향한다. 그는 꽤 심심했던지 하루 일찍 도착해 호텔방을 잡고 화성행궁 근처를 돌아다닌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함춘수는 예술영화 몇 편을 만든 먹물 감독이다. 부가적으로 덧붙이면 여자 같은 사람을 보면 한없이 감동하는 천진한 남자다. 커피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그는 행궁 내에 있는 복내당에 들른다. 느닷없이 ‘복내(福內)’란 단어를 상기한다. "일으켜 얻는 것은 밖으로부터 이고, 복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안으로부터이다." 그때 햇살이 내리쬐는 평상에 앉아 바나나 우유를 마시는 윤희정이 눈에 띈다. 정말 복이 생겨난 것일까. 윤희정은 귀엽기 여자다. 그녀는 모델 일도 하고 가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다. 두 사람은 대화가 잘 맞는다고 느꼈는지 한껏 들뜬 모양이다. 어느새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하며 담소를 나눈다. 서로를 알아가고 경직된 몸이 스르르 풀린다. 늦은 밤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에 심취한 두 사람은 애틋한 마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희정의 작업실(행궁동 레지던시)에서 시작해 초밥집(이찌마라 스시), 전통찻집(시인과 농부), 수원 팔달산 아래 불상이 눈에 들어오는 희정의 집 앞까지 거닌다. 문득 강원도로 떠날까 고민하던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짐을 받아들인다.


 영화가 독특한 건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이다. 지금과 그때가 연이어 등장하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보여준다.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진심이 동할 때 맞아 들어가고, 거짓이 부유하면 어김없이 틀려먹는다. 그러는 새 과거와 현재가 섞여 들고 시간과 공간이 모호해진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이 커피 프림처럼 두 사람을 섞고, 살을 에는 추위는 맑은 햇살에 누그러진다. 이야기의 반복과 상관없이 결과는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렸지만, 다시 만나진 않을 것이다. 홍상수의 수원 여행이 다시 있으리라 믿을 수 없고, 희정이 그 귀여운 얼굴로 서울로 떠난 춘수를 굳이 찾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갔고 진심도 그 순간뿐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우연에 의해 제각기 다른 반응을 하며 산다. 생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한낱 그림자에 가깝다. 일상이 아무리 잔혹하다 할지라도 찰나에 가까워 견딜만하다. 영화는 지금을 응시하며 통념의 찌꺼기를 털고, 위악과 전형에서 벗어나 진실을 털어놓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나았을까. 고민하고 자책하지만 그건 기억이 만든 술수일 뿐이다. 후회와 회한은 술안주에나 어울리는 주전부리에 불과하다. 술에 취해 휴대폰을 보며 처자식을 생각하는 춘수의 시간과 또 다른 약속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희정의 시간은 엇갈린다. 어그러진 말들이 장난처럼 오가고, 부끄러움을 감추고 감정이 속살처럼 올라올 때 영화는 처연한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혹독한 날씨에도 미련을 품고 연인은 멀어져 간다. 사람 사이는 꽃이 피고 지듯이 상황의 미묘한 결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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