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지갑에서 돈이 샌다

#2 재테크의 시대에 문화자본 축적하기

by 박민진

내 월급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최근엔 지폐를 쥔 기억이 없다. 수많은 청첩장을 쌩까서 그런 것 같다. '야 5만 원만 대신해줘'로 퉁치다 보니 사임당 님과도 멀어졌다. 편의점에서 카카오페이를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휘두르며 다닌다. 내 돈은 그냥 계좌에서 수치로 오르락내리락할 뿐이다. 그 숫자가 0이 되지 않는 이상 내 삶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난 요즘 흔한 주식이나 펀드도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보험도 없다. 그냥 계좌 하나에 쌓아놓고 산다. 뉴스에서는 요즘 비트코인과 재개발 지역 땅 투기 열풍이 한창이라지만 내겐 저 먼 시베리아 벌판에 우뚝 선 늑대의 그림자처럼 먼 얘기다. 김진명 소설에나 나오는 허무맹랑한 얘기와 다를 게 없다.


오늘 뉴스에서는 도지코인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삶이 들썩이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작은 모니터에 나오는 수치가 삶을 오락가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게 기이했다. 하나뿐인 형이 명색이 자산관리사인데 이 모양 이 꼴로 산다. 몇 년 전 형의 강남 입성을 축하했지만, 나완 무관한 얘기로 들렸다. 난 큰돈과는 인연 없이 사는데, 같은 배에서 나온 저 아저씨는 주말에 스터디 모임까지 하면서 억대의 돈이 오가는 주식시장을 분석하고 있다. ‘어머니 어떻게 이리도 다른 형제를 낳으셨나요.’


그러고 보니 은행에 간 지도 한참 됐다. 은행에서는 달곰한 맥심 커피를 마시면서 우먼센스나 여성동아 따위의 여성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창구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노라면 속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떠나질 않았다. 왠지 모르게 루저가 된 기분이랄까. 내 관심사는 그보다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섹스, 이성을 오르가슴에 다다르게 하는 비법 같은 자극적인 기사에 가 있었다. 최근에 유행하는 속옷 광고 따위에 가까운 삶이었다.


나는 여전히 은행처럼 매끈한 빌딩에 들어서면 기가 죽는다. 대도시 태생인데 마인드가 소작농이다. 쥐꼬리 만한 월급이지만 나는 쥐꼬리를 우려내서 그럭저럭 살고 있다.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돈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 좋은 아들이자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어디 가서 폐 안 끼치고 살 정도는 되니까. 내 1인분을 지탱할 수 있다면 큰돈을 벌겠다는 야망 자체가 없다. 어느 카페에 가서든 커피 한 잔 정도는 가격도 신경 쓰지 않고 시킬 수 있으면 족하다. ‘아 근데 여전히 회전초밥집에서는 접시 색깔을 따지게 되더라.’ 연어랑 광어를 원 없이 먹을 순 없는 삶이지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부당하다는 것 정도는 글로 쓸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내 처지도 그렇게 나쁘진 않네.'


제러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을 읽으니 탈근대는 돈을 주고 경험을 사서 문화 자본을 축적하는 시대라고 하더라.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근데 그건 시대 탓이 아니라 주머니 사정 때문이다.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이니 이왕이면 형체가 없는 경험을 사는 게 이득이다. 없이 살면 그렇게라도 존심을 챙겨야 한다. 어쩔 땐 세상을 사는 게 오직 재밌으려는 싸움으로 느껴질 때도 많다. 사소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후에 의미를 지어내면서, 봐봐 내 일상이 그렇게 지루하진 않다며 자위한다. 그래서 내가 기꺼이 돈을 쓰는 대상은 한 편의 이야기에 가깝다. 책도 영화도 심지어 그 흔한 샐러드 한 접시를 사 먹으면서도 나중에 늙어서까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한 노작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내 인생이라는 서사가 결코 흔해빠지거나 보잘것없지 않도록 최대한 투자한다. 번지르르한 중산층의 삶과는 멀어졌으니 내 곳간에는 이제 예술작품의 감상평만 잔뜩 쌓여있다. 곳간 서랍을 열어보면 어디 가서 썰 풀기 좋은 농담거리가 가득하다. 과거엔 땅 투기든 주식이든 일확천금으로 부자가 된 건물주가 부러웠지만, 이제는 글을 멋들어지게 쓰는 지식인을 동경한다. 그게 좀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고, 그게 더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쓴 인생이라는 시나리오는 어떤 무대장치 위에서 펼쳐질까. 매일 그걸 고민하며 산다. 어떻게 해야 읽어줄 만한 드라마가 되려나. 통속극은 질색이니 먹물 냄새가 나면서도 뭔가 끌리는 구석이 있는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적절한 예를 끄집어내고, 얼마나 실감 나게 말하는지가 중요하다. 진지하기보다는 아이러니, 역설, 회의를 끌어내는 글이면 좋겠다. 내가 이상향으로 꼽는 작가의 글이 있다면 과거엔 로맹 가리, 최근에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다. 조금 냉소적이고 세련되고 어딘지 모르게 츤데레에 가까운 작가들이다. '꿈은 높이 가지랬다고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나.' 그래서 매일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지어내고 있다. 신춘문예는 올해도 어김없이 본선 통과도 못 하고 증발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엔 돋보이는 이야기꾼들이 너무 많다. 서점에서 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보면서 이를 가는 수밖에.


무질서하게 흩어지는 소설 속에서 미덕을 찾아내길 좋아한다. 내가 한국 단편소설을 계속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도 시대의 이야기꾼들이 아이디어를 쉼 없이 제조하기 때문이다. 내 노트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재능 있는 자는 빌리고, 천재는 훔친다."라는 문장이 곳곳에 적혀있다. 대문호의 품에서 아양을 떨면서 비결을 하나라도 건져내야 하니까. 글을 훔치는 짓 따위야 돈이 되진 않지만 그래도 어수룩한 시인 흉내는 낼 수 있다.


한 사람의 소비 패턴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사는지 알 수 있다. 돈을 모아서 명품을 사는지, 적금을 드는지, 모조리 여행에 쏟는지, 술값에 탕진하는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 수 있다. 효율과 생산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 절정과 쾌감에 쏟는 걸 우선하는지도 갈린다. 미국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는 문자 작품으로 대번에 유명 작가가 됐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튼 이 문구는 쇼핑백처럼 보이는 빨간색 테두리에 붙여져 소비사회의 시각적 이미지를 표상했다. 작가의 의도가 어쨌든 나는 이 문구가 현실을 우려하는 시선으로 보이진 않는다. 다들 플렉스 하면서 즐겁게 사는 건 나쁘지 않으니까. ‘돈이 좀 있으면 써줘야 경제 활성화가 되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들이는 영양제와 단백질, 헬스용품과 달마다 나가는 헬스용품을 생각해 보면 난 헬스를 위해서 거금을 쓰며 산다. 운동을 잘 해내기 위해서 운동에 도움이 되는 곳에 돈을 쓰는 건 바람직한 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소비의 핵심은 불안이다. 해마다 운동능력은 감소하고 있고, 체력은 떨어져만 간다. 어릴 적에는 뭐가 됐든 운동만 하면 괜찮은 삶이었는데, 지금은 운동 자체보다는 운동이 가져다주는 상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가. 나는 남들 못지않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여전히 백 치수의 옷을 거부감 없이 걸칠 수 있는가. 그럼, 오늘 단백질량은 다 채운 걸까. 어제는 식단을 지키지 못했는데 그럼 오늘 한 운동은 말짱 도루묵인가. 과거에 날 알던 사람이 오랜만에 날 만나면 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얘기해 줄까. 이제 늙다니 노땅이라고 손사래 치진 않을까. 어느 자리에서든 나의 외모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시간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어쩌면 난 여전히 나의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하지만 남의 시선에서 놓여나지 못한 걸까.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럴만한 외모를 가진 걸까. 이 헬스 유튜버는 저렇게 몸이 좋은데도 고구마 두 조각 먹고 오전을 다 보내네. 공복 유산소가 그렇게 좋다고? 공복을 버티려면 저 영양제를 먹어야 하는구나. 죽상을 하면서 헬스 하면서도 동안 피부를 유지하려면 저 종합비타민을 먹어서 활성 산소를 배출해야 하는구나. 그런 불안감이 엄습할 때 카카오페이 결제는 손쉽게 수면제를 처방한다. 아이허브와 헬스용품전문점은 나를 위해 신경안정제를 기꺼이 내어준다. 의사가 따로 없다. 청부해결사 저리 가라다.




소비가 곧 존재라는 말은 어떤 숙명적인 명제로까지 느껴진다. 카드 명세서를 떼서 보니 내 월급은 곳곳에 뚫린 하수구로 빠져가고 있었다. 분석해 보니 거진 다 먹는 곳으로 귀결됐다. 옷도 잘 안 사고 한때 빠졌던 애플 병(애플 제품 모두 사기)도 치유됐는데 이제 식욕을 주체 못 하고 있다. 나는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시간을 아끼려고 외식한다. 무엇보다 체중 관리를 위해 되도록 값비싼 샐러드나 초밥 식당에 간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내 가치판단은 상태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작가처럼 날씬한 몸매로 커피를 줄곧 마시면서 글을 쓰는 그런 이미지를 그려놓고 산다. 깨시민 흉내도 내야 하니까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고, 되도록 비건을 지향하는 식사를 한다. 무엇보다 스타벅스에서 한 달에 이십만 원 넘게 결재하고 있다. 나는 커피와 주전부리를 계속 사들이며 카페 귀퉁이 테이블을 내 작업실로 쓴다. 백색소음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귀를 틀어막고 주위 시선을 의식하면서 작가 흉내를 내는 경험에 매달 큰돈을 지불하는 셈이다. 이런 이미지 메이킹은 내 노력 여하에 달린 게 아니라 그냥 돈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태에 불과하다.


내가 경험이 아닌 소유에 투자하는 대상은 책이다. 예스24 골드 등급을 몇 달째 유지할 정도로 책을 엄청나게 사들이고 있다. 주말이면 알라딘 중고서점까지 걸어가서 굳이 무거운 책들을 들고 온다. 다 읽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물욕을 책으로 다 풀고 있다.(다이소 쇼핑만큼 방종하다) 우선 이름값이 있고 표지가 이쁘면 다 집어온다. 표지가 무슨 미술 팸플릿이라도 되는 양 내용은 보지도 않고 어머 내 거야, 하면서 집어올 때도 많다. 책은 집 앞 도서관에서 빌려도 되고, 다 읽으면 팔 수도 있는데 왜 이리도 장서가가 되려는 걸까. 책은 나를 꾸며내는 장신구로써 적합하다. 일종의 무대 소품이다. 그 어떤 물건도 집에 두기 싫어서 작아진 옷은 다 당근 마켓에 팔아 젖히지만, 책은 쌓아놓고 지식인이 사는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한 인테리어로 쓴다. 최근에 온라인 모임과 회의를 자주 해서 화상회의를 할 때도 책은 좋은 배경화면이 되어줬다. 뒤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화상회의를 하면 내가 마치 움베르토 에코라도 된 것처럼 넉넉한 기분이 된다. 그 자그마한 사각 틀 안에 무엇을 둘 것인지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카톡 프로필과 인스타그램 게시물만큼 중요한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 대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거실 벽에 유명 화가의 프린트물 복제본을 데코로 걸어놓는다. 몬드리안이나 로스코의 작품을 인쇄한 액자를 단돈 사오 만 원에 구입해서 내 지적 허영을 드러내는 식이다. 난 사각 프레임 안에서도 지식인을 연기하면서 문화 양식을 애용하고 있다.


요즘 같은 미니멀리즘 시대에 소유를 줄이고 내가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만 남겨두는 과정은 고스란히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각색 방식이다. 내가 아무리 큰돈을 만지는 사람이 돼도 플롯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세간을 가볍게 해서 늘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나라는 사람의 시나리오가 번잡스럽지 않은 노매드의 삶이길 바란다. 최근 뉴스를 보니 결혼과 출산을 바라보는 청년들 대다수의 시각이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한다. 집값 상승과 근로소득으로는 4인 가족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이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이런 세태를 문제시하지도 않는다는 앵커의 멘트가 인상적이었다. 궁지에 몰려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으로 삶의 궤도를 수정한 것이라는 의미였다. 어른들이 가르쳐 온 정형화된 삶의 틀을 거부하고 다채로운 경험에 투자하겠다는 말로 들려서 다행스러웠다.


인격을 뜻하는 페르소나라는 단어의 어원이 가면이라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생의 연극성은 시시때때로 들이닥치는 새로운 경험에서 진가를 발휘하니까. 변신에 능할수록 송강호처럼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왜 좋은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기도 할 것이다. 다니엘 카너먼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하고, 그 마무리가 어떤지에 따라 이야기에 대한 정서적 판단을 달리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가령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을 함부로 낙오자로 점찍는 세태는 어떤가. 섣부르게 죽음의 원인을 추측하는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의 저급한 보도 행태는 괜찮은가. 망자를 초라하게 만드는 찌라시는 실패한 이야기의 전형이다. 반면 끝까지 자신의 마지막을 살핀 사람은 죽음의 함정을 피해 가기도 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맹 가리는 유서 마지막 줄에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라고 적었다. 내 인생의 서사는 내가 마침표를 찍겠다는 의지였다. 그의 기념비적인 죽음은 많은 문학가에 의해 인용되고 살펴져 왔다. 삶은 결국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느냐로 판가름 나는 걸까. 누군가는 연금을 다 털어서 입주한 실버타운에서 평화롭게 삶을 마감하고, 누군가는 벽지에서 글을 쓰다가 피를 토하며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늘 이렇게 장황스럽다.


방금 윤여정 선생님이 오스카 트로피를 드셨다. 난 그녀가 출연한 수많은 영화 중에 딱 스무 편을 봤다. 그중 최고의 작품은 <죽여주는 여자>였고,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다. 난 그녀의 예술 활동에 꽤 많은 돈과 경험을 투여한 셈이다. ‘제 보잘것없는 삶에 빛나는 기억을 주셔서 고마워요, 윤여정 선생님.’